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사상 첫 블랙홀 관측엔 지구 규모 '가상 망원경'이 숨은 주역

김기범 기자 2019. 4. 14.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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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EHT 연구진이 밝힌 5500만광년 거리 ‘M87’ 촬영 성공 배경
ㆍ전 세계 전파망원경 8개 동시에 활용해 망원경의 구경·성능 키워
ㆍMP3 음악 4000년 들을 분량 데이터 분석…“다음 과제는 동영상”

인류 사상 최초로 지난 10일 윤곽이 공개된 블랙홀인 M87까지의 거리는 지구로부터 5500만광년이다. 빛이 1년 동안 나아가는 거리인 1광년을 약 9조4600억㎞라고 하면 5500만 광년은 52해300경㎞에 달한다. 어마어마한 거리지만 우주 전체를 다루는 천체물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정도는 ‘근거리’에 속한다. 전 세계 13개 기관 소속 200여명의 연구자들로 구성된 사건지평선프로젝트(EHT·Event Horizon Telescope) 연구진이 M87을 관측 대상으로 삼은 이유 중 하나다.

이번 연구에 참여한 독일 막스플랑크전파연구소 김재영 박사는 지난 11일 서울 중구 LW컨벤션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M87 은하는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가까운 은하”라며 “기존에 질량을 측정한 블랙홀 중 가장 질량이 큰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이 은하 중심의 블랙홀을 관측하게 된 이유”라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에 한국은 한국천문연구원 등 4개 기관 8명, 해외 기관 2명의 연구자가 참여 중이다.

근거리라고 하지만 일반적인 광학망원경으로는 관측이 불가능한 이 블랙홀을 보기 위해 연구진은 세계 곳곳에 있는 8개의 전파망원경을 동기화했다. 이른바 ‘가상의 망원경’인 ‘사건지평선망원경’이다. 연구진에 따르면 이 망원경의 멀리 보는 능력은 “인간으로 치자면 지구에서 달에 있는 탁구공을 육안으로 보는 정도의 시력”에 해당한다.

천문연 조일제 연구원은 “광학망원경은 망원경 크기를 무한정 늘릴 수 없지만 전파망원경은 여러 대의 전파망원경을 동기화해 하나의 커다란 망원경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이 가능하다”며 “서울과 제주에 각각 한 대의 전파망원경이 있다고 하면 서울~제주 간 거리가 망원경의 구경과 같은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연구진에 따르면 이번 관측에 사용된 사건지평선망원경은 이미 지구 규모의 성능을 갖추고 있어 더 이상 분해능이 올라가지는 않을 전망이다. 분해능은 망원경이나 현미경 등에서 상의 미세한 부분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SF영화 <인터스텔라>에서처럼 생생한 블랙홀의 이미지를 얻으려면 지구보다 더 큰 규모에, EHT보다 감도가 좋은 망원경이 필요하다.

지구 규모의 가상 망원경을 만드는 데 있어 최대 난관은 각 지역마다 다른 날씨였다. 한 곳에서만 비가 내려도 데이터의 질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다행히 M87을 관측한 2017년 4월5일부터 열흘 동안에는 모든 지역에서 날씨가 좋은 날이 많았고, 닷새에 걸쳐 고품질의 관측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다. 조일제 연구원은 “이렇게 5일 동안 얻은 데이터는 모두 4페타바이트(테라바이트의 1024배, 기가바이트의 104만8576배) 크기로, MP3 음악으로 치면 4000년간 들을 분량”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얻은 막대한 양의 데이터는 항공편을 통해 독일 막스플랑크전파연구소와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로 보내져 슈퍼컴퓨터를 통해 분석됐고, 10일 공개된 블랙홀의 이미지가 완성된 것이다.

간담회에서 한국 연구진은 이번 성과의 가장 큰 학문적 의미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검증된 것을 꼽았다. 김재영 박사는 “1919년 영국의 천문학자 에딩턴이 개기일식 때 일반상대성이론을 증명했지만 태양은 중력이 약한 천체”라며 “블랙홀처럼 중력이 극단적으로 강한 천체에서는 증명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일반상대성이론에는 거대한 질량을 가진 물체는 시공간을 휘게 만든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는데 이번 관측을 통해 거대한 질량을 가진 블랙홀이 빛조차 휘게 만든다는 점이 증명됐다는 얘기다. 지난 10일 공개된 블랙홀 이미지에서 검게 표시된 ‘블랙홀의 그림자’ 주변을 감싸고 있는 빛의 무리가 바로 블랙홀 중력에 의해 휘어진 빛이다.

한국 연구진에 따르면 올해는 EHT의 블랙홀 관측이 실시되지 않으며 기존 데이터 분석이 이뤄질 예정이다. 각국 연구진은 현재 전파망원경 사용을 신청하는 등 내년 관측을 준비하고 있다.

연구진은 앞으로 EHT의 최대 과제로 블랙홀이 내뿜는 것으로 여겨지는 제트 스트림을 포착하고, 그 정체를 규명하는 것을 꼽았다. 빛조차 빨아들이는 강한 중력을 가진 블랙홀에서 외부로 물질을 분출하는 현상이 왜, 어떤 원리로 발생하는지를 규명하는 것이다. 김 박사는 “이번 이미지에서 제트 스트림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아직 제트 스트림이 보일 정도의 해상도가 되지 않기 때문”이라며 “적어도 3개의 전파망원경이 추가되는 2020년에는 제트 스트림을 포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사진 촬영에 성공한 다음 단계인 동영상을 촬영하는 것도 과제 중 하나로 꼽혔다. 천문연 전파천문본부 정태현 선임연구원은 “EHT의 1단계 목표는 블랙홀 영상을 얻는 것이었고, 2차는 동영상 촬영”이라며 “천문학에서는 먼저 사진을 찍고, 다음으로는 물리량을 확인하게 되는데 앞으로 이 블랙홀의 회전과 자기장 등에 대해서도 연구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이 보유한 전파망원경을 관측에 참여시키는 방안도 추진 중”이라고 덧붙였다.

M87 은하와 함께 관측했지만 아직 분석하지는 못한 우리 은하 중심의 초대질량블랙홀인 ‘궁수자리A’ 블랙홀의 관측 데이터를 분석하는 것도 앞으로의 과제 중 하나다. 궁수자리A 블랙홀은 M87보다 훨씬 가깝지만 우리 은하 내부를 관통해 관측해야 하기 때문에 외부 은하에 비해 관측에 방해되는 요소가 많고, 그만큼 분석하는 것도 어렵다. 천문연 김종수 전파천문본부장은 “궁수자리 블랙홀은 M87에 비해 상대적으로 질량이 작아 M87을 먼저 분석한 것”이라며 “궁수자리 블랙홀 관측자료의 분석이 끝나면 또 다른 블랙홀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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