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영빈관 나전칠기 어디로 사라졌을까

정용인 기자 2019. 2. 24. 09:2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92,93년께 노태우 대통령 부부 퇴임 전후로 실종”… 제작자 이칠용 회장 주장

2월 19일 <주간경향>을 만난 이칠용 한국공예예술가협회 회장이 청와대에 납품한 나전칠기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우철훈 선임기자

국내 최고 장인들이 만들어 청와대 영빈관에 납품한 나전칠기 작품 가운데 일부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작품이 사라진 시기가 노태우 정권에서 김영삼 정권으로 넘어간 1992년에서 1993년쯤으로 추정되지만 누가, 언제 가지고 나갔는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이 작품들을 현재 시가로 따지면 약 4억원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청와대 의전을 담당했던 탁현민 행정관 이야기는 꼭 넣었으면 좋겠어요. 신문 보도를 보니 청와대 나온 뒤 ‘상징도 역사도 스토리텔링도 없는 공간에서 국빈만찬과 환영공연 등 국가행사를 진행하는 것이 늘 착잡했다’고 개인 소셜미디어(SNS)에 썼다고 하는데…. 우리가 만들어 넣었던 작품들이 남아있었다면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납품한 작품의 ‘실종사건’을 제보한 이칠용 한국공예예술가협회 회장(73)을 2월 19일 만났다.

그는 1991년 해당 작품 제작과 납품 과정을 총괄했다.

만나기 며칠 전 전화통화를 하던 중 그가 분통을 터뜨렸다.

“아니, 도둑X 아닙니까. 그 당시 그것을 만든 사람들이 나중에 다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 서울시 무형문화재가 된 분들이에요. 청와대 본관과 영빈관에 전시될 물품이 필요하다고 해서 특별제작위원회까지 만들어 전국의 장인들을 모아 만든 작품인데….”

■ 청와대 요청으로 제작 작품 5개 사라져

이 회장은 1991년 제작 당시 발주의뢰서 등 납품 관련 서류와 트레이싱지에 카피된 제작 도안 등을 꼼꼼히 보관하고 있었다.

없어졌다고 하는 작품들도 ‘도록’에 사진으로 남아있다.

청와대 내외의 전경을 찍은 도록을 보면 당시 납품한 작품 2개는 본관 올라가는 계단 양측에 남아있는 것이 확인된다.

그런데 당시 ‘영빈관’ 비치용으로 납품된 ‘이조무늬끊음 삼층장(2개)’, 문갑 한 쌍, 테이블, 화장대 등 나머지 물건들은 어디로 갔는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도 납품할 당시를 기억합니다. 저쪽의 송파 건너 구리시에서 하나, 그리고 경기도 양주군 산골에서 또 하나 만들었습니다. 최종 완성한 뒤 트럭에 싣고 금융연수원 건너편 삼청동 총리공관 뒤쪽 안가 건물에 내려줬어요. 거기는 지금은 헐려 주차장이 되었더군요.”

앞서 발주의뢰서를 보면 당시 이 나전칠기 작품들은 청와대 총무비서관실과 협의를 거쳐 1000만원의 비용을 지급받아 납품한 것으로 돼 있다.

“1000만원은 상징적인 금액이고 당시만 하더라도 7000만원어치는 되는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지금 시가로는 4억원은 가뿐히 넘을 겁니다.”

청와대 본관에 비치된 2점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의 ‘행방’에 대한 그의 의혹은 오래되었지만 최종 확인한 것은 문재인 정부 들어서였다.

문재인 대통령 내외가 청와대 영빈관에서 진행한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 사진을 보니 배경에 나전칠기 2점이 있는데, 당시 자신들이 납품한 작품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상을 받기 위해 청와대에 들어간 김에 문의한 적이 있고, 이명박 정부 때도 다시 요로를 통해 작품들의 행방을 문의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보도된 기사를 보고 청와대 총무비서관실의 비서관과 통화를 해봤는데 결과적으로 ‘잘 모르겠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작품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 회장은 1992~1993년 정권교체기에 작품들이 사라진 것이 아닌가 추정했다.

퇴임한 노태우 전 대통령 부부가 개인물품으로 간주해 연희동 사저로 들고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이다.

■ 노태우 측 “연희동 사저에 없다”

확인이 필요했다. 일단 대통령기록관.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에는 외국 정상 등에게서 받은 선물뿐 아니라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청와대 가구, 비품도 행정박물이라는 이름으로 보관하고 있다.

