FTM·논바이너리·게이···어쩌면 가장 보통의 이야기[아! 젠더]

“성소수자는 홍석천 아니면 하리수 아냐?”
남성 동성애자나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한 MTF(male to female) 트랜스젠더만을 성소수자로 아는 사람들이 아직도 적지 않습니다. 성소수자는 정말 이들만 있을까요?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을 바꿨거나 아예 스스로의 성별을 지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양한 성소수자가 언제나, 어디에나 있습니다.
경향신문은 1일 ‘서울퀴어문화축제 20주년’를 맞아 지난 3월부터 다양한 성소수자를 만나 그들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봤습니다. 어쩌면 가장 보통의 이야기, 너와 나, 우리일지도 모르는 이야기. 함께 들어보실래요?
▶인터랙티브 기사로 더 많은 성소수자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인터랙티브]성소수자, 어쩌면 가장 보통의 이야기
■“‘상큼한 김선생’, 학교로 돌아가고 싶어요”

-자신을 소개해주세요.
“저는 36세 김기홍입니다. 논바이너리(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 이분법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고 바이섹슈얼(양성애자)입니다. 음악교사라는 정체성이 가장 커요. 비정규직이고 지금은 직장이 없지만요. 얼마 전에 어떻게든 먹고 살 길을 찾으려고 출판사를 차렸어요. 제주퀴어문화축제 공동운영위원장을 3년째 맡고 있어요.”
-어떻게 살아왔나요.
“고등학교 때 장학금 주고 악기도 배울 수 있다는 얘기에 관악부에 들어가 플루트를 하게 됐어요. ‘아, 음악을 전공 해야겠다. 나 음악 교육을 하면 더 좋을거 같아’하면서 사범대 음악교육과를 갔어요. 그런데 제가 창법이 교육과 치고는 특이했어요. 혼자 록 보컬이었거든요. 샤우트. 시창청음 강의에서 제가 ‘미솔도~’라고 (록커처럼 부르면서) 별명이 붙었어요. 재밌었는지 놀리는 의미인지 과 응원가가 돼서 졸업하고 10년 더 썼다고 하더라고요.”
“임용시험을 계속 쳤어요. 임용시험은 제주에서 최종을 2번 정도 갔는데 제가 피아노를 그렇게 잘 치진 않거든요. 피아노 전공도 치기 힘든 가곡 반주를 그대로 치라는 게 있어서 저한텐 많이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결과가 안 좋았고 비정규직 음악 교사로 살았죠.”
-음악 교사로는 어땠나요.
“외모를 많이 보더라고요. 파마 한번 하고 갔는데 학교에서 난리가 나고, 일도 많이 주고… 제주에서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는데 교무부장이던 분이 어느 날 화장하는 것을 문제 삼았어요. ‘화장 계속 할 거면 사직서 내라’ 그딴 소리를 하더라고요. ‘사직서 내라는 의미가 아니고 화장하지 말라는 거다. 화장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저는 ‘못 지킬 약속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했어요. 작년에 시간강사할 때도 교감이 저에게 그렇게 얘기하더라고요. ‘공무원은 품위유지의 의무가 있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모범이 돼야 한다.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성차별 예방 교육에서 그러지 말라고 배우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면 안 되죠’라고 하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했어요.”

-성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세요.
“중학교 때쯤 바이섹슈얼이라는 것을 깨달았아요. ‘난 바이섹슈얼이구나. 끌림을 느끼는구나’라는 걸 알게 됐죠. 하지만 소문이 나는 게 두려웠어요. 클로짓(성소수자라는 정체성을 밝히지 않고 숨어서 지내는 사람)으로 살면서 어떤 커뮤니티를 찾아 갈 생각도 못했어요. 대학에 들어갔을 때는 과 80%가 개신교인이이어서 더 두렵기도 했고요. 숨어 살다가 어느 날 복장을 바꿔보고 싶더라고요. 치마를 입고 싶었어요. 당시 남성으로 정체화를 하고 있었는데요. 애인님한테 치마입고 싶다고 하니 ‘어차피 남인데요’라고 말하는 거예요. 너무 감동 받았어요. 저를 한 사람으로 존중해주는 느낌이 너무 좋았거든요. 치마 입고 애인님이랑 내 치마 같이 고르러 다녔죠. 치마 입으면서 여러 가지를 찾아보게 됐어요. 그러다가 페미니즘을 접하고 논바이너리라는 것도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했어요.”
