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개는 왜 존재만으로 위로가 될까

2019. 3. 21.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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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피플] 우석영의 동물+지구 미술관
6. 도메니코 디 바르톨로, 알렉세이 스테파노프, 브리턴 리비에르, 개와 고양이
충성(Fidelity). 브리턴 리비에르(Briton Rivi?re)

1940년 처음 방송된 이래 무려 80년 가까이 방영되고 있는 미국 애니메이션 <톰과 제리(Tom and Jerry)>에는 만나기만 하면 서로 앙앙대는 두 동물이 등장한다. 반려동물의 지위를 획득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놀이를 즐긴다는 점을 제외하면 유사점이 거의 없는 두 동물. 늑대에서 갈라져 나와 인간세계에 슬쩍 끼어든 이들의 후손은 스파이크(Spike)가, 소위 인간에 의해 길들었다고 하는 일부 고양이 속(Felis, Genus) 동물의 후손은 톰(Tom)이 각각 대표한다.

그런데 서로에게 앙숙(怏宿)인 이 둘의 관계를 우리는 그냥 견묘지간(犬猫之間)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단어에는 (오랜 관찰과 학습의 결과로 획득된) 특정한 인식이 슴배어 있는 경우가 잦은데, 견묘지간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단어의 배경이 되는 인식은 과연 유니버설한 것이었던지, 우리는 동서고금의 적지 않은 회화에서 견묘 간 대립 장면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15세기 이탈리아 화가 도메니코 디 바르톨로(Demenico Di Bartolo, ?~1446)가 남긴 작품 <환자 간호>(The Care of the Sick, 1441-1442)도 그중 하나로, 화가는 둘의 대립이 인간세계 필연의 풍경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환자 간호(The Care of the Sick). 도메니코 디 바르톨로

이 그림 속의 두 동물은 왜 그리도 서로에게 앙앙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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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을 위로한 존재, 개

우선, 둘의 성격이 판연히 다르다. 개는 사회성이 강한 늑대의 후손으로, 개가 인간사회에 편입될 수 있었던 중요한 한 가지 이유도 이들의 뛰어난 사회적 지능이었다. 인간만큼은 아니지만 협동에 능하고 주종 관계에 발 빠르게 적응하며, 리더를 호종하는 성향이 강한 이들은 인간 집단의 번영에 큰 효용이 되었다. 인간 집단의 위계질서에 자연스럽게, 적극적으로 편입되어 일종의 ‘가노(家奴)’ 같은 역할을 했으니 말이다.

알렉세이 스테파노프(Alexei Stepanovich Stepanov, 1858~1923)의 그림 <사냥 후에(After the Hunt)>(1894) 같은 작품에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듯, 최초의 효용은 아마 사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들에게 부과한 짐의 목록은 계속 배가되었다.

이들은 (가정) 보안, (양 떼, 소 같은 가축) 관리, (노예, 수감자, 가축) 감시, (용의자, 범법자) 추적, (맹인 등 약자) 보호 임무를 담당했는가 하면, 때로는 이동 수단이 되어야 했고 (개썰매 등) 필요에 따라서는 난방 역할을 (노르웨이의 경우)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은 정신적인 차원의 효용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위계질서 속에 편입되어 상사의 지시나 명령에 굴신하며 살아가던 숱한 ‘을’들에게 위로가 되어 준 것이다. 복종했던 ‘을’은 복종하는 개에게서 제 모습을 발견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했고, 늘 ‘을’ 신세를 면치 못하는 자신에게조차 고개를 조아리는 개에게서 깊은 위로를 받았다.

사냥 후에(After the Hunt). 알렉세이 스테파노프(Alexei Stepanovich Stepanov)

브리턴 리비에르(Briton Rivi?re, 1840~1920)의 어떤 작품들은 바로 이러한 위로의 순간들을 포착하고 있다. 예컨대 <충성(Fidelity)>(1869)에서 우리는 ‘구석’에서 딱하게 울먹이고 있는 소년과 그의 마음을 어루만지려는 어느 영혼을 목도하게 된다.

그러나 이 위로는, 무결점의 존재, 예컨대 고위 성직자 같은 이의 자애심(慈愛心)의 발로가 아니다. 그것은 상처받은 적 있는 또 다른 ‘을’ 쪽에서의 위로다. 자고로 약자의 아픔은 약자가 알아주는 법이라 했던가.

반면, 고양이는 상처니 위로니 하는 따위의 ‘쓸모없는 수난’(장 폴 사르트르)이 가득한 연극 세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살아가는 족속들이다. 고양이 과(Felidae, Family)에 속한 제 친척들처럼 고양이는 독립생활을 여의롭게 즐기며 살아간다.(단, 사자만은 집단생활을 한다) 물론 암컷은 공동육아를 하며 때로 집단생활을 할 때도 하지만, 늘 그런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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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 자적하는 존재 고양이

더욱이 발정기에 있는 암컷이 수컷과 짝 짓는 행태를 볼진대, 암컷은 꽤나 도도한 자세를 유지하는 데다 운우지정(雲雨之情)을 함께 나눈 수컷의 지배도 받지 않는다.(열 마리가량의 암컷이 수컷 한 마리의 지배를 받는 닭과 비교해보라!) 수컷 또한 스스로 정한 제 영토 안에서 주인 행세를 하며 무외당당(無畏堂堂) 살아가는데, 각자의 영토를 선선히 인정하는 ‘그 동네 법률’이 또 있어서 수컷끼리 영토 싸움하는 일도 없다고 한다.

한마디로, 이들의 뛰어난 지능 탓일 텐데, 고양이들은 남의 말이나 행동에 휘둘리며 살아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고양이 혐오나 누군가의 고양이 편애는 우리가 어떤 이들인지를 넌지시 일러주는 사뭇 의미심장한 표징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이 인간세계에서 담당해야 했던(하는) 업무량 또한 개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쥐 잡는 일 말고는 딱히 우리가 이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었던(없는) 것이다. 요새는 그 일마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으니 이제는 들로 돌아갈 때도 되었건만, 이들에게는 도무지 돌아갈 의사가 없는 듯하다. 왜 아니겠는가,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몸을 부리고 있는 한, 종일토록 잠만 자며(평균 하루 13시간) 언제까지나 무위, 자적하는 한량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을.(다음편에 계속)

우석영 <동물 미술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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