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전통 동양화가들은 하늘에 파란색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박상현의 일상 속 미술사]
그들이 전통적인 기법을 고집해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청전, 소정보다 후대에 속하는 운보 김기창은 아주 활발하고 현대적인 기법으로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소위 ‘바보산수’라고 일컬어지는 그의 풍경화에는 푸른색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정작 하늘은 은은한 노란색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쯤 되면 전통 화가들은 하늘이 파란 걸 몰랐나 하는 의심까지 해보게 된다. 왜 전통 동양화가들은 하늘에 파란색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고대 그리스인들이 본 하늘
동아시아의 ‘청색’이 파란색과 녹색을 모두 의미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문화권에서 녹색과 파란색은 같은 계열로 취급된다. 그런데 청색의 일부를 녹색으로, 다른 일부를 파란색으로 구분하는 것은 각각을 다르게 가리키는 이름이 생긴 후부터 가능해진다. 힘바족의 눈은 서양인들과 다르지 않았지만, 파란색이라는 단어가 없었기 때문에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학자들은 똑같은 실험을 하면서 파란색 사각형 대신 다른 사각형보다 조금 밝은 녹색의 사각형을 넣어보았다. 이번에는 힘바 사람들은 그 사각형을 바로 찾아냈지만, 유럽인들은 구분하기 힘들어했다.
색과 언어를 연구하는 가이 도이처라는 학자에 따르면 세계의 다양한 문화권에서 색 이름이 어휘에 등장한 순서는 거의 일정하다고 한다. 흰색과 검은색이 가장 먼저 등장하고, 그 뒤를 이어서 빨간색이 등장한다. 그 다음에는 거의 예외없이 노란색과 녹색이 나타나고, 마지막으로 파란색이 등장한다. 왜 그럴까?
인류는 자연에서 본 색에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직접 만들 수 있는 색에 이름을 붙였다. 특정 색상, 즉 염료를 꾸준하게 생산 가능해진 후에야 비로소 그 색을 가리키는 이름이 생겼는데, 뒤로 갈수록 만들어내기 힘든 색이었던 것이다. 주요 색상 중에서 자연 속에서 가장 찾기 힘든 파란색은 가장 만들기 힘든 색이었고, 그렇다 보니 어휘에도 가장 늦게 등장했고, 어휘에 등장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은 파란색을 보면서도 파란색으로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파란색 염료가 만들어진 후에도 하늘을 파란색으로 칠하지 않았던 화가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들의 눈에는 하늘이 파란색이 아니었을까? 도이처는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어린 딸아이를 데리고 실험을 했다. 아이가 2살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아내와 약속하고 아이에게 하늘의 색이 어떤 색인지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 아이가 장난감을 비롯한 주변 사물의 색을 말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아이를 데리고 새파란 하늘을 가리키면서 “저건 무슨 색이지?” 하고 물었다. 아이는 답을 하지 못했다.
아빠 눈에는 아주 선명하게 파란 하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아무 색도 없다”거나 “회색”이라고 대답하는 게 고작이었고, 몇 주가 지나서야 비로소 파란색이라는 답도 나오기 시작했지만, 그때도 아이는 회색과 파란색 사이에서 망설였다고 한다. 결국 우리가 하늘을 파란색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고, 그림 속 하늘을 파란색으로 칠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 아이들은 미국에서 태어나서 미국에서 유치원을 다녔는데, 어느 날 아이들이 내게 “페리윙클”이라는 색깔을 이야기했다. 나는 잘 모르는 색깔이라 인터넷을 찾아봤더니 하늘색과 연보라 사이에 있는 애매한 색이어서 딱히 구분해내기 힘들었다. 내가 쩔쩔매는 모습을 본 아이들은 깔깔 웃으면서 “여기에서부터 여기까지가 페리윙클”이라고 딱 짚어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내 눈에는 그저 연보라와 하늘색의 연장선일 뿐이었다.
유명한 뇌과학자 올리버 색스는 사람은 눈으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 눈은 빛을 인식할 뿐이고, 보는 것은 뇌가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청전, 소정, 운보 같은 화가들은 분명 파란색을 구분할 수 있었겠지만, 전통적인 그림 교육을 받은 화가의 눈으로 하늘을 봤을 때 파란색으로 그릴 만큼 분명하게 파란색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들보다 훨씬 늦게 태어난 화가 신장식은 하늘을 파란색이라고 배운 세대에 속할 거다. 그의 눈에 금강산 위에는 분명히 푸른 하늘이 있었다.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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