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 남아 있는 고구려 왕릉은 어느 왕의 무덤일까?
[고구려사 명장면-68] 지난 10여 회에 걸쳐 고구려와 수의 전쟁, 그리고 이 전쟁의 요인 중 하나인 고구려 요서 진출을 포함하여 고구려 사방 영역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 고구려 말기로 넘어가기 전에 분위기를 잠시 바꾸어 고구려 후기 역사의 이모저모를 둘러보고자 한다. 그 첫 번째로 왕릉 이야기다.
'고구려 명장면'을 연재하면서 고구려 왕을 주인공으로 하는 장면을 많이 다루었다. 그렇다고 왕들이 곧 역사의 주인공이란 뜻은 결코 아니다. 단지 남아 있는 자료가 워낙 적고, 그나마 그 자료조차 주로 왕과 관련된 정보를 담고 있다 보니 자연스레 어떤 역사적 사건을 다루어도 왕을 중심으로 기술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이란 존재가 단지 한 개인이 아니라 나름 한 나라를 대표하고 한 시대를 표상하는 최고 통치자라는 점을 고려하면, 왕의 행적을 통해 한 사회와 시대가 갖는 주요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왕릉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왕릉은 당대의 고분 문화나 장례 문화에 있어서 최고의 수준과 공력으로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 마찬가지다.
멀리 갈 것도 없다. 200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 왕릉'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무덤 중에 왕릉을 넘어서는 그 어떤 무덤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규모도 그러할 뿐만 아니라 무덤을 장식하는 여러 석물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장의 문화 등 모든 면에 있어서 조선 왕릉은 당대 최고 수준이다.
고구려 시대라고 다를 게 없다. 아니 오히려 고대 시기로 갈수록 왕릉이 갖는 상징적 위상이나 다른 고분과의 차별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왕릉이 다른 고분보다 훨씬 압도적인 형식과 내용을 갖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왕릉은 한 시대의 문화를 들여다보기에 매우 적절한 소재가 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어느 무덤이 왕릉이고, 또 그것이 어느 왕의 무덤인지 알아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수많은 고구려 고분 중에서 왕릉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것도 몇몇 되지 않고, 그중에서 어느 왕의 무덤이라고 확정할 수 있는 건 단 1기도 없다. 심지어는 광개토왕릉비가 의연하게 제자리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 근처에 있는 태왕릉과 장군총 둘 중에서 어느 게 광개토왕의 무덤인지를 놓고 많은 논란이 거듭되고 있을 뿐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사정이 그러하니 다른 왕릉들이야 말할 것도 없겠다. 고구려만이 아니라 삼국 전체를 놓고 보아도 피장자, 즉 무덤 주인을 알 수 있는 왕릉은 유일하게 지석이 나온 무령왕릉뿐이다.
이렇게 왕릉 여부 등을 알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왕릉 앞에 무덤 주인을 알려주는 비석이나 무령왕릉처럼 무덤 안에 피장자의 묘지명 등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고구려의 경우 무덤 주인공을 알려주는 묘지명이 기록된 3개의 고분이 있다. 이 연재에서 다룬 바 있는 안악3호분, 덕흥리고분, 그리고 모두루묘다. 그런데 이들 고분은 왕릉이 아니라 일반 귀족 무덤이다.
고구려 귀족과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수많은 무덤 중에서 현재 발견된 것으로는 단지 3기에만 무덤 주인공을 알려주는 묘지 묵서가 쓰여 있으니까 비율로 따져보면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평양 지역에 있는 안악3호분과 덕흥리고분의 무덤 주인은 망명객이기 때문에 고구려 출신 무덤으로는 모두루묘가 유일하다. 그런 점에서 모두루묘는 매우 중요하다. 이 연재에서 그동안 따로 다루지는 않았는데, 나중에 고구려 고분 문화를 살펴보면서 한 회를 할애할 예정이다.
왜 고구려인들은 누구 무덤인지 알려주는 정보를 남기지 않았을까? 무덤 안에 주인공의 초상을 비롯하여 생활상 또는 사신도 등 다양한 벽화를 한가득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름 몇 자 쓰는 것은 매우 아꼈다는 느낌이 든다. 조선시대에 무덤 앞 묘비는 의당 세울 뿐 아니라 명승지 곳곳에 자기 이름 각석을 남기는 분위기와는 천양지차다. 고구려 고분에서 묘지를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장의 문화나 내세관과 깊이 관련되는 복합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쉽게 답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있다. 오늘 우리는 어느 무덤이 왕릉이고 그게 누구의 무덤인지 알기 어렵지만, 고구려 당대에는 누구 왕의 무덤인지 다 알았다는 사실이다. 누구 무덤인지 몰라서 곤란한 점은 전혀 없었을 거다. 따지고 보면 누구 무덤인지 왜 기록을 남기지 않았느냐고 궁금해하는 것 자체가 고구려인의 시각에서 보면 답할 필요조자 없는 뚱딴지 같은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도 오늘 우리가 어떤 고분을 왕릉으로 볼 수 있을지, 또 어느 왕의 왕릉으로 비정할 수 있을지 궁금해하고 또 이를 따져보는 건 중요하다.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고구려 왕릉 전체를 다 따져보기는 어렵고, 28명의 고구려 왕 중에서 8명의 왕이 주인인 평양 일대의 왕릉만 일단 살펴보기로 하자.
