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수록 노래를 잘하는 '진화형 록보컬' 홍경민
[스쿨오브락-106] 지금으로부터 약 1년 전의 일이다. 강동구에 있는 한 주상복합 아파트에 자리를 잡은 소아과를 간 적이 있었다. 집 근처 무수한 소아과를 놔두고 왜 하필 일면식도 없는 그 병원에 갔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차를 타고 가다가 애가 아파서 갑자기 병원에 가야 할 일이 있었는지, 아니면 병원에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외출한 김에 근처 소아과에 들렀다 가는 것으로 얘기가 되었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확실히 기억나는 건 응급 상황은 아니었던 정도와 새로 지은 병원이 꽤 깔끔했던 기억 정도다.
애를 키우면서 병원에 가는 것은 외식을 하는 것과 매한가지다. 어디서 뭘 먹었는지 일일이 기억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만큼 병원에 많이 가게 된다. 지금부터 이야기할 이 에피소드가 없었다면 그날의 병원행도 아마 기억 너머 어딘가에 묻혔을 것이다. 하지만 병원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과 조우하면서 그날의 기억이 또렷하게 떠오르게 됐다. 그는 그 주상복합 아파트에 사는 애 아빠였다. 아이를 병원에 데려온 것으로 보였다. 티비에서 보는 것처럼 마른 외모에 진한 눈빛을 가지고 있는 호남이었다. 외모와 더불어 짧게 몇 마디가 들렸던 그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기억난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아, 이 남자가 왜 노래를 잘하는지 알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갈 정도였다. 일반 남성들의 그것보다는 미세하게 높은 보이스 톤과 말할 때조차 적당한 공명이 섞여 들리는 '트인 목소리'. 배에 힘을 주고 소리를 뽑으면 죽죽 올라가겠다는 생각에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의 이름은 홍경민, 이번주 스쿨오브락의 주인공이다.

홍경민을 떠올리면 누구나 기억하는 한 곡이 있다. 그를 '한국의 리키 마틴'이라고 불리게 한 '흔들린 우정'이 주인공이다. 명프로듀서 김창환의 진두지휘로 만들어진 이 곡인 김건모 '잘못된 만남'의 후속 격이다. 당시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라틴팝' 리듬에 홍경민의 탁월한 가창력이 더해지면서 그를 가요 프로그램 1위 자리로 밀어올렸다. 따라서 홍경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를 한때 인기를 끌었던 댄스 가수로 기억한다(물론 당시 그는 댄수 가수로 불리기에 큰 어려움이 없는 행보를 보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를 조금만 더 이전에 알았던 사람이라면 이 같은 착각에 쉽게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홍경민은 본래 록음악에 천착해 온 사람이었다. 1976년 2월생인 그는 약 7년의 시차를 두고 대학생이었던 신해철이 무한궤도를 이끌고 나와 대학가요제에서 우승하는 것을 지켜본다. 그때부터 그의 꿈은 가수로 점점 굳어진다.
밴드를 보고 음악생활 꿈을 꾼 만큼 그의 지향점은 밴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음악, 곧 록이었다. 1997년 한국 나이 22세의 그는 '이제는'이란 록발라드로 가요계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아쉽게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이런 가운데 1998년 내놓은 그의 두 번째 앨범은 소기의 성과를 거둔다. 여기에 실린 타이틀곡 '내 남은 사랑을 위해'가 나름의 인기를 얻는다. 뮤직비디오에 당시 최고의 주가를 달리던 축구선수(이제는 어엿한 감독이 되었으나) 고종수를 섭외해 화제 몰이에 성공한 것이다. 곡 자체도 홍경민 특유의 터지는 맛이 있는 명곡이었다.
