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가독성' 한계까지 밀어붙인 폰트, 규범과 고정된 형태에 저항하다..이성의 통제로부터 벗어난 꿈, 중첩·이중성 '원자의 세계' 닮다 [김상욱·유지원의 뉴턴의 아틀리에]
[경향신문] ㆍ꿈

■ 초현실적 공간의 디지털 폰트
칼 나브로가 디자인한 ‘리노체’ 섞어 쓸 수 있는 4종 서체로 구성 꿈처럼 고정되지 않은 조합 가능
리노(Lyno)는 프랑스의 그래픽 디자이너 칼 나브로(Karl Nawrot)가 폰트 디자이너 라딤 페슈코와 함께 디자인한 폰트다. 처음 이름은 리옹(Lyon)이었다가 이후 리노로 바뀌었다. 리노체는 4종의 가족으로 구성돼 있다.
율리스(Ulys), 스탠(Stan), 월트(Walt), 장(Jean). 율리스는 <율리시스 31(Ulysses 31)>에서 온 이름이다. 프랑스와 일본이 합작한 애니메이션으로, 한국에서는 1980년대에 <우주선장 율리시스>라는 제목으로 TV에 방영됐다. 프랑스에서는 일본·한국보다 인기를 더 누렸다고 한다. 스탠은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 월트는 월트디즈니, 장은 초현실주의 예술가 장 아르프에서 이름을 따왔다. 상상의 세계를 마음껏 부유할 것 같은 이 폰트들은 애초 경계같은 것이 없다는 듯 마음대로 섞어서 쓸 수 있다.
이 폰트들이 조합된 양상은 얼룩덜룩하고, 고정되어 있지 않으면서, 천연덕스러운가 하면 파괴적이기도 하다. 폰트가 가진 ‘가독성’이라고 하는 기능의 극단적인 한계까지 형태가 가서 닿고 있다. 고전적이고 기능적인 폰트들을 일상에서 접하다가 이렇게 리노체를 마주하면, 아마 고전적인 구상미술만 경험해본 사람이 초현실주의적 추상미술을 처음 접할 때 느끼는 당혹감에 가까운 감정이 들지 않을까.
칼 나브로의 전시들에는 이 폰트에 이르는 디자인의 여정이 담겨 있다. 마음이 작동하는 전시 공간에는, 수수께끼같은 모형과 드로잉들이 가득하다. 전시의 제목도 ‘마음의 산책(Mind Walk)’. 전시는 작가의 의식 속으로 통하는 통로가 된다. 모형들은 초현실적인 추상조각, 드로잉들은 추상스케치 같아 장 아르프의 무정형적인 작품을 연상하게 한다.
이 모형과 드로잉들은 리노체를 비롯한 칼 나브로의 디자인을 구축하는 불가결한 구성성분으로 동작한다. 흩어진 조각의 편린들은 연습과정의 흔적이자 도구로 건물이 지어지듯 조립된다. 이들은 그렇게 그의 폰트 디자인과 그래픽 디자인에 적용되었다가, 환원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칼 나브로의 개인전 ‘마음의 산책 1·2·3’은 영국·한국·프랑스에서 열린 바 있다.
이후 작가가 ‘개념적인 디자인을 위한 인포름(INFORM)상’의 2016년 수상자로 선정되면서 라이프치히 동시대미술 갤러리에서도 ‘마음의 산책: 연장된 놀이(Mind Walk, Extended Play)’라는 제목으로 전시가 열렸다. 서울의 갤러리 팩토리에서 열린 전시 ‘마음의 산책 2’의 리플릿에는 ‘마음의 메모’라는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혼란스럽게 엉켜서, 몽환적인 의식의 기저를 드러낸다. “건축가인 L은 건물의 구조를 변경하기 위한 부식액을 만들었다. 액체는 어떤 표면도 부식시킬 수 있었기에, 마치 건설적인 파괴 행동 같았다. 그 부식액을 한번 사용하면, 거푸집과 다른 유기체들이 집어삼켜지며 건물의 자재가 분해된다. 그러면 바닥과 벽, 천장이 있는 방은 점점 무정형의 동굴로 변화해간다.” “X의 인식 속에서는 공간의 여러 지점이 따로 뗄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뒤엉켜 있다.”
전시공간 속에는 꿈처럼 때로 서툴고도 원시적인 형상들이 있고, 강렬하면서 항상 합리적이지만은 않은 심리적인 작용들이 있다. 세계를 묘사하고 사회의 요구에 속박되기보다는 형상이 도출되기까지 무의식에 흐르는 독립적이고 자유분방한 욕구가 탐색돼 간다. 그 결과물은 독특하고 대담하면서도 유머러스하다. 칼 나브로는 주로 타이포그래피와 일러스트레이션 영역에서 활동하는 그래픽 디자이너다. 리노체라는 폰트 디자인을 주도했지만, 스스로의 정체성을 폰트 디자이너라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전시를 하지만 스스로 예술가라고 규정하지도 않는다. 그는 자신이 무언가로 고정돼 규정지어지는 것을 꺼리지만, 순수미술을 연상시키는 전시 속에서도 그래픽 디자이너로서의 본령은 의식하고 있다.