-커밍아웃은 어떻게 하게 됐나요.
“커밍아웃을 학생들에게까지 한 건 2017년 대선 때였어요. 당시 홍준표 후보가 ‘동성애가 문제다. 반대하십니까’라고 할 때 문재인 후보가 ‘반대합니다’라고 했죠. 공개 커밍아웃하고 (동성애를 긍정한)심상정 후보에게 후원을 했어요. 그렇게라도 힘을 보태야겠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다 제주에서 나름 유명한 오픈리 퀴어(성 정체성을 공개한 성소수자)라서 활동하다보니 제주퀴어문화축제 위원장이 됐어요. 유명해졌죠. 예전에 가르쳤던 학생들에게 연락이 오더라고요. 여성 음악가를 주제로 한 음악가 수업에서 한 얘기들이 고맙다거나, 예전에 선생님을 이해 못하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공부하면서 선생님 이해하게 됐다거나, 자기가 지금 아웃팅(성소수자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이 본인 동의 없이 밝히는 행위) 때문에 힘든데 상담을 한다거나, 선생님이 있어 그런 것을 알게 돼서 든든해졌다라는 말들이 들려서 행복하고요. 먹고 사는건 힘들지만 나머지는 괜찮아요.”
-여가 시간은 어떻게 보내나요.
“취미 생활 자체가 굉장히 줄었어요. 영화보고 리뷰쓰는 게 취미 생활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마음의 여유가 없더라고요. 작년에 (제주 도의원 출마) 지방선거를 치르고 나서 사이버불링(사이버 상 벌어지는 모욕과 비방 등 폭력)이 심해졌어요. 심지어 임용시험을 치는 주에 너무 심해진 거예요. 시험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아예 못 일어나겠는 거예요. 지금 일어나면 시험칠 수 있는데… 너무 무기력해서 한참 눈물만 흘리다가 아무것도 못했어요. 그런 무기력함이 많다 보니 취미고 뭐고 일단 움직이자는 생각만 하고 있어요.”
-바람이 있다면.
“저는 학교로 돌아가고 싶어요. 음악 수업을 하고 싶어요. 그게 제일 행복하고 제일 좋아요. 항상 쓰는 닉네임이 ‘상큼한 김선생’이에요. 저는 교사로서 정체성, 자아가 강해요. 예전에 학생들과 뮤지컬을 만들었어요. 다시 학생들과 뮤지컬과 영화, 집단 창작을 해보고 싶고요. 음악사 감상을 같이 하면서 당시 살았던 다양한 사람들을 음악을 통해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요. 학교 교칙은 학생만 얽매이지 않아요. 교사에게 이걸 단속하도록 강요하고 교사에게 모범을 보일 것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거든요. 이 안에서 정해진 성별 역할을 해야 해요. 제가 학교를 들어간다면 그것을 없앨 수 있을 거 같아요.”
“만약 기회가 된다면 법과 제도를 고칠 수 있게 정당 활동이나 입법부에서 활동하고 싶어요. 법적 성별에 있어 이력서 낼 때 제가 제일 불편한 건 남녀로 나뉘어져 있는 거거든요. 성별 표기란을 스스로 쓸 수 있게 공란으로 두거나 우리나라도 제3의 성도 쓸 수 있게끔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여권도 남성(M), 여성(F), 제3의 성(X)이 국제 표준이잖아요. 화장실도 1인이나 성중립 화장실이 확대됐으면 좋겠어요. 저번에 화장실에서 누가 ‘누나, 혼자 왔어요?’라고 묻는 거예요. 나왔는데 쫓아나왔어요. 매우 무서웠어요.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나 화장실에 가는 게 불편하지 않은, 다양한 사람들이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 싶어요.”
