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귀엽고 사랑스런 '천재소년 두기'를 기억하시나요

간혹 연예인 중에 '팬'까진 아니지만 '편'을 들어주고 싶은 사람을 볼 때가 있다. TV를 거의 보지 않아 아는 연예인이 그다지 없는 나에게도 그런 사람이 하나 있는데, 바로 미국 배우 닐 패트릭 해리스. 흔히 NPH라고 한다. 70~80년대생이라면 TV 드라마 '천재 소년 두기(Doogie Howser, M.D)'에서 십대 소년이지만 천재적인 두뇌를 가져 의사로 활약하는 그를 기억할 것이다. 하루하루 많은 것을 배워 나가는 어린 두기 하우저가 DOS 체제로 운영되는 컴퓨터로 일기를 쓰는 장면으로 끝나곤 했다. 드라마가 종영하면서 귀엽고 사랑스러운 두기 하우저를 더는 볼 수 없게 되어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지나 싶었다. 그러나 드라마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How I met your mother)'(이하 HIMYM)에서 전설적인 바람둥이 바니 스틴슨을 연기하면서 아역 때 이미지를 완전히 버리고 다재다능한 연기자로 자리매김했다.
그가 맡은 바니 스틴슨은 여성과 잠자리를 갖기 위해 그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으며(본인 주장으로는 여성 200명과 성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서른 살이 넘은 여성과 뚱뚱한 여성은 사람 취급하지도 않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미워할 수 없는 구석을 가진 희한한 인물인데, 이런 날건달이 사랑스러워 보이는 데는 NPH 개인의 개성이 단단히 한몫한다. 그는 2006년에 공개적으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혔는데, 2011년 동성 결혼이 합법화된 이후 2004년 이래 사귀어 온 연인과 결혼식을 올렸고 대리모를 통해 아이들을 얻어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그가 게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릴 수 있었던 데는 NPH가 부모(이 경우엔 父父겠지만)와 자녀로 이루어진 미국의 전통적 가족상에 완벽히 부합하는 가정을 꾸렸고, 또 이 가정에서 헌신적인 가장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사실이 한몫하고 있다. NPH가 여성 혐오적인 인물을 연기하고 있지만 게이라는 사실이 시청자에게 잘 알려졌으므로 바니 스틴슨이 아무리 혐오스러운 짓을 해도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안심한 채 신나게 날뛰는 NPH를 볼 수 있다. 그의 코미디언 재능이 가장 빛날 때는 바로 자기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순간인데, 이것이 쉬워 보이지만 실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점에서 NPH의 유머 감각을 잘 알 수 있다.
'HIMYM'에서 아버지 없이 어머니 손에 자란 바니 스틴슨은 어머니가 중병에 걸렸을 때 편안히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연극배우를 고용해 약혼녀라고 인사시킨다. 그런데 웬걸, 어머니가 너무 기쁜 나머지 거뜬히 병을 이겨내고 만 것이다. 결국 시간이 가면서 어머니에게 화목한 가정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자기 아들 역을 할 아역 배우를 직접 섭외한다. 그러고는 죄다 마음에 안 든다며 "아역 배우는 80년대가 최고였어"라고 능청스럽게 자신을 추켜세우기도 한다.

다른 에피소드에서는 '천재 소년 두기'에서 쓰던 음악을 그대로 깔아 놓은 채 오늘도 어떻게 여성들과 신나게 어울렸는지를 쓰며 카메라, 즉 시청자를 장난스럽게 쳐다본다. 그날 있었던 배울 거리를 일기로 쓰는 두기 하우저의 모범생 같은 모습을 셀프 패러디한 것이다.
한국계 배우 존 조가 주연을 맡아 우리에게도 친숙한 '해럴드와 쿠마' 시리즈에서 그는 NPH 본인 역을 연기해 마약에 절어 있는 할리우드 스타의 모습을 실감 나게 보여준다. 3편에서는 실제 연인과 함께 출연한다. 연극 무대를 마친 후 연인과 정열적으로 키스하지만, 대기실로 들어가자마자 문을 쾅 닫고 그를 밀친다. "내가 혀 넣지 말라 그랬지, 이 ○○야!" 하며 화를 낸다. 한마디로 그들의 부부 생활은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기 위한 설정이라는 것. 그가 "마약을 주지 않겠다"고 협박하자 NPH는 바닥을 기며 약을 달라고 애원하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자신이 게이라는 점 때문에 전혀 그에 대해 경계심을 갖지 않는 아름다운 코러스 걸에게 뮤지컬에 대해 지도해 줄 테니 대기실로 오라고 꼬드긴다. 사실 자신은 게이가 아니라 여자를 유혹하려면 게이인 것이 편하기 때문에 그런 척하는 것뿐이라며 신나게 비밀을 늘어놓는다. 이쯤 되면 자신을 농담 소재로 삼는 데는 거의 도통한 셈이다.
이런 번뜩이는 유머 감각 말고도 NPH의 재능 중 하나는 춤과 노래다. 게이들이 유독 뮤지컬을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NPH의 활약을 보면 과연 그런가 보다 싶을 정도다. 'HIMYM'에서도 여자나 보석이나 돈보다 멋진 슈트가 좋다는 노래를 부르며 한 에피소드를 어엿한 뮤지컬로 장식하기도 했고, 브로드웨이 뮤지컬 '헤드윅'에서 헤드윅 역할을 맡아 2014년 토니상을 받았다. 2009년부터 쭉 몇 년간 토니상 시상식의 단골 사회자로 활약하다가 사회자를 맡지 않은 것이 이해다.
토니상 시상식에서 사회를 보는 그의 모습을 보면 말 그대로 물 만난 물고기 같다. 능청스러운 사회 솜씨는 기본이고 춤과 노래, 쇼맨십을 완전무결하게 발휘하여 토니상 시상식 오프닝을 언제나 축제 분위기로 만들어 놓는다. 2012년 토니상 시상식 오프닝은 아예 하나의 공연으로 만들어 고작 오프닝일 뿐인데도 전 관객에게 기립 박수를 받아냈다.
'흥부자'라는 말이 있지만 NPH야말로 보면 볼수록 흥이 넘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3년 영화 '아론과 사라'를 감독했을 정도로 다재다능한 데다 2014년 펴낸 자서전은 희한하게도 '게임 북'으로 구성했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 어린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페이지 어드벤처'로, 선택지를 주고 무엇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이 페이지 저 페이지로 옮겨 다니며 모험을 하는 형식인데 본인의 자서전을 이런 방식으로 펴내다니 정말이지 별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만능 엔터테이너'라는 흔한 말이 있지만 어쩐지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아역 배우로서 겪은 슬럼프, 사람들이 경원하는 게이라는 정체성 등을 모두 딛고 올라서 유쾌한 얼굴로 춤추고 노래하는 진정한 광대랄까. 그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세상이 조금은 즐거운 곳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이런 착각을 줄 수 있는 배우란 참 귀하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내내 그가 나를 속여 주기를 기대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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