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어퍼컷 날린 WTO 검투사는 35세 예비신부

김기환 2019. 4. 22.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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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물 분쟁 승리 고성민 사무관
1심 지고 일본 허 찌를 논리 찾아
제네바 호텔서 3주 합숙 모의재판
"뒤집힌 판결문 받고 눈물 터져"
문 대통령 칭찬, 이 총리 식사 격려
지난 19일 삼청동 국무총리 공관에서 이낙연 총리와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금지 조치’ WTO 2심 승소 축하 오찬을 가진 정부 분쟁대응팀. 이 총리 오른쪽이 고성민 사무관. [사진 이 총리 트위터]
전쟁에는 주인공이 있기 마련이다. 지난 1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승전보를 알려 온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금지 조치’ 관련 세계무역기구(WTO) 한·일전에선 산업통상자원부를 주축으로 한 정부 분쟁대응팀이 주인공이었다. 대응팀은 일본이 2015년 WTO에 제소한 건을 맡아 왔다. 지난해 2월 1심에서 한국이 진 건을 최근 2심에서 깨끗하게 뒤집었다.

산업부에 역전승 주역 한 명을 꼽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랬더니 “처음부터 끝까지 끈덕지게 매달려 온 전문가가 있다”며 고성민(35) 산업부 통상분쟁대응과 사무관을 추천했다. 승소 직후 문재인 대통령이 “치밀한 전략과 젊은 사무관, 공직자가 중심이 된 소송 대응단의 노력이 큰 역할을 했다”고 언급한 ‘젊은 사무관’이다. 아래는 2016년부터 써내려간 그의 역전승 일기다.

지난해 4월 WTO 사무국에서 고성민 산업부 사무관이 포즈를 취했다. [사진 산업통상자원부]
◆2016년 10월, 인사 발령=통상분쟁대응과로 발령받았다. 언론에서 ‘소리 없는 무역 전쟁터’로 소개하는 곳이다. 내가 맡은 업무는 후쿠시마 수산물 분쟁 관련 한·일전. 전임자는 업무 인수인계를 하며 겁을 줬다. “지구 반대편 WTO 일정에 맞춰야 하는 업무라 밤낮·주말이 바뀌는 경우가 많아요. 무엇보다 상대가 일본인데 다들 ‘질 게임’이라고 하는 터라 힘이 많이 빠질 겁니다. 고생하세요.”

그날부로 나는 판결에서 다툴 ‘증거 자료’, 즉 로 데이터(raw data)를 챙기는 업무에 뛰어들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2018년 2월, 1심 완패=WTO는 식품·위생 관련 분쟁 40여 건에서 피소국 손을 들어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재판정에 선 일본 측 주장은 명쾌했다.

“후쿠시마 수산물의 방사성 물질(세슘) 수치가 위해(危害)기준치를 넘지 않는다. 다른 국가 수산물과 비교해 더 위험하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한국 측의 수산물 금지 조치는 과도하다.”

재판부는 일본 측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일본에 지고 나니 확실하게 알겠더라. 내 일이 국민 관심사였다는 것을. “후쿠시마 수산물 먹게 생겼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11월, 칼을 갈다=오랫동안 준비해 왔다. ‘완패’한 1심을 뒤집을 치밀한 논리를. 1심이 사실관계만 따지는 ‘사실심’이라면 2심은 법률만 따지는 ‘법률심’이다. 1심 주장을 그대로 밀어붙였다가는 질 게 뻔했다. 한국은 일본의 인접국인 데다 원전 사고란 특수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점 때문에 수입 금지가 불가피했다는 점에 집중하기로 했다. 1심에서 한국이 주장한 모든 요소를 다 살펴야 했는데 세슘 수치만 갖고 판결한 것은 부당하다는 점도 부각했다. 원정전에 오르는 군인의 심정으로 제네바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12월, 쌍무지개 전투=제네바 호텔에 짐을 풀었다. 산업부와 외교부·해양수산부·식품의약품안전처 등으로 꾸린 정부 소송 준비단 20여 명이 2심을 앞두고 3주간 합숙에 들어갔다. 매일 모의재판 ‘시뮬레이션’을 했다. 조금씩 합을 맞춰갈수록 그토록 단단해 보였던 일본 측 주장의 허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재판 당일 WTO 사무국 위로 ‘쌍무지개’가 떴다. 일행 중 누군가 “그동안 열심히 준비했는데 2심에서 이길 거란 징조 아닐까요”라고 말했다. 재판에서 일본 측 정부가 모두발언을 마친 순간, 한 줄기 승산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데이터가 풍부하고, 논리에도 막힘이 없었지만 1심과 다를 게 없는 주장이었다. 혹시 일본이 방심한 걸까.

◆2019년 4월 12일, Reverse=WTO로부터 판결문을 받기로 한 날도 야근 중이었다. 이미 보도자료는 ‘패소’를 전제로 준비하고 있었다. 판결문이 도착했지만 차마 읽지 못했다.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판결문을 읽는다고 생각하니 떨렸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e메일을 열어봤다. 판결문 맨 마지막 요지를 읽어내려가는데 “Reverse(뒤집다)”란 문구가 눈에 확 들어왔다. 눈물부터 터져나왔다.

◆4월 21일, 마무리=요 며칠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역전승 경과에 대한 보고서를 써야 했고, 국회 보고를 다녀왔다. 총리 공관에서 총리와 식사하며 격려도 받았다. 2심이 최종심이라 다 끝난 전쟁이지만 일본은 여전히 “한국에 수입금지 해제를 계속 요구하겠다”며 압박하고 있다. 확실한 마무리를 지을 일만 남았다.

인터뷰하면서 처음 공직에 들어선 길을 떠올렸다. 제주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법대, 미국 워싱턴주립대 로스쿨을 졸업했다. 2012년 뉴욕 변호사시험에 합격했던 일, 잠시 미국에서 법조인으로 일하다 한국으로 돌아와 2014년 5월 산업부에 특채로 들어온 일이 떠올랐다. 정부를 대표하는 국제통상 전문가가 되겠다는 당찬 꿈에 차근차근 다가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며칠 뒤 결혼식을 앞둔 예비 신부란 것도 종종 깜빡한다.

세종=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이 기사는 경제 부처를 중심으로 세금 아깝지 않게 뛰는 공무원·공기업 이야기를 전하는 [김기환의 나공] 시리즈입니다. ‘나공’은 ‘나는 공무원이다’의 준말입니다. 인터넷 (joongang.joins.com)에서 더 많은 콘텐트를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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