■“‘퀴퍼’ 인형탈로 이렇게 행복할 줄이야”

-자신을 소개해주세요.
“저는 22세 김현빈입니다. 퀴어문화축제에서 인형탈을 쓰고 있는 프리랜서 학생입니다. 꼬마병정이라는 인형탈 이미지에 가깝습니다. 성소수자로서 별다를 거 없이 똑같이 사회생활을 하는 하나의 대학생, 군대를 기다리는 학생, 직장을 구하는 학생일 수도 있고요. 이를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숨어살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런 예가 되고 싶어요.”
-어렸을 때 어땠나요.
“저한테 엄마라는 기억은 휠체어 타고 계시고 유방암 수술로 한쪽 가슴이 없으신 기억 밖에 없어요. 여성이란 단어를 생각하면 엄마가 떠오르는데요. 여자라는 성별은 지켜줘야 하고 아픈 거 같고 보호받아야 한다고 크게 와닿았어요. 제가 엄마의 병간호도 다 해드리고 수발을 다 해드렸으니까요. 여자라는 성과 몸 자체를 한번도 성적 대상화를 해본 적도 없었고 그 몸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어릴 때만 해도 모든 여성의 몸은 다 저럴 것이라는 게 너무 컸죠. 여성의 신체를 본 게 엄마가 전부였으니까요. 자연스럽게 돌아갔던 건 남성의 몸이었고 남성의 성별이었어요. 제가 다가가도 남자라는 성별에게 다가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요.”
“중학교에 들어가니 우리 가족이 좀 특별하고 다르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런데 이미 어렸을 때부터 제 관심사는 남성이란 성별이였죠. 주위 애들은 다 남자는 여자를 만나야 하고 여자는 남자 만나야 하는 게 너무 당연시 돼있었어요. ‘ 우리 가족은 좀 다르고 특별한데 나도 좀 다른 건가’. 그런데 이걸 가르쳐주는 곳이 없는 거예요. 그때만 해도 게이라는 단어를 몰랐어요. 학교에서도 성교육이 남과 여뿐인 거예요. 여성은 임신 주제로 이뤄져 있고 남성은 성병 정도 알려주는 게 단데 저한테는 이게 중요한 것 같지가 않은데… 정체성과 동성간이 저한데 더 필요한 질문이고 들어야 할 해답인데 보여주는 곳도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어요. 그런 질문을 해도 안 될 거 같은 분위기와 공간, 마치 제가 잘못하고 있는 거 같은 분위기가 있잖아요. ‘내가 죄를 지은 건가’. 애들은 다 맞다고 하는데 나만 혼자 틀렸다고 하니 나도 맞다고 해야할 것 같은. ‘아냐, 나도 여자 좋아해. 관심있어. 그런데 만나기 싫은 거야’라고 말을 해보고요. 이런 식으로 지내다 보니 의기소침했어요. ‘나는 사랑할 수도, 사랑 받을 수도 없나’ 보다 생각했죠.”
“속으로는 부모님을 탓하는 게 있었나봐요. ‘왜 그런 몸으로 나한테 쉽게 다가왔어?’ 쉽게 다가온 어머니의 몸, 당연스럽게 어머니를 도와드려야하는 게 저는 싫어진 거예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없으니까 고등학교를 예체능 쪽으로 해서 서울로 가고 싶다고 해서 혼자 왔어요.”
-성 정체성은 어떻게 깨닫게 됐나요.