작가와 마찬가지로 그의 작품들도 시시때때로 변해가는 무언가다. 과정으로서의 전시 속 모형과 드로잉들, 그리고 그의 디자인 결과물들과의 관계도 서로 고정돼 있지 않다. 불분명한 형상들은 유기적으로 서로에게 의존하지만, 어떤 체계로 작업이 이행되는지는 불투명한 연상을 통해서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전시 속 도구 세트가 폰트로 일관되게 귀결되는 고안도 독창적이다.
견고한 신체성 가졌던 금속활자 디지털 시대, 글자 변형 자유 열려
폰트란 특정한 형질들이 알파벳이나 낱글자 전체에 증식되고 파생되는 디자인 과정을 통해 한 벌 세트로 완성되는 결과물이다. 견고한 물리적인 신체성을 가졌던 과거 금속활자 시대와는 달리, 21세기 디지털 시대에는 코드를 가진 낱글자들의 형태를 조금씩 변형시킬 수 있는 자유가 열렸다.
이런 동시대적 기술이 부여하는 자유를 욕구하며, 디자이너는 폰트의 정신을 이렇게 선언한다. ‘규범적인 경향에 저항하고, 고정된 형태라는 개념을 거부한다.’ 초현실적인 마음의 공간을 산책하는 그의 전시는 어쩌면 폰트가 꾸고 있는 꿈일지 모르겠다.
폰트는 이제 규범적 경향에 저항 고정된 형태의 개념을 거부한다
꿈이란 원형적인 정신의 경험이고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려주는 단서로 기능한다. 나름의 규칙과 의미를 가진다. 현실의 바닥에 발을 딛지 않은 채 부유하는 의식이다. 그의 디자인과 전시는 이런 심리적인 공간의 물리적인 체현이다.
유지원
『

유지원은 타이포그래피 연구자이자 저술가, 그래픽 디자이너다. 서울대와 독일 라이프치히 그래픽서적예술대학에서 시각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를 공부했고, 저서 <글자 풍경>을 펴냈다.
■ 원자가 실재라면 꿈은 현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개꿈 이야기의 하나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일 것이다.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얼마나 황당무계할 수 있는지 이보다 더 잘 보여주기도 힘들다. “세상에! 웃음 없는 고양이는 많이 봤지만, 고양이 없는 웃음은 처음이야! 고양이 없는 웃음이라니! 이렇게 이상한 건 정말 처음이야!” 책의 한 구절인데, 틀린 말이다. 이 책에는 이보다 이상한 것이 수도 없이 튀어나온다.
수천만명 사상자 낸 1차 세계대전 이성·합리 외치던 서구문명 몰락 꿈·무의식 통해 돌파구 찾기 나서
미술이 꿈을 소재로 하겠다면 말도 안되는 상황을 그리겠다는 뜻이다. 1920년대 유행하기 시작한 초현실주의는 바로 꿈을 그리는 미술이었다. 이런 사조가 생긴 데에는 시대적 배경이 있다. 1920년대는 유럽 역사에서 심상치 않은 시기였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치러진 제1차 세계대전에서 7000만명 가까운 군인들이 참전해 사망자 1000만명을 포함, 3000만명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다. 민간인도 최대 2000만명 정도 사망했으니 가히 서양 근대역사상 최악의 참극이라 할 만하다. 더구나 자칭 최고 문명국가라고 부르던 나라의 사람들끼리 벌인 전쟁이었다.
공존할 수 없는 것의 공존 그린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작업들
이런 비극을 이성과 합리를 부르짖던 서구문명의 몰락이라고 본 일부 사람들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에게 답은 프로이트의 철학에 있었다.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무의식이다. 꿈은 무의식의 내부를 보여주는 창(窓)이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무의식으로부터 자동으로 연상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이들이 배격하고자 한 현실은 물질주의에 매몰된 자본주의 사회였다. 1917년 러시아에서는 공산혁명이 성공했으며, 초현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됐다.
살바도르 달리의 ‘불타는 기린’은 꿈에 대한 달리의 생각을 보여준다. 비너스 여신으로 추정되는 여인의 몸에 서랍이 잔뜩 달려 있다. 서랍은 인간의 정신 내면에 숨어있는 비밀스러운 무의식을 상징한다.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무의식의 세계는 현실을 뛰어넘는 초현실의 세상이다. 이런 세상은 의지할 확고한 현실이 없으므로 목발의 도움을 받고서야 간신히 지탱된다. 그림 속 인물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듯 방황하고 있다. 사실 이들은 눈조차 없다. 반면 기린은 불타고 있음에도 유유히 서 있다. 기린과 같은 동물은 합리적 이성 없이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기린은 한 귀퉁이에 자그맣게 그려졌지만 이 그림의 주인공이다.
