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L Nostalgia] '원더 보이' 마이클 오웬 – 158
[STN스포츠(런던)영국=이형주 특파원]
Nostalgia, 과거에 대한 향수란 뜻이다.
지금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 무대에 훌륭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선수들이 많이 모여 있다. 그 원동력은 이전의 선수들이 우수한 플레이로 팬들을 매료시키며 EPL을 발전시켜 온 것에서 나온다. 이에 EPL Nostalgia에선 일주일에 한 명씩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선수들을 재조명해본다. [편집자주]
◇ '원더 보이' 마이클 오웬 - <158>
지난 23일 리버풀의 홈구장 안 필드에서 레전드 매치가 열렸다. 이날 경기에 초청된 선수들은 오랜만에 만난 팬들과 인사를 나눴고 많은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단 한 사람만은 미적지근한 반응만을 받아들었다.
이 선수가 팬들의 외면을 받는 것은 리버풀에서만의 일이 아니다. 현역 시절 몸 담았던 EPL 소속팀들에서 모두 환영을 받지 못한다.
뉴캐슬에서는 현역 시절 잦은 부상으로 비난을 받는다. 또 하나의 소속팀이었던 맨체스터에서는 25일 "내가 리버풀 감독이었다면, 노스 웨스트 더비 때 부상당한 마커스 래시포드의 발목을 차라고 했을 것"이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한 후 후 비난을 받고 있다. 현역 시절 원더 보이라 불리며 모든 인기를 독차지했던 그라서 더욱 어색한 모습이다.
오웬은 1979년 영국 체스터에서 태어났다. 영국 언론 BBC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인 테리 오웬은 젊은 시절 축구 선수로 활동한 이였다. 아버지의 존재로 인해 오웬은 어릴 때부터 축구에 흥미를 갖게 됐고 프로 선수가 되는 것까지 성공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오웬이 어린 시절 에버튼 FC의 팬이였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몸담았던 팀이고, 가족들이 응원하는 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웬은 리버풀 스카우트의 제의를 받고 에버튼의 지역 라이벌 리버풀로 합류했고 그 곳에서 역사를 써 내려가게 됐다.
오웬은 리버풀 유스팀에서 촉망받는 선수였다. 연령별 팀마다 두각을 나타냈고 만 17세에 불과한 나이에 프로계약에 성공했다. 오웬은 1997년 AFC 윔블던전에서 데뷔했고 원더 보이의 신화를 만들었다.
오웬은 리버풀 풀타임 첫 시즌인 1997/98시즌 리버풀에서 활약을 폭발시켰다. 만 18세에 불과한 그는 형들과의 경쟁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오웬이 속도를 살려 공을 몰고 가게 되면 상대 수비수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이를 통해 1998년 잉글랜드 대표팀에 승선한 그는 아르헨티나전 활약 등 빼어난 모습을 보이며 전 유럽을 매료시켰다. 자신감을 안고 돌아온 그는 1998/99시즌 EPL 공동 득점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가 리버풀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시즌은 역시나 2000/01시즌이었다. 리버풀은 이 시즌 물오른 오웬을 앞세워 리그컵, FA컵, UEFA 컵을 들어올리며 미니 트레블(3관왕)을 달성했다. 이로 인해 오웬은 많은 찬사를 받았다. 논란은 있었지만 2001년 세계 최고의 선수에게 주어지는 발롱도르를 수상하기도 했다. 2001/02시즌에는 EPL 우승에도 근접했으나 2위로 고배를 마신다.
이렇듯 오웬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소속팀 리버풀이 암흑기를 겪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2002/03시즌에 이르러 리버풀은 5위로 추락하면 UEFA 챔피언스리그 티켓을 따내지 못했다.
시즌이 끝났을 때 리버풀은 크나큰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팀내 유스 출신이자 간판 스타 마이클 오웬과 스티븐 제라드의 계약 기간이 단 1년 밖에 남지 않았던 것. 리버풀은 두 선수 모두에게 재계약 요청을 하려고 애썼으나 결과는 다르게 나타났다. 제라드가 잔류를 택한 반면 2004년 오웬이 이적을 택한 것이다.
전 유럽의 스타로 떠오른 오웬에게 레알이 접근했다. 오웬은 의리보다 야망을 택했다. 당시 레알은 갈락티코 정책을 펼치며 전 세계의 스타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해마다 루이스 피구, 지네딘 지단, 데이빗 베컴 등 스타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잔류나 이적이냐를 두고 깊게 고민하던 그에게 레알은 거부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결국 오웬은 팀을 떠나게 됐다.
레알에서도 오웬의 기량은 여전했다. 문제는 리버풀에서만큼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있었다. 이미 레알에 호나우두, 라울 곤살레스 등 초특급 공격수들이 즐비했고 새 얼굴 오웬에게는 제한된 시간만이 주어졌다. 한정된 시간 안에서 오웬은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역시나 레알과의 동거는 오래갈 수 없었다.
브라질에서 또 다른 신성 호비뉴가 합류하자 오웬은 벤치도 장담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또한 레알 역시도 공격진 정리를 계획하고 있었기에 오웬의 이적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문제는 그가 복귀한 팀이 그토록 사랑하던 리버풀이 아닌 뉴캐슬이었다는 점이다. 오웬 복귀 당시 다양한 포지션의 보강이 필요했던 리버풀은 그를 데려올 여유가 없었다. 리버풀과 오웬은 서로 엇갈렸고 그는 뉴캐슬의 유니폼을 입게 됐다.