“학교 다니면서 혼자 검색하고 알아본 게 다였던 거 같아요. 학교 다녀도 ‘이게 맞아 아니야’라고 해주지 않고 선생님들이 먼저 진지하게 임해주는 모습도 한번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요. 먼저 다가간들 어떻게 질문을 꺼내야 할지도 몰랐죠. 매일 검색해보고 직접 알아가고 혼자 공부해나갔어요. 그러면서 관련 모임을 알게 되니까 ‘내가 혼자는 아니구나. 나랑 비슷한 사람들이 정말 많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여기에 푹 빠지는 게 너무 좋은 거예요. 처음으로 나라는 사람을 이야기해보는 공간이었고 내가 드러내도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는 거예요. ‘너도 너야’. 이 공간이 잠시나마 너무 미안하게도 집을 조금 잊게 해줬어요.”

-퀴어문화축제에는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됐나요.
“검색하다가 퀴어문화축제를 처음 보게 됐어요. 그런데 SNS(사회관계망서비스)나 기사에서 알려주는 건 ‘음란하다’, ‘변태다’, ‘가면 좋지 않다’는 거였어요. 사진을 보면 또 다 벗고 있어요. 내가 봐도 저건 아니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궁금하니 혼자라도 가보고 싶었어요. 가보지는 않았으니 티켓을 끊어야 하는 건지도 몰랐죠. 우연히 파티용품을 판매하는 곳을 봤는데 인형탈을 대여하는 거예요. ‘인형탈을 쓰면 나도 혼자 갈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처음으로 쓰고 가봤어요. 인형탈이다 보니 사람들이 인사도 하고 사진을 찍어도 돼냐고 하고 안기기도 했어요. 혼자 돌아다니는데 너무 재밌는 거예요. 사회에서 보는 인형탈은 그냥 지나칠 뿐인데 먼저 물도 건내주시고 수고한다고 말도 건내주시는 감정과 느낌이 너무 좋은 거예요. 거기서 얻은 게 사랑받는 느낌이라는 것. 그때부터 계속해서 인형탈을 번갈아가면서 퀴어문화축제를 오가게 됐어요. 이젠 사랑받는 느낌보다는 저도 사랑을 주는 거 같아요. 인형탈로 퀴어문화축제를 다니면서 축제 이미지를 개선할 수도 있고 자그마하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것 같고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일상은 어떻게 보내나요.
“저는 프리랜서 피팅 모델로 생활하고 있어요. 고등학교 때 패션모델학과를 가고 싶었어요. 어렸을 때 경험을 쌓고 싶었어요. 업체에 이력서를 보내면서 ‘고등학생이다. 페이가 없어도 되니까 경험을 쌓고 싶다’고 했죠. 그때부터 경력이 쌓아지다보니 지금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이고 좋아하는 일이에요. 직업 적성에도 잘 맞아 계속 하고 싶어요.”
-옷 입을 때 중시하는 게 있나요.
“저는 옷 안에는 성별을 나누고 싶진 않았어요. 이걸 누가 입든 ‘옷은 옷이다’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교복을 매우 싫어했어요. ‘왜 남자는 바지고 여자는 치마여야 하지?’ 그래서 저는 더 스키니하고(붙고) 짧고 드러내는 옷을 입었어요. 그것이 여성적인 옷이어서 그런 게 아니라 옷에 성별이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렇다고 중성적인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고 ‘옷은 옷이다. 파란색이든 핑크색이든 제발 나누지 말자’. 여성들에게 치우쳐 있던 크롭티, 핫팬츠 등을 입고 사진을 찍을 때가 많이 있어요. ‘왜 남자가 이걸 입을 수 없는 거지? 왜 노출은 여성의 것이고 왜 남자는 넥타이에 꼭 단정해야 해?’ 너무 싫었어요. 그런데 오해를 많이 해요. ‘여성적 옷을 추구하나보다’라고. ”
-앞으로 바라는 점은.
