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남성에 의해 강요된 타락 .. 식민시대 여성의 아픔 속으로 [한국영화 100 일제강점기 조선영화]
경성 '타락·물질 지배받는 공간' 그려져/안철영 감독 등 주역 모두 영화계 신인/편집적 실험·수미쌍관 구조 등 도전적
◆위험한 도시, 수난당하는 여성
김호선 감독이 1975년 연출한 ‘영자의 전성시대’라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 영자는 어린 나이에 서울로 올라와 식모살이를 하다 주인집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피해자임에도 억울하게 집에서 쫓겨난 영자는 버스 안내원을 하다 교통사고로 팔을 잃은 뒤, 사창가에서 몸을 파는 처지가 된다. ‘식모-차장-윤락녀’란 이 전락의 사이클은 소위 ‘이촌향도’의 시대 서울로 올라온 여성들이 겪는 전형적인 수난담으로 각종 문학과 영화에서 재현됐다. 한국영화사에는 지난주 살펴본 ‘미몽’(양주남·1936)에서 ‘자유부인’(한형모·1956), ‘해피엔드’(정지우·1999) 등에 이르는 ‘바람난 여인’의 계보 외에 ‘청춘의 십자로’(안종화·1934), ‘어화’(안철영·1938), ‘하녀’(김기영·1960), ‘영자의 전성시대’ 등에 이르는 상경 여성의 수난담을 다루는 영자의 계보가 있다. 이 중 ‘어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인순(박노경 분)은 어느 어촌 마을에서 어부인 아버지 춘삼(윤북양 분), 어머니(계성로 분), 지적장애를 가진 남동생(이현 분)과 함께 산다. 인순은 경성에서 차장으로 일하는 고향 언니 옥분(전효봉 분)의 부추김에 상경을 꿈꾸나 춘삼은 그녀를 경성으로 보낼 생각이 없다. 장주사(나웅 분)에게 상당한 빚을 지고 있던 춘삼은 흉험한 날씨에 바다로 나섰다 목숨을 잃는다. 빚을 갚지 않으려면 첩으로 들어오라는 장주사의 협박이 있던 차에, 그의 아들 철수(나웅 분·일인이역)는 인순을 노리고 빚을 대신 갚아주고 이를 빌미로 함께 경성으로 갈 것을 종용한다. 어쩔 수 없이 철수와 경성으로 올라온 인순. 철수는 옥분과 인순의 연락을 차단하고, 오갈 데 없는 그녀를 강간한다. 뒤늦게 인순을 만난 옥분은 인순을 설득해 자신의 집으로 들이고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쉽게 구해지지 않는다.
옥분 역시 어렵게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된 인순은 옥분의 집을 나와 기생이 된다. 얼마 후 기생집에서 철수를 만난 인순은 자신의 신세를 비관해 자살을 기도한다. 겨우 목숨을 구한 인순은 자신을 사모하는 천석(박학 분)과 고향으로 내려와 새 삶을 시작한다.
‘미몽’에서 그리는 중산층 유부녀의 타락이 자신의 욕망에서 발생한 귀결이라면, ‘어화’ 속 인순의 타락은 생계와 남성에 의해 강요된 타락이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아버지의 빚을 갚고 노모와 남동생을 건사해야 하는 인순에게 경성이란 도시는 기회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녀를 기다리는 경성의 운명은 몹시도 가혹하다.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철수에게 감금당하다시피 하며 성적으로 착취당하고, 어렵사리 옥분을 만나 그녀의 집에서 동거하지만 일자리는 생기지 않는다. 그녀에게 경성의 환상을 심어주고 상경을 권했던 옥분의 삶 역시 고단하기는 마찬가지다. 어쩔 수 없는 가출, 접대부 생활, 자살 시도로 이어지는 영화 후반부에서 경성은 기회의 공간이 아니라 배덕의 공간, 타락의 공간, 물질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미몽’과 ‘어화’는 공히 매혹의 공간으로서 도시를 재현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번화한 일본인 거주지 혹은 상업지구와 인접 지역 중심으로 재현되는 근대적 제국의 식민 도시 공간은 매우 한정적으로 선택된 장면이다. 이 도시를 만끽하는 조선인 남성들은 대개 제국의 협조자들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철수가 보이는 악덕은 무산자에 대한 유산자의 폭력,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 나아가 지배계층인 일본 제국의 폭력으로까지 확대해석될 여지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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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어화’를 연출한 안철영 감독.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
