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성 갑옷'에 숨은 백제 멸망의 비밀은?

2019. 5. 6.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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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의 시사문화재]

공산성에서 출토된 가죽갑옷
당나라냐 백제냐 국적 논란 '팽팽'

'백제 최후의 날' 관련된 희귀 유산
패망 단서 찾을 한중일 학제 연구 절실
지난달 20일 열린 목간학회 학술대회에서 처음 공개된 공주 공산성 출토 갑옷의 한자명문 조각들.

660년 7월18일은 백제가 신라·당 연합군의 발굽 아래 스러졌던 날이다. 백제 최후의 날이 펼쳐졌던 역사의 현장은 어디였을까. 백제 마지막 도읍인 사비(부여)로 점찍는 이들이 적지않을 듯하다. 낙화암에 투신한 삼천궁녀 전설부터 떠올릴 터이니. 하지만 백제 의자왕이 항복한 곳은 두번째 도읍 웅진(공주)의 공산성이다.

지난달 20일 목간학회 학술대회 발표에 앞서 공주대박물관에서 열린 공산성 출토 갑옷조각 공개회의 모습이다. 이현숙 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 보관함에 담긴 칠피갑옷조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해 7월13일 의자왕은 함락된 사비성을 빠져나와 선왕들 거처였던 공산성에 들어가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왕은 대치만 하다 엿새만에 항복해버린다. 일부 신하가 왕을 속여 항복하게 만들었다는 등의 모호한 기록과 추론이 나오지만, 투항의 구체적 배경은 안갯속이다. 공산성은 멸망의 비운과 항복의 미스터리가 서린 공간이 되었다.

1351년 세월이 흘러간 2011년. 옛 백제인의 저수조 터에서 한자 명문이 줄줄이 적힌 가죽찰갑옷(칠피갑옷) 조각들이 공주대 조사단에 의해 발굴된다. 가죽을 꿴 찰갑 조각들의 한자 명문(銘文) 일부엔 ‘정관(貞觀)19년4월21일’(645년)이란 당의 연호가 붉은 옻칠로 적혀 있었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원정한 해다. <삼국사기>엔 그해 백제가 원정가는 당 태종에게 ‘금휴개’란 갑옷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2014년 추가발굴 결과 칠피갑 유물은 말갑옷(마갑)과 큰 칼 위에 정연하게 포개져 놓였고 그 윗부분은 볏짚단으로 덮어 묻은 얼개가 밝혀졌다. 갑옷 조각이 나온 지층 바로 위에는 백제 가옥터가 폐기된 흔적이 드러났다. 멸망 직전 의례성 행위를 하고 갑옷을 묻은 자취가 드러난 것이다. 학계에서는 곧 국적 논란이 벌어졌다. 갑옷 제작처가 백제냐, 당나라냐는 것이었다.

지난달 20일 공주대 박물관에서는 갑옷 조각 공개 설명회가 열렸다. 갑옷의 국적 논란에 초점을 맞춘 목간학회 학술토론회에 앞서, 2011·2014년 발굴 뒤 6년여간 보존 처리를 한 칠피갑 명문조각 수십여편을 처음 공개한 자리였다. 그동안 출토된 뒤 판독문이 공개된 명문은 30여자였으나, 보존처리 과정에서 새로 판독된 문자가 60여자에 달한다고 이현숙 학예연구실장은 밝혔다.

지난달 20일 열린 목간학회 학술대회에서 처음 공개된 공주 공산성 출토 갑옷의 한자명문 조각들.

공주대 박물관은 첫 발굴 당시 칠피 갑옷을 당 태종에게 선물한 백제의 이름난 갑옷 일종인 ‘명광개’(明光鎧)로 간주했다. 당시 발굴조사단장을 맡았던 고 이남석 교수는 의자왕이나 백제 왕족이 썼을 것이란 추정도 내놓은 바 있다. 하지만 문헌사학계 쪽에선 백제는 중국 연호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당나라 장수 갑옷설을 제기했고, 중국 학자들도 당나라 제작설을 지지해왔다.

이날 공주대가 명문을 추가 공개한 것은 지난해 말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의 ‘공산성 출토 칠갑 명문 재고’란 논문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발굴 당시 일부 공개된 갑옷 명문들을 분석한 결과 명문 중 일부인 ‘익주(益州)’란 지명은 당나라 때 쓰촨성 청두를 일컫는 지명이며, ‘참군사(參軍事)’ ‘대부(大夫)’ 같은 명칭은 당대 관직임을 고증했다. 갑옷에 붉은 옻칠로 제작연도·제작지·제작 관청을 명기하는 것은 당 율령에 따른 격식임도 밝혔다. 쓰촨성에서 만들어진 갑옷이 알 수 없는 연유로 백제 땅에 묻히게 됐다는 논지였다. 백제설을 고수해온 공주대는 발끈했다. 유물을 공개할 테니 제대로 보고 토론하자며 학술대회를 연 것이다.

지난달 20일 열린 목간학회 학술대회에서 처음 공개된 공주 공산성 출토 갑옷의 한자명문 조각들.

유물 열람 뒤 이어진 발표·토론에선 팽팽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현숙 실장은 출토된 칠피갑옷은 중국에 선물로 보낸 갑옷의 제작 경위를 적은 백제 견본이라고 주장했다. 6세기 중국 남조에 파견된 백제 사신은 명문에 있는 ‘장사’ ‘사마‘ ‘참군’ 등의 중국 관직명을 썼다는 점과 갑옷 상반신 넓은 부위에 장문의 명문을 적은 것은 의례용 성격에 가깝다는 점, 갑옷 명문 연호인 645년뿐 아니라 626·637·639년 등 백제가 중국에 여러 차례 황칠갑옷을 보낸 역사적 정황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 등이 근거였다. 반면, 이태희 학예사는 공개된 새 명문들이 당나라산을 더욱 확실하게 입증한다고 풀이했다. 새 명문에 나타난 "사조참군사‘란 관직명의 경우 공장 공인을 총괄하는 고유직책으로 당 관직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명칭이라고 밝혔다.

공산성 갑옷은 7세기 동아시아권의 유일한 실물 갑옷이다. 6세기 이전 갑옷들은 무덤 부장품이라 출토품을 볼 수 있다. 하지만 6세기 이후엔 불교 전래 영향으로 무덤에서 갑옷이 사라진다. 이처럼 공산성 갑옷은 희귀한 가치를 지녔음에도 비교할 만한 다른 실물이 없어 제작처 논란을 명확히 결론 짓기 어렵다. 토론회를 지켜본 고고학자 김길식 용인대 교수는 “저수조에 막대한 분량의 무기류만 묻은 건 전의를 다지는 의례 성격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한중일 학자들의 학제간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갑옷 조각이 왜 공산성에 묻혔는지를 파악하게 된다면, 백제 최후의 날, 어떤 드라마가 있었는지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존 노리치의 <비잔티움 연대기>나 스티븐 런치만의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같은 역작이 백제사에서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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