“청소년 시기부터 배우고 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무지에서 나오는 혐오가 아닌, 알았을 때 나오는 존중과 이해로 넘어갈 수 있어요. 저도 결과적으로 소수자 인권을 안 것은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였으니까요. 소수자 인권이라고 했을 때 성소수자만 생각했어요. 인권은 위 아래가 없겠지만 ‘여성의 인권도 밑에 있구나. 장애인 인권도 밑바닥구나’. 이걸 성인이 돼서야 안 거니까요. 한쪽에선 종교적인 이유로 (동성애는) 죄악이고 하면 안 된다고 교육 받아오는데 한쪽에서는 틀렸다고도, 맞았다고도 알려주지 않아요. 오히려 그걸 알아야 하는 청소년들이 SNS에서, 자신만의 모임 속에서 해답 아닌 해답을 찾아가고 있어요. 선생님이 아닌 또래 친구들에게 경험담을 듣고 알아가고 있어요.”
“성소수자도 좋아하는 사람의 성별이 같거나 다르거나 그거 하나 말고는 남들하고 살아가는 게 다 똑같아요. 일상생활을 하고 있고 돈을 벌고 있고 여가를 즐기고 놀러다니고. 성소수자를 그렇게 내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항상 우리는 어디에나 있다 여기에나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개인적인 꿈이 있다면.
“어려서부터 뭐가 되고 싶었던 건 없었던 거 같아요. ‘오늘 하루 행복했으면 된 거 아냐?’라는 게 더 커요. 10대 때만 해도 내가 인형탈로 이렇게 행복할 줄 몰랐으니까. 내가 축제로 이렇게 웃음을 찾아오는 사람일 줄 몰랐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으니까. 앞으로의 지금은 이런 축제가 있으면 난 또 거기 가서 웃고 오겠지. 난 거기 가서 힐링으로 며칠을 지낼 걸 아니까요. 많이 모으자, 무얼 크게 하자는 것보다는 지금 하고 있는 활동과 축제의 한 참가자,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이 위치에서의 최선이 좋아요. 쭉 이래도 더 바랄 게 없는.”
■“여자로 살다 남자가 되니 화가 나요…이렇게 차이가 났어?”
-자신을 소개해주세요
“닉네임은 얀이에요. 22세고요. 부산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돈을 모으려고 서울에 온 지 1년 됐어요. 노래방 카운터에서 일해요. 다른 거 할 시간이 많지 않아요. 여자친구의 집에서 같이 살고 있어요. 돈을 모은 다음에 법원에서 성별정정을 할 거예요. 돈은 수술비 때문이죠. 400만원 정도 모았어요. 다른 분들 얘기 들어보면 법원에서 성별정정을 하려면 최소 1000만원은 든다고 해요.”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나요.
“복잡하네요.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을 한다는 게. 계속 비정상적인 삶을 살았던 것 같아요. 정체성이나 성에 관한 부분을 떼놓고 봐도 애가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거든요(웃음). 어릴 때부터 불안증이 매우 심했어요. 살고 있는데 안 살고 있는 거 같은, 내가 제3의 입장에서 나를 보는 거 같은 기분을 많이 느껴서 일상생활을 하는 데 불편했고요. 소위 말하는 아동학대를 많이 당해서… 어떻게 살아왔냐고 하면 기억하는 것도 얼마 없고요. 그래도 정리를 하자면 생각이 너무 정상적인 범위를 벗어나서 따돌림도 많이 당하고 집에서도 그것 때문에 혼나기도 했어요. 예를 들어 급식 먹는 순서를 두고 얘기를 했어요. 남자와 여자 중 누가 먼저 먹어야 하는지. 보통 열살쯤 되면 이유가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저는 책을 읽었으니까 이때까지 인류 역사를 봤을 때 선사시대 이후 기록은 여성 차별의 역사라는 소리를 했어요. 그러니 왕따를 당하는 거죠.”
-성 정체성은 어떻게 깨닫게 됐나요.
“14세쯤 사춘기 때 좋아하는 애가 생겼는데 여자애였어요. 제가 태어날 때 어쨌든 외관은 여자로 태어났잖아요. 여자가 여자와 연애를 하는 게 금기라는 것을 생각을 못하고 걔한테 자연스럽게 얘기했어요. ‘좋아해’ 이렇게. 걔가 ‘그러면 너 동성애자냐’라고 하는 거예요. ‘앗, 그런가보다’ 하고 걔랑은 못 사귀었죠. 걔는 동성애자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동성애잔가보다’ 하고 살았는데 좀 바보같죠.”
