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벽화고분의 최고봉, 강서대묘를 찾아서
[고구려사 명장면-71] 2005년 7월 베이징에서 평양으로 향하는 조선항공에 몸을 실었다. 평양 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조사하러 가는 길이었다. 꿈에도 그리던 고구려 유적을 직접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설렘과 흥분으로 며칠째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물론 마음 한 편에는 적대적 관계로 호명되어 결코 가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북한 땅을 밟는다는 긴장감 또한 떨칠 수 없었다.
당시 고구려 유적 조사는 중국의 이른바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한 남북한 공동 학술사업으로 진행되었다. '동북공정'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동북공정을 계기로 우리 역사학계로서는 처음으로 고구려 유적을 직접 조사하게 된 매우 뜻깊은 '사건'이었다. 이때 고구려 유적 공동 조사의 대상에는 평양성을 비롯해 동명왕릉과 진파리 고분군 등 다수의 벽화고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필자가 개인적으로 가장 고대했던 것은 가장 멋진 사신도(四神圖)를 갖고 있는 강서대묘였다.
여기에는 필자 나름의 오랜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초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1972년 8월에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 안에 건물을 마련하여 새로 개관하였다. 지금 민속박물관이 들어 있는 바로 그 건물이다. 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필자는 종종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강렬한 한 장면의 기억이 그때 만들어졌다.
박물관 입구를 들어가면 바로 로비쯤에 해당되는 제법 널찍한 전시 공간이 있었다. 그런데 그 공간의 전시 벽면에 달랑 5점의 그림만 걸려 있었다. 바로 강서대묘 사신도의 모사도였다. 당시 로비 전시실은 조도를 낮추어 마치 무덤 속처럼 다소 어두컴컴했던 듯하다. 그런 분위기에서 사신도 모사도에 있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이 꿈틀거리며 벽면에서 살아나오는 듯한 느낌을 기억한다.
물론 그때는 그 그림이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모사도인지 뭔지도 몰랐다. 그냥 강서대묘 사신도의 제법 잘 그린 복제품이라고 생각했다. 이 강서대묘 사신도 모사도는 지금도 종종 국립중앙박물관 고구려실에 마련된 벽화전시실에 걸리곤 한다. 여기 고구려 고분벽화 전용 전시실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벽화 모사도를 순환 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중앙박물관을 찾을 때마다 벽화 전시실에 강서대묘 사신도가 걸려 있으면 한참을 쳐다보곤 한다.
하지만 지금 사신도 모사도는 좁은 전시장에 갇혀 있는 한폭의 그림일 뿐이다. 필자가 고등학교 때 보았던 로비 전시실에 사신도가 걸려 있는 그 분위기는 절대 재현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는 전혀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때 사신도를 그렇게 전시했던 큐레이터는 다른 것은 몰라도 사신도만큼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탁월한 이해를 갖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때 그런 전시를 할 줄 아는 그분이 누구인지 지금도 궁금하다.
두 번째 기억은 바로 '동북공정' 때문에 만들어졌다. 2002년 12월 초부터 코엑스 전시실에서 '고구려 -평양에서 온 고분벽화와 유물-' 전시회가 열렸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계기로 적어도 고구려역사 만큼은 함께 지켜야 한다는 공감대가 만들어지고, 그래서 북한에 있는 고구려 유물 다수가 남한으로 나들이를 하게 된 것이다. 그 유명한 해뚫음무늬 금동장식, 영강7년명 금동광배를 비롯하여 불꽃뚫음무늬 금동관 등 북한의 국보 유물 4점 및 와당 등 적지 않은 유물이 전시장에서 고구려인의 문향을 한껏 뿜어내고 있었다. 최고 수준인 그리고 가장 많은 고구려 유물을 직접 볼 수 있어 고구려 역사를 공부하는 연구자들이 그곳에서 마냥 행복해했다.