경성 중심가의 호텔, 버스정류장, 철수가 일하는 근대적 사무실과 빌딩 등 영화 중·후반부가 보여주는 경성의 근대적 모습은 ‘미몽’과 유사하지만, 영화 전반부와 마지막은 인순 가족이 생계를 유지하는 동해의 어촌 마을, 인순과 철수가 상경 길에 들르는 금강산 등 조선의 전통적 삶이나 풍경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 전통 혹은 자연의 풍경은 인위적이고 개발된 경성의 경관과 대조를 이룬다. 그래서 이 영화는 한국적인 ‘로컬리티’를 담고자 한 작품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특히 도입부와 말미에 ‘쾌지나칭칭나네’라는 조선 재래의 민요음을 배경으로 한 어촌 마을의 축제 장면이 반복되는 구조는 이런 의도와 직접 연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관련해 ‘어화’(Fisherman’s Fire)란 낯선 제목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멀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어선이 밝히는 불빛을 뜻하는 이 단어는 도시에서 상처받은, 혹은 전락한 인순의 영혼과 육신을 회복시켜주는 고향의 상징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일제에 의해 병합된 식민지 근대의 타락한 경성과 조선 본연의 전통, 혹은 전근대의 삶을 대치하는 것일까? 대체로 그렇게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나아가 영화는 이를 통해 은연중 반일 민족주의의 메시지를 던지는 것일까? 꼭 그렇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제국주의 시대 원주민과 원주민 문화가 서구 지식의 대상이 돼 식민지 운영의 자원이 된 것처럼, 조선 역시 일본 제국의 본격적인 탐구 대상이 됐다. 조선의 역사, 전통, 제도, 지역 문화가 일본 지식인들에 의해 매우 광범하게 탐구됐고, 이는 식민 지배의 지적 자원이 됐다. 축적된 지식들은 해방 이후 한국 역사학·인류학·문학·문화학의 토대가 되기도 했는데, 지식은 그 자체로 유용했겠지만, 이 지식을 축적했던 식민주의 관점은 극복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1930년대 ‘조선’ 혹은 ‘조선적인 것’은 독립을 지향하는 능동적 민족운동이 아니라, 이미 일본 제국의 일부가 돼버린 조선에 대한 일본 제국의 지적 구성물이자 발명품, 혹은 이색적인 풍광으로 해석된다.
특히 영화의 경우, ‘나그네’(이규환·1937)의 성공을 기점으로 ‘조선적인 것’을 담은 영화들이 상당수 기획됐고, 경우에 따라 일본 영화사와 합작이 이뤄지기도 했다(‘어화’도 쇼치쿠 영화사와 합작으로 진행됐다). 따라서 당시 영화 산업 풍토에서 ‘조선적인 것’은 이색적 소재를 원하는 일본 제국의 관객, 그 시선을 스스로 내재화한 조선의 관객을 위한 상업주의적 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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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어화’에서 철수(왼쪽)가 인순을 감금한 경성의 호텔 내부 장면.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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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어화’에서 천석(왼쪽)과 인순이 고향인 어촌에서 다정한 시간을 보내는 장면.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
이 영화는 현 시점에서도, 당대 시점에서도 잘 만든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감독인 안철영, 각본가 서병각, 조연출 전숙희, 촬영자 이병목 등 영화를 만든 주역들이 모두 영화계 신인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장주사와 철수의 일인이역으로 역연을 펼친 나웅을 제외한 주요 배우진까지도 신인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점에서 매력적이기도 하다. 아이리스나 이중인화, 다양한 커트인 쇼트들을 배치한 여러 편집상 실험, 조선의 풍광을 담은 몇몇의 아름다운 장면들, 수미쌍관의 구조, 타락한 도시와 구원의 고향을 대조하는 명징한 메시지 등은 서툴지만 신인다운 미학적 욕심을 담고 있다. 또한 옥분과 인순, 두 여성의 건강한 우정이나, 인순이 자신을 농락한 철수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모색하며 당시의 순결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는 설정 등은 여성의 재현에 있어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측면을 담고 있다. 한국영화사 최초의 여성 조감독으로 인정받는 전숙희가 조연출을 맡았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감독 안철영은 독일에 유학해 사진을 공부했으며, ‘어화’로 데뷔했다. 해방 이후 미군정청 예술과장을 거쳤고, 1948년 하와이 한인 이주민에 관한 영화 ‘무궁화 동산’을 연출했다.
조준형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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