“작년 이맘 때였던 거 같아요. 디스포리아(태어나면서 의사나 타인으로부터 지정된 성별과 본인이 느끼는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음에서 느끼는 신체적·사회적 불쾌감)라는 개념을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가 얘기를 해줬어요. 전 거울을 못 봤어요. 예를 들어서 옷을 입고 있으면 괜찮은데 옷 벗고 있으면 거울 봐도 뭔가 내가 아닌 거 같은 느낌? 내지는 가슴을 보면 ‘얘가 왜 나와 있지?’라고 생각했죠. 저는 다들 그런 줄 알았어요. 여자애들이 다이어트 하면서 자기 신체를 별로 긍정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있잖아요. 그것 때문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그러면 나는 트랜스맨인가보다’ 라고 정체화를 하고 정신과 가서 진단 받고 호르몬 치료를 받아 지금 이 상태가 됐죠.”
-여자에서 남자로 인식이 바뀌니 달라진 게 있나요.
“별로 화낼 일이 없는 거 같아요. 여자였을 때는 두 세번 얘기해야 하고 어떤 주장을 하면 반드시 빽빽한 논증을 해야 했죠. 지금은 주장만 해도 ‘아, 그렇구나’ 하는사람이 많아요. 짜증나요. ‘원래 남자는 살아가는 난이도가 이 정도였어?’라는 생각이 들죠. 사실 제가 주휴·야근 수당도 못 받지만 대졸 여성 평균 임금보다 많이 받아요. 아르바이트와 대졸 직장인인데 차이나는 게 말이 안 되는 거 같고요. 어릴 때 받아온 대우와 지금이 너무 차이가 많이 나니까 화가 나는 거 같아요. 예를 들어 길거리에서 걸어다니잖아요. 그 전에는 저를 보고 누가 비켜주진 않아요. 서로 피해가든가 제가 피해가든가. 지금은 저 멀리서 제가 걸어오면 여자분들은 서로 피해가요. 20대 남자는 반 반 정도. 절대 저를 안 피해가는 사람이 있는데 아저씨예요. 호르몬하고 목소리도 굵어진 뒤 여자친구랑 둘이 가면 남자로 보이잖아요. 그 이후에는 아저씨도 반 반 정도 비켜줘요.”
“제가 고등학교 때 몸집과 키가 컸어요. 그 전에는 말 그대로 여자애였어요. 사람들이 별로 우호적으로 대해주진 않았어요. 만지고 추행하는 것도, 대놓고 낄낄거리는 것도 지금은 없죠. 이제 홍대 길바닥에서 널브러져있어도 아무도 안 주워갈 거예요.”
-대학에 다시 진학하면 무슨 공부를 하고 싶나요.
“예전에 대학 다니는 동안 별로 상태가 안 좋았어요. 공황장애와 불안장애가 심하게 와서 강의 듣다가 기절하고 그랬거든요. 자퇴했어요. 돈 모아서 트랜지션(성전환 수술 등 조치)을 하고 성별정정 절차를 마치고 대학에 갈 생각인데요. 학과를 정해두진 않았고 아마 사회 계열일 거 같아요. 대학에 가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그냥 공부할 때 제일 편하고 힘 안들이고 제일 잘 할 수 있는게 공부라고 생각해서요. 가만히 있으면 머리가 돌아가요. 물을 떠놨잖아요. 그러면 보통 물을 보고 ‘물이다. 마셔야지’라고 하는데 물을 보면 수자원을 둘러싼 분쟁 생각이 들어요. 생각이 드는 데서 그치지 않으니 책을 읽어보고 여자친구 대학 계정으로 논문을 읽어보는 식이죠. 학교가 부산에 있는 학교였는데 사실 부산에 있고 싶지 않았어요. 여자친구와 떨어지는 것도 싫고 부산에 있으면 부모님과 살아야 해서요. 부모님이 어릴 때 학대 가까운 행동을 많이 해서 볼 때마다 화가 나거나 무서웠죠.”