하지만 뉴캐슬 입성 후 부상이 본격적으로 그의 커리어에 암운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러닝에 제약을 줬던 중족골 부상, 선수 생명을 위협했던 십자인대 부상 등 수많은 부상이 그를 괴롭혔다. 건강하기만 하다면 그는 훌륭한 스트라이커 자원이었다. 하지만 경기에 나오지 못하는 선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특히 2006/07시즌의 경우 부상 후유증으로 시즌을 거의 날리다시피한 것이 오웬의 현실이었다.
시즌이 끝난 뒤 오웬은 분노한 프레디 쉐퍼드 회장에 의해 방출 직전에 놓였다. 하지만 신임 샘 앨러다이스 감독이 이를 만류했다. 오웬 또한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내 미래는 뉴캐슬에 있다"며 이적설을 종식시켰다.
하지만 잔류 이후에도 오웬을 둘러싼 상황은 똑같았다. 여전히 오웬은 잦은 부상에 신음했다. 이로 인해 뉴캐슬이 분노해 오웬을 배제하려하면 돌아와 마음을 돌려놨다. 이런 과정 속에 오웬의 계약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오웬은 뉴캐슬에서 마무리마저 좋지 못했다. 오웬은 부상과 폼 회복 실패로 팀에 큰 기여를 하지 못했다. 득점 자원이 없는 뉴캐슬은 계속 추락했고 마지막날 강등이 확정됐다. 그는 이 시즌 모든 대회 10골로 팀 내 최다 득점자에 이름을 올렸지만 잦은 부상으로 강등의 원흉이 됐다. 뉴캐슬 일부 팬들이 오웬에게 비난을 퍼붓는 것도 일정 부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적으로 오웬의 입장으로 돌아와 그는 새 클럽을 찾아야 했다. 득점력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기에 그를 원하는 클럽은 많았다. 하지만 오웬은 그 많은 클럽 중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선택하면서 또 하나의 이야깃거리를 낳았다.
오웬은 리버풀 유스팀을 거친 선수다. 자신을 보듬어준 그 클럽에서 오웬은 프로 데뷔를 했고 성장했다. 그리고 발롱도르를 타 냈다. 그런데 오웬이 모든 것을 외면하고 리버풀의 철천지 원수인 맨유로 합류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리버풀 팬들도 뉴캐슬 팬들과 마찬가지로 분노감을 금치 못했다.
오웬은 공식 홈페이지와의 입단 인터뷰에서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존재가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나의 우울감을 해소시켜줬다"라며 입단의 배경을 설명했다. 오웬은 스타들이 달았던 맨유의 7번 유니폼을 입으며 기대를 받았다.
퍼거슨 감독은 오웬을 기막히게 썼다. 퍼거슨 감독은 잦은 부상을 안고 있는 오웬을 가끔은 서브로, 가끔은 선발로 내세웠다. 팀이 필요로 할 때, 득점을 원할 때 오웬을 투입해 재미를 봤다.
그가 맨유 시절 가장 큰 임팩트를 보인 것은 역시나 맨시티전이다. 오웬은 맨시티전에서 극적인 동점골을 넣음에 따라 많은 찬사를 받았다. 이를 비롯해 쏠쏠한 활약을 보여주며 제 몫을 했다. 결국 오웬은 2010/11시즌에는 그토록 갈구하던 우승까지 거머쥐게 됐다.
하지만 오웬과 맨유의 동행 역시 길지 않았다. 맨유는 2012년을 끝으로 오웬과 계약이 만료되는 상황이었지만 새로운 계약을 제시하지 않았다. 이에 오웬은 스토크 시티로 이적하며 또 다른 도전에 나서게 됐다.
오웬은 스토크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이미 전성기에서 한참 내려온 몸상태에 잔부상도 더 심해진 상태였다. 그는 의욕적으로 움직였지만 이전만큼의 성과를 낼 수는 없었다. 결국 오웬은 시즌 후 은퇴를 결정했고 스토크를 끝으로 다사다난했던 현역 커리어를 마감했다.
◇EPL 최고의 순간
2009/10시즌 EPL 7라운드에서 맨유와 맨시티가 맞붙었다. 맨유는 경기 초반 웨인 루니의 골로 기세를 올렸다. 후반 막판 크레익 벨라미가 리오 퍼디난드를 농락한 뒤 득점해 승부는 3-3까지 흘렀다.
경기 종료 직전 맨유가 총 공세를 펼쳤다. 라이언 긱스는 압박하는 맨시티 선수들 사이에서 비어있는 오웬을 봤다. 긱스가 오웬에게 패스했고 그가 침착하게 득점하면서 후반 50분 결승골이라는 드라마가 만들어졌다. 비록 맨유가 이 시즌 우승은 실패했지만 오웬의 이 버저비터는 오래도록 기억되고 있다.
◇플레이 스타일
전성기 시절 만능형 스트라이커였다. 그 중에서도 빠른 스피드를 활용한 돌파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잦은 부상으로 신체능력이 하락한 이후에도 특유의 골 결정력을 살려 좋은 옵션으로 활약했다.
◇프로필
이름 – 마이클 오웬
국적 – 잉글랜드
생년월일 - 1979년 12월 14일
신장 및 체중 - 173cm, 69kg
포지션 – 스트라이커
국가대표 기록 – 89경기 40골
EPL 기록 – 326경기 150골
◇참고 영상 및 자료
프리미어리그 1996/97시즌~2012/13시즌 공식 리뷰 비디오
프리미어리그 공식 홈페이지
리버풀 FC 공식 홈페이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공식 홈페이지
뉴캐슬 유나이티드 공식 홈페이지
스토크 시티 공식 홈페이지
<트랜스퍼 마켓> - 선수 소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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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러> - Former Newcastle chairman Freddy Shepherd reveals Michael Owen was his worst signing for Magpies
사진=프리미어리그 홈페이지, 프랑스풋볼 캡처, 이형주 기자(영국 맨체스터/올드 트래포드), MUTV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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