달리의 다른 그림에는 꿈에서 볼 수 있는 강박적 이미지들이 종종 등장한다. 그는 곤충 공포증이 있었다는데, 그림에 곤충들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성적인 상상이 빠질 수 없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사물들이 함께 배치된다는 것이다. 조르조 데 키리코의 ‘사랑의 노래’를 보면 석고상 두상과 수술용 장갑이 벽에 걸려 있고 그 앞에 녹색의 공이 놓여 있다. 이들의 배치에는 합리적 이유가 없다. 초현실주의는 오히려 합리적 이성을 조롱하고자 했다. 달리는 정치적 문제에 관심이 없었기에 초현실주의자 모임에서 탈퇴했다. 사실 달리는 정치에 관심을 갖기에는 심한 속물이었다.
1925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에 대한 한 편의 논문으로 뉴턴역학을 뿌리째 뒤흔든다. 제1차 세계대전 중 그는 나이가 어려서 가까스로 징집을 피할 수 있었다. 그가 알고 지냈던 형들은 상당수 전쟁터에서 죽었을 것이다. 전후 독일이 겪은 경제적·정신적 혼란 속에 하이젠베르크도 기성사회와 질서에 환멸을 느꼈을 것이 틀림없다. 초현실주의자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실제 그는 독일 청년운동조직에 가담하기도 했다. 결국 이런 저항은 사회가 아니라 물리학에서 결실을 맺는다.
뉴턴이 만든 운동법칙은 물체의 운동을 기술한다. 운동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공간 내에 물체가 만드는 궤적으로 표현된다. 뉴턴의 미분방정식은 이 궤적을 기술하는 수식을 구해주는 도구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는 원자의 궤도를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아니, 위치를 정확히 아는 것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고까지 했다. 원자는 이곳과 저곳에 동시에 있을 수 있고, 입자이면서 파동일 수도 있다. 중첩과 이중성이라는 양자역학의 핵심원리다.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에는 동시에 낮이면서 밤인 풍경이 등장한다. 이들 모두 꿈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사건들이다.
초현실주의와 양자역학이 같은 시기에 탄생한 것이 우연일까. 1930년대 평론가 칼 아인슈타인과 앙리-샤를 푸에쉬는 양자역학의 철학을 예술가들에게 소개했다. 1940년 초현실주의운동의 핵심인물 가운데 하나였던 볼프강 팔렌은 양자역학의 이중성을 표현하는 ‘범동역학적 그림(figure pandynamique)’을 그렸다. 이 그림에는 소용돌이들이 등장하는데 입자의 파동묶음이라는 양자역학적 개념을 표현한 듯하다. 당시 물리학자들도 이따금 주말이면 미술관에 가서 초현실주의 그림을 보았을 것이다. 양자물리학자와 초현실주의 작가들 모두 1930년대 유럽이라는 동일한 시공간을 살며 직간접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것이다.
입자이며 파동, 동시에 존재하는 양자물리학이 보는 원자와 상통
꿈은 현실의 도피처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이성으로부터 도피하고자 꿈을 그렸다. 양자물리학자들은 원자의 세계가 초현실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물은 원자로 되어 있다. 원자가 실재라면 꿈은 현실이다.
김상욱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속보]법원, 한덕수 징역 23년 선고 후 법정구속…“12·3 ‘내란’ 심각성 중대”
- [속보]이 대통령 “‘이재명 죽어야 나라 산다’ 설교하는 교회 있어···반드시 뿌리 뽑아야” [
- “고자세로 한판 뜨나” “전 아내를 사랑”···173분 진행된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
- [전문]‘한덕수 징역 23년 선고’ 이진관 재판장 “내란 성공 기대하고 가담”
- 홍준표 “신천지 몰표 공작 꿈에도 생각 못해…윤석열 정권 태어나지 말았어야”
- 이학재, ‘직권남용’ 고소당했다···인천공항 간부들 “3년째 보직 박탈 고통”
- ‘무인기 침투’ 민간인 피의자 3명 압수수색···첫 강제수사 돌입
- “강선우한테 돈이 갔다”는 김경·강선우 전 사무국장, 구속 회피 전략?…강선우는 인정했을까
- [단독]‘계약형 지역의사’로 계약만 바꿨는데 연봉 5000만원 ‘껑충’…무늬만 지역의사제?
- 그린란드 사태·일본 금리발작에도 코스피는 ‘신고가’···바이오 폭락에 코스닥은 ‘패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