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독도는 한국의 고유영토, '칙령41호'가 그 증거다

한국일보 입력 2019. 5. 4.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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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우산국의 영토였던 독도는 우산국이 신라에 편입된 이후 고려, 조선, 대한제국을 거처 계승되어온 우리의 고유영토이다. 독도가 일본영토였다는 증거는 단 한점도 없다. 그런데 오늘날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는 1905년 2월22일 ‘시마네현고시 40호’로 무주지(無主地)였던 섬(독도)을 ‘다케시마(竹島)’라는 이름으로 시마네현에 편입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거짓이다. 당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전쟁 중의 혼란한 틈을 타 편입하는 형태로 독도를 몰래 도취하려고 했다. 일본은 이런 편입 사실을 한국에 알리지 못하고 있다가 전쟁이 끝난 1년 후 1906년 3월 한성(서울)에 조선 통치기구인 통감부를 설치한 후 시마네현 관리를 울릉도에 파견하여 은밀히 군수에게 알렸다. 이 소식을 들고 경악한 심흥택 군수는 즉시 ‘본군 소속 독도(獨島)’가 일본에 의해 탈취 당했다고 중앙정부에 보고했고, 중앙정부는 통감부에 항의하여 독도 편취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이 독도를 편입 조치했다고 하는 1905년의 ‘시마네현고시 40호’는 섬(독도)이 무주지였기 때문에 편입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1905년 이전에 독도가 무주지가 아니고 한국영토였다면 일본은 ‘시마네현 고시40호’가 불법적인 것임을 인정하고 독도의 영유권 주장을 완전히 취하해야 할 것이다.

1900년 대한제국(고종황제)은 칙령41호로 ‘울도군’을 설치하여 ‘울릉전도(鬱陵全島)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를 관할구역으로 확정했다. 왜 이런 행정조치를 취했을까? 일본이 강화도조약을 강제하여 부산(1876), 원산(1880), 인천(1883)항을 개항시키고 1899년 당시 일본인 수백 명이 불법적으로 울릉도에 들어와 촌락을 이루고 경제를 수탈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고종 황제는 일본의 영토침략을 막기 위해 동해의 여러 섬에 대해 영토범위를 확정하는 조치를 취했다.

고종황제가 내린 ‘칙령 제41호’는 ‘울릉도를 울도(鬱島)로 개칭하고 도감(島監)을 군수로 개정한 건’이라는 제목이었다. 그 내용은 ‘제1조 울릉도를 울도라 개칭하여, 강원도에 부속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여 관제 중에 편입하고 군등(郡等)은 5등으로 할 것’이라고 하여 강원도 소속의 ‘울도군’을 설치했다. ‘제2조 군청위치는 태하동(台霞洞)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전도와 죽도, 석도를 관할할 것’이라고 하여 관할구역으로 “울릉 전도와 죽도, 석도(독도)”로 정했다. 여기서 ‘울릉전도’는 ‘죽도’와 ‘석도’(독도)를 제외한 주변의 섬과 암초들이다. ‘죽도’는 울릉도 본섬에서 2km 지점에 위치하여 주변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섬이다. ‘석도’는 바로 ‘울릉전도’와 ‘죽도’를 제외한 섬 독도이다. ‘제3조 개국 504년 8월16일자 관보 중 관청사무 란에 울릉도 이하 19자를 지우고, 개국 505년 칙령 제306호 제5조 강원도 26군의 6자는 7자로 개정하고, 안협군(安峽郡) 아래 울도군(鬱島郡) 3자를 첨입할 것’이라고 하여 관보와 칙령을 개정하여 기존의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고쳐 강원도 26군을 27군으로 확대했다. 여기서 ‘관보’는 행정부 및 국회, 관청의 결정사항을 공시하는 정부 고시문으로 외국 공관에도 배포되었다. ‘칙령’은 전제군주국가였던 대한제국의 주권자 황제의 명령서였다. ‘제4조 경비는 5등군으로 마련하되 현재 관리가 많지 않으므로 개척사업비는 섬의 세수에서 우선 마련할 것’이라고 하여 ‘울도군’ 자체의 세금으로 경비를 마련하도록 했다. ‘제5조 미진한 제 조항은 이 섬을 개척하면서 차제에 마련할 것’이라고 하여 향후 울도군을 적극적으로 개척하여 필요한 제 규정을 마련한다는 것이다. ‘부칙’으로 ‘제6조 본 명령은 반포일로부터 시행할 것’이라고 하여 반포일이었던 ‘광무4년(1900) 10월25일’부터 시행되었다. ‘칙령41호’의 발행인은 ‘어압(御押) 어새(御璽) 봉(奉)’ ‘칙(勅)의정부 의정 임시서리 찬정(贊政) 내부대신 이건하’라고 되어 고종황제의 어새가 찍힌 것으로 황제 명령으로 내부대신이 발행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이 1905년 “섬(독도)이 무주지였기 때문에 편입 조치했다”고 하는 것보다 5년 빠른 1900년 고종 황제가 독도에 대해 ‘칙령41호’로 영토조치의 일환으로 근대적 방식으로 행정조치를 취했다. 그런데 오늘날 일본은 ‘칙령41호’의 ‘석도’는 독도가 아니고, 지금의 ‘관음도’라고 우기면서 칙령41호는 독도와 무관하다고 사실을 날조하고 있다.

‘울릉도’라는 지명은 고대 우산국 시대부터 존재했고, ‘죽도’라는 지명은 1882년 이규원 검찰사의 조사보고서 ‘울릉외도’에 나타나 있고, ‘석도’는 당시 울릉도 주민들이 돌섬을 속칭으로 ‘독도(獨島)’라고 불렀는데, 이를 공문서용의 한자표기로 ‘석도’라고 했던 것이다.

최장근 대구대학교 일본어일본학과교수

최장근 대구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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