-아르바이트 생활은 어떤가요.
“오후 9시부터 다음날 오전 5시까지 노래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요. 집에 와 오전 6시쯤 되면 여자친구 깨우고 밥이랑 약 챙겨 먹이고 학교 보내요. 그 이후 8~9시간 자요. 호르몬 치료를 하면서 잠이 좀 들었어요. 제가 호르몬을 하면서 사실 여자로 보이진 않잖아요. 여자로 보인 적이 단 한번도 없어요. 그런데 주민등록증을 까보면 ‘2’잖아요. 고용계약서를 쓸 수 있는 사업장에는 일을 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되면 거의 다 제외되는 거죠. 남은 게 택배 물류, 아니면 아무도 안하려고 하는 일들. 시도는 했어요. 절박했으니까. 아르바이트를 거의 50개 지원했는데 주민등록등본을 내면 말이 없더라고요. 그 전에는 가게 설명까지 다 해주는 상태였는데요(웃음). 지금 일하고 있는 곳은 사장님도 옛날 사람이고 계약서를 안 쓰고 법도 안 지켜요. 그래서 그냥 봤을 때 남자애니까 남잔 줄 알고 그렇게 일하고 있는 거죠. 지금도 사실 등본 떼오라고 하면 짤릴 수도 있어요.”
-여자친구와는 어떤가요.
“거의 5년 정도 됐어요. 걔도 부산 출신이에요. 전 고등학교 때 ‘난 여자가 좋아’라고 말하고 다녔어요. 그랬더니 반 애들 중에 자기 친구도 그런데 만나보겠냐며 소개팅을 해줬죠. 친구들은 불편해 했는데 당시엔 몰랐어요. ‘그게 왜 금기야? 이게 도덕적 결함이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어?’라고 했죠. 그런데 제가 소위 말하는 공부도 잘했고 체육도 했으니까 별로 괴롭힐 만한 대상이 아니라서 그런 거지 만약 고만고만하고 조그만 애였으면 분명히 괴롭혔을 거란 확신이 있어요. 여자친구는 지적인 면이 잘 맞는 거 같아요. 사실 말이 통하는 사람이 거의 없거든요.”
-사회가 어떻게 바뀌길 바라나요.
“트랜스젠더로서 금전적인 문제가 제일 커요. 수술비가 많이 드는 이유는 건강 보험이 안 돼요. 비급여 항목인데 급여가 됐으면 해요. 사실 성형 수술이나 마찬가진 것으로 취급받는데 트랜스젠더의 경우 자기 몸이 자기 몸이 아닌 거 같은 감각이고 큰 불편을 초래하잖아요. 저는 트랜스젠더가 정신과 육체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질병 치료와 마찬가지라고 봐요. 또 트랜스젠더라고 하면 실비보험 등 보험 가입이 안 돼요. 그것도 어이 없는 거죠.”
“혐오 표현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실 할 말이 없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어차피 시류에 편승하는 거니까요. 정치적으로 올바른 게 시류가 되면 그런 얘기를 할 거거든요. 성소수자 당사자에게는 고등학교만 벗어나도, 경제적으로 독립만 해도 살 만 하니까 그 전에는 포기하진 말아달라고 말하고 싶네요.”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성별정정을 하고 지금 여자친구와 빨리 결혼을 하고 싶어요. 그거 말고는 대학 가서 이것 저것 해보고 깊게 탐구해보고 대학원 가서 석박사를 따고 싶어요.”
[이보라 기자의 ‘아! 젠더’]
‘아! 젠더’는 젠더 관련 아젠다나 화젯거리를 알게 됐다는 감탄사가 담긴 의미입니다. 편견없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볼 만한 젠더 이슈를 전합니다.
글|이보라 기자 purple@kyunghyang.com영상|배동미 기자 bdm@kyunghyang.com인터랙티브|김유진 디자이너 yjdigita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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