그 8명이 누구냐 하면 평양으로 천도한 장수왕으로부터 문자명왕, 안장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 영양왕, 영류왕이다. 마지막 왕 보장왕은 멸망 후 당나라로 끌려가 거기서 사망하여 장안에 묻혔기 때문에 제외된다. 단지 8개의 왕릉만 찾으면 되는데 이게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몇 가지 기준을 정해서 평양 일대 고분 중 왕릉급 후보를 선정할 수밖에 없다.
우선 가장 먼저 고려되는 것이 고분 봉분의 외형 크기다. 크고 웅장한 외형이 다른 고분과 차별성을 보여주는 가장 1차적인 시각적 효과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시각적 효과는 거대한 봉분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과 경제력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잠재적 전제에서 나타난다. 그렇다고 어느 정도 크기부터 왕릉급으로 할 것이냐를 정하는 특별한 기준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고구려 시대에는 혹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다.
그래서 지금 따져볼 때에는 어느 정도의 크기부터 다른 귀족 고분과의 차별성을 보장하느냐가 중요하다. 국내성 시대 최후의 왕릉임이 분명한 장군총이 기단 한 변의 길이가 31.5m, 높이가 12.4m란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일단 왕릉급 규모는 봉분의 지름이나 한 변의 길이를 30m 전후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평양 시대의 고분이 국내성 시대의 고분보다 대체로 규모가 줄어든 점을 고려하면 20m 이상이면 다른 귀족들의 고분과 외형상에서 차별성을 갖출 수 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왕릉이라고 무조건 크게만 만드는 건 아니다. 크기에만 집착하는 것은 크기 외에는 별다른 차이를 만들어낼 줄 모르는 사고의 빈곤, 문화력의 초라함을 보여줄 뿐이다.
당연히 고분 내부를 얼마나 화려하게 꾸미고 장식하고 있는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대부분 고구려 고분이 도굴되었기 때문에 부장품으로 왕릉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고구려 고분 문화의 전통에서 보면 벽화가 그려져 있느냐 아니냐가 꽤나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그 벽화가 어느 정도의 회화적 수준을 갖추고 있느냐도 함께 고려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렇다고 벽화가 없다고 왕릉급이 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거대한 외형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왕릉급으로 판단할 수 있는 고분도 있다.
이 외에도 무덤 내부 석실의 크기나 축조 방식의 치밀함 등도 고려하여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최고의 공력이나 기술, 비용, 그리고 문화적 수준이 투입되었나 아니냐가 판단 기준이 된다.
대략 이런 가이드라인을 갖고 평양 일대 고분들 중에서 왕릉급 후보로서 다음 9개의 고분을 골라볼 수 있다. 예로부터 한왕묘 혹은 황제묘로 알려져 있는 경신리1호분, 동명왕릉으로 전해지는 고분(전동명왕릉), 전동명왕릉 인근의 진파리 1호분, 4호분, 토포리대총, 호남리사신총, 강서대묘, 중묘, 소묘 등이다. 이 외에도 벽화가 있는 개마총이나 내리1호분도 왕릉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여러 면에서 왕릉급으로 보기에는 미흡하다.
이제 위 9개 후보 고분 중에서 앞서 언급한 평양 천도 이후 8명의 고구려 왕을 무덤의 주인으로 비정해야 하는 역사 추리의 마지막 단계가 남았다. 이를 위해서는 고분의 편년, 즉 언제쯤 축조하였는지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8명 왕이 시기순으로 역임하였기 때문에 위 고분을 시기상으로 배열할 수만 있다면, 왕릉의 주인을 찾는 것은 간단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장품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고분의 외형이나 형식만으로 시기를 구분하는 것은 결코 간단치 않다. 그나마 대부분 벽화가 남아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편년이 가능하다는 점이 다행스럽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위 왕릉 후보군을 나누어본다면 경신리1호분, 전동명왕릉, 토포리대총, 호남리사신총 4기의 고분이 방형의 석축 기단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평양 천도 전반기 시대쯤으로 묶어볼 수 있고, 나머지 고분들을 그 뒷시기로 편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벽화나 일부 와당 등 출토품을 가지고 좀 더 정밀하게 앞뒤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기도 하다. 이는 다음 회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지금까지 평양 일대 고구려 왕릉급 고분에 대해 서설적인 이야기를 다소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논란은 적지 않지만 그래도 결론적인 답만 간단히 이야기해도 충분한데, 굳이 왕릉급 무덤과 그 주인을 찾는 추리 과정을 소개하려는 것은 고구려 역사를 탐색하는 과정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역사 이해의 본질은 결론과 해석이 아니라 역사 탐구의 과정에 있다. 그런 역사 이해를 갖출 때 비로소 요즘 횡행하는 자의적인 역사 해석이 꼬리를 감추게 되리라고 믿는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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