내 앞에 니가 와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지만
어차피 널 볼 수 없어서 널 모른 척하는 날 이해해야 해
이럴 때 나에 곁에 누군가 사랑인 척 있으면
이젠 날 다 잊은 줄 알고 나 다시는 찾지 않을 텐데
아직도 혼자인 나를 보면서 넌 또 얼마나 울런지
너를 위해 아무리 감추려 해도 널 생각하면 눈물이 나
안돼 안돼 왜 떠나지 못해
내 곁에 있어도 너를 볼 수 없는데
안돼 안돼 날 다신 찾지마
내 남은 사랑을 보면 뭐해 넌 이미 떠난 걸
후략
최고음이 '2옥타브 라' 정도로 찍히는 이 곡은 홍경민만의 허스키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곡이다. 노래방에서 노래 좀 한다는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선곡하는 곡 중 하나다. 사실 홍경민의 오래된 팬은 '흔들린 우정'보다 이 곡을 더 좋아하는 경우도 많다. 김경호의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을 작곡한 이경섭이 만든 노래다. 이 노래를 부를 당시 홍경민은 실제 목소리보다 조금 더 디스토션이 걸린 거친 목소리로 고음 부분에 올라갔을 때 듣는 사람이 부담감이 없을 정도의 적절한 샤우팅을 곁들일 줄 아는 좋은 보컬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홍경민이 대박을 친 것은 2000년 6월에 나온 세 번째 앨범이었다. 김창환 사단에 합류한 그는 '흔들린 우정'으로 여러 차례 가요 순위 프로그램 1위를 차지하며 당대 최고의 인기 스타로 떠오른다. 준수한 외모에 정돈된 몸놀림, 그리고 예능에서 재치를 발하는 그의 순발력은 홍경민이라는 가수를 다양한 용도에 활용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게다가 다음 앨범에 수록한 '가져가' 역시 '흔들린 우정'과 비슷한 댄스 스타일로 편곡해 1위에 오르는 재미를 봐서 2000년대 초반 홍경민은 '록발라드에서 댄스가수로 변신해 성공 스토리를 쓴' 가수 정도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후 활발하게 예능에 출현해 재치를 뽐내면서 홍경민은 음악인을 넘어 방송인, 예능인의 포지셔닝에 위치해 있기도 했다.
그런데 음악인으로서 장벽을 만난 직후 홍경민은 오히려 자신만의 음악 스타일을 부담없이 선보일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다. 2002년 다섯 번째 앨범을 야심 차게 내놨지만 급성 간염 여파로 활동을 쉬게 되고 결국 그해 10월 육군에 입대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홍경민의 전성기는 냉정하게 말해 5집 앨범이 나오기 전, 군 입대 전이라 할 수 있다. 군대에서 제대한 그는 그를 대표할 만한 히트곡을 더 이상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보컬리스트로서의 홍경민의 역량은 오히려 전성기 이후에 더 발전하게 된다. 그는 최근 불후의 명곡 등에 단골손님으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곡을 홍경민 스타일로 불러내는 재주를 보이고 있다. 그는 데뷔 초기 시절 목소리를 일부러 갈아내며, 고음에서 안정적이지만 약간은 막혀 있는 발성으로 노래를 하곤 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그를 보면 목소리가 확 트여 어떤 노래도 자유자재로 불러내는 놀라운 역량을 과시한다. 젊었을 때보다 노래를 훨씬 잘한다. 낼 수 있는 음의 범위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그가 불후의 명곡에서 불러낸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 그의 개인 유튜브 채널에서 선보인 '천년의 사랑' 등을 들으면 보컬리스트의 성대는 마음먹기에 따라서 나이가 들어도 더 쨍쨍해질 수 있다는 게 느껴진다. 3옥타브가 넘는 고음역에서 그는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발성으로 홍경민의 색깔을 입힌다. 그는 고음에서 턱을 바짝 당기며 성대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바이브레이션을 얼굴 전체에서 진동시키는 식으로 소리를 낸다. 그의 얼굴 전체를 악기로 활용하는 좋은 발성의 전형이다. 타고난 고음역을 기반으로 피지컬만 믿고 확확 질러대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는 지금의 자연스러운 고음역을 얻기 위해 그의 성대와 안면근육, 얼굴뼈의 진동을 최적으로 이용하는 그만의 방식을 갈고 닦았다. 홍경민만의 '소리길'을 만들어낸 셈이다. 그가 각고의 노력 끝에 얻어냈을 것으로 보이는 이 음역대는 절대 삑사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안정적이며 파사지오 구간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다. 적절한 허스키 기반 바이브레이션이 섞인 소리의 질은 탁월하고, 발성에 실어보이는 발음도 굉장히 정확하다. 현시점에서 홍경민은 탑클래스의 보컬리스트라고 칭송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 그의 20대보다는 30대의 가창력이 더 좋았고, 30대를 넘어 40대인 그의 노래 실력은 더 진화했다. 피지컬에 의존해 고음을 시전하는 무수한 보컬과 달리, 홍경민은 그의 몸의 어디를 써서 어떻게 소리를 만드는지 노하우를 알고 소리를 만들기 때문에 그의 노래 실력이 퇴보하기는 오히려 힘들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홍경민을 대표하는 히트곡 행렬이 '흔들린 우정' '가져가'를 비롯한 댄스곡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다른 가수의 노래 말고, 본인의 노래로 세상 사람에게 큰 사랑을 받게 되면 상당히 보람 있는 일일 것이다. 아이돌 위주로 재편된 현 가요 시장 구조를 봤을 때 쉽지 않은 일이지만, 홍경민의 가창력이라면 장벽을 뚫고 사고를 칠 수 있다.
[홍장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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