대통령기록관에 문의했다.

문의 이틀 뒤 대통령기록관 담당자로부터 돌아온 답이다.

“서고팀과 이관등록팀 두 군데에 나전칠기 작품을 보관하고 있는지 문의했다. 청와대 비품들이 100% 등록된 것은 아니고, 포장된 채 그대로 있는 물품도 있기 때문에 확인에 시간이 걸렸다. 등록된 물품은 없고, 미등록 물품들 중에서도 나전칠기 작품은 확인되지 않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 측은 “집에 칠기제품은 없다”고 알려왔다.

<주간경향>은 행방이 묘연해진 작품의 사진을 보내고 재차 확인을 부탁했다.

비서실 측의 최종 답변이다.

“두 분 다 몸이 편찮으셔서 거의 10년 가까이 누워계시고 있는 상황이다. 집에 있는 가구는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부터 있던 것들이다. 노 대통령 내외는 가구 같은 걸 잘 버리진 않는다. 아시다시피 연희동 집이 작아 다른 가구를 들일 공간이 없다.”

이 회장도 “작품 부피가 커서 누군가 보관하고 있다면 방 하나는 가득 차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당시 청와대에 근무했던 누군가 측근이 빼돌렸을 가능성은?

<주간경향>과 통화한 노태우 전 대통령 비서실 인사 ㄱ씨는 “벌써 20년 넘게 세월이 흘러 세상을 뜬 사람들도 여럿”이라며 “비자금 사건이나 각종 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뒤 당시 청와대에 같이 근무했던 사람들의 발길도 뜸해져 연락 안 되는 경우도 많다”며 난색을 표시했다.

현재 추정 시가 4억원짜리 청와대에 납품된 작품들의 행방이 묘연한 것이다.

■ 육영수 목도리, 안중근 유묵도 사라져

청와대 물건 중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한 물품들은 또 있다.

지난 박근혜 정부 당시 논란이 되었던 육영수 여사의 흰여우목도리가 대표적인 경우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목도리’를 둘러싼 갈등이 지난 정권 박근혜 대통령 국정농단 탄핵의 시발점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육 여사의 흰여우목도리는 1967년 박정희 대통령 부부가 국빈 자격으로 독일을 방문했을 당시 착용했던 것으로 기록영상이나 사진에도 남아있다.

박정희 대통령 사후 이 목도리 역시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러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초기 암시장에 목도리가 홀연히 나타났다.

당시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과 청담동 일대의 재력가들 사이에 돌던 이 목도리 사진이 박지만씨에게까지 흘러들어갔으며 그것이 지만씨의 분노를 샀다.

즉, 자신의 누나를 둘러싸고 있던 최순실·정윤회씨가 자신의 어머니 유품을 마음대로 처분한 데 격분한 것이다.

그것이 박근혜 정권 중반기의 박지만·정윤회 싸움이 표면화된 계기였다.

2016년 10월 <시사저널> 보도에 따르면 이 육영수 여사 흰여우목도리는 “최순실이 자신의 집안 사람을 통해 팔았으며, 목도리를 산 사람이 주변에 자랑하면서 팔린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역시 청와대에 있다가 행방이 묘연해진 물품으로는 ‘보물 569-4호’로 지정된 안중근 의사의 유묵도 있다.

“恥惡衣惡食 者不足與議(치악의악식 자부족여의·궂은 옷, 궂은 밥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더불어 의논할 수 없다)”라는 글씨가 쓰여진 것으로, 1976년 이도영 홍익대 이사장이 청와대에 기증해 문화재청에 등록된 유묵이다.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캠프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던 안도현 시인이 이 유묵의 행방에 대해 트위터를 통해 공개질의한 적이 있다.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박근혜 소장’으로 되어 있는데 소유 여부를 명확히 해달라는 요구였다.

당시 박근혜 후보 측은 “가지고 있지 않으며 과거 언론을 통해서도 제기된 의혹으로, 아니라고 이야기했는데도 다시 정치적 공세를 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정보·기록 전문가인 전진한 알권리연구소 소장은 “대통령기록물법이 만들어진 시점은 참여정부 시기로 관련 법이 정비·제정되기 전이기 때문에 누군가 개인적으로 가져갔더라도 기록은 남지 않을 수 있다”며 “당시 총무비서관 등 관여되어 있는 개인을 탐문해야겠지만 기록도 없는 마당에 본인들이 부인하면 그만이므로 실제 작품들이 시장에 나오지 않는 한 찾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