그런데 정작 필자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실물 크기로 재현된 5기의 벽화고분 무덤방과 그 안에 복제된 벽화였다. 안악 3호분, 덕흥리고분, 덕화리 2호분, 진파리 1호분, 강서대묘 등 5기였다. 내부 벽화는 북한의 만수대창작사 등 북한의 최고 화가들이 모사를 위해 실제 고분을 답사하고 적외선 촬영을 통해 밑그림까지 새로 확인하는 등 심혈을 기울인 결과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비록 원화는 아니더라도 마치 실제 고분에 들어간 듯한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충분하였다.
단지 도록 사진으로만 토막난 벽화들을 보는 것과 실제 크기로 재현된 무덤방 안에 들어가 벽화 전체를 온몸과 오감으로 느끼는 것은 전혀 달랐다. 역시 역사 공부에서 무엇보다 현장에서 저절로 생기는 느낌 또한 매우 중요함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안악 3호분부터 차례로 둘러보던 필자는 강서대묘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체험을 하게 되었다.
강서대묘 하면 누구나 그 유명한 사신도를 떠올린다. 필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앙박물관에서 사신도 모사도를 통해 강렬한 느낌을 갖고 있던 터라 더욱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재현된 강서대묘 무덤방에 들어갔다. 그런데 정작 필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던진 것은 벽화가 아니라 무덤방의 공간 그 자체였다.
상상했던 것보다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무덤방이 갖추고 있는 조화와 균형은 완벽한 공간감을 연출하고 있었다. 황금비율이라고 불리는 1대1.618의 비율이 있다. 사람이 가장 아름답게 느낀다는 비율이라고 한다. 강서대묘의 벽면이나 천장 공간 등에 이 황금비율이 숨어있는지 여부는 아직 아무도 따져보지 않은 듯하다. 만약 강서대묘 무덤방 공간에 1대1.618의 비율이 없다면, 어쩌면 황금비율을 강서대묘 무덤방에 담겨 있는 비율로 바꾸어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할 만큼 그 공간의 미학에 감동했다. 그건 수학이 아니라 그냥 느낌이었을지라도 내게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었다.
이런 필자 나름의 매우 인상적인 기억들을 갖고 평양에 도착했다. 그리고 며칠 뒤 평양에서 강서3묘로 향했다. 드디어 실제 강서대묘 무덤방 안에 들어섰다. "필설로 다할 수 없다"는 표현이 딱 맞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곳 강서대묘 무덤방에서 더 이상 강렬할 수 없는 새로운 기억을 만들었다. 그래서 다음 회부터 강서대묘의 벽화에 대해서 좀더 깊이 살펴보고자 한다.
끝내기 전에 한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2002년 고구려 유물 전시품 중 실제 유물은 북한으로 돌아갔고, 여러 복제품과 벽화고분 전시물은 여기에 남았다. 하지만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여 온 나라를 들썩이게 했던 '고구려 역사 지키기' 운동은 1년여 만에 싸늘하게 식었고, 또 그 뒤에는 남북 관계 또한 그리 평탄치 않게 되면서 고구려 벽화고분 재현 전시물은 갈 곳을 잃었다. 창고에서 숨도 못 쉬고 있으면서 하나둘씩 망가져 갔다. 다행히 2015년 한성백제박물관에서 기증받아 다시 수리를 거쳐 이듬해 12월에 '고구려 고분벽화' 전시회가 열렸다. 다시 전시장에 나오기까지 십수 년이 걸린 셈이다.
사실 전시회 준비는 만만치 않았다. 적지 않은 그림들이 손상되어 2002년 전시처럼 무덤방을 재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전시회 준비 과정에서 필자는 강서대묘는 반드시 무덤방을 재현해 달라고 신신당부하였다. 그 공간이 주는 조화로움을 다시 시민들과 함께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품은 앞으로 한성백제박물관 상설 전시의 일부로 만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꼭 찾아가 보시기를 권해드린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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