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백년과 여성]②남자현은 누구..사대부 며느리→47세에 만주투사로

남빛나라 2019. 2. 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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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가 자손..사대부 며느리로 평범 삶
19세에 혼인한 남편은 의병 전투서 사망
47세 서울로 거처 옮겼다가 다시 만주로
日 수뇌부 향한 두 차례 암살 계획, 실패
【서울=뉴시스】남자현(1872~1933). (제공 = 국가보훈처)

【서울=뉴시스】남빛나라 기자 = 무장투사 남자현(1872~1933)은 1872년 경상북도에서 1남3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안동시와 영양군으로 혼기돼 있지만 여러 연구자료들을 종합할 때 영양군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추정된다.

국내 여성 독립운동가로는 가장 높은 수준의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받았지만 남자현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다. 그의 죽음을 전한 당시 언론 기사와 후손들의 증언이 전부다.

<남자현 평전>(이상국 지음)에 담긴 친정의 종손(오빠의 손자) 남재각씨의 인터뷰를 보면 재각씨는 "만주에서도 늘 쫓겨 다니던 사람이라 자취를 다 지우고 다녔던 듯하다. 우리들은 선생(남자현)의 물건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도 몰랐고 그저 살기에 바빠서 불필요한 것들은 생각 없이 버렸다"고 회상한다.

남겨진 소중한 자료들을 종합하면,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고 일본 수뇌부의 암살을 계획한 그녀였지만 당시 전통적인 여인상도 삶의 일부였다.

아버지 남정한은 문하에 70여 명의 제자를 두고 지역에서 교육자로 활동했다. '독립혈사'의 '남자현여사 약전'에 따르면 남자현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학문에 매진하며 총명함을 빛냈다. 그는 7세에 한글을, 8세에 한문을 터득했다. 또 12세에 소학을 읽고 14세에는 사서(四書)를 완독했다.

19세엔 아버지의 제자였던 11살 연상의 김영주와 결혼했다. 남편은 1896년 7월11일 진보군 진보면 흥구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아들 김성삼을 임신한 상태에서 맞은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이후 20대, 30대 그의 삶은 봉건적인 여인의 역할에 충실했다고 추측된다. 이 시기 남자현은 시모를 극진히 모시며 사후 삼년상을 치러 진보 지역에서 효부로 표창받기도 했다.

하지만 시대는 그를 사대부 며느리의 역할에 머물게 두지 않았다. 민족의 명운이 걸린 엄혹한 시대에 다소곳한 양반집 여성으로만 사는 것을 그가 강하게 거부했다고 보는 편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47세가 된 1919년 2월말 그는 서울로 거처를 옮겨갔다. 1918년 11월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승전국의 영광을 누릴 때였다. 일본에서 독립하고 싶다는 뜻을 국제사회에 알리자는 움직임이 한창이었다.

당시 기준으론 '할머니'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47세의 남자현이 어떤 마음으로 이같은 결심을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그 결단력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우리 민족이 들불같이 일어난 3·1 만세운동 이후 남자현은 만주로의 이주를 결심한다. 그는 아들 김성삼에게 "절뚝거린 역사를 청산하고 그릇된 것을 바로잡으며 살 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망명한다.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니라 이기러 간다. 지금까지의 남자현은 잊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만주에서의 활동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남자현은 남성 독립운동가들을 먹이고 입히는 지원자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직접 총칼을 휘두르려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호걸다운 기개를 보여주는 일화가 잡지 <부흥> 1948년 12월호 기사에 실렸다. 조선인으로서 자신을 심문하려 한 경찰에게 호통을 쳤다는 이야기다.

"왜적들은 선생을 붙잡으려고 대활동을 개시했는데 선생이 호탄현 지방을 지나다가 홍순사라는 자에게 걸렸다. 선생은 그를 향해 '내가 여자의 몸으로 이같이 수천 리 타국에서 애쓰는 것은 그대와 나의 조국을 위한 것이거늘 그대는 조상의 피를 받고 조국의 강토에서 자라나서 어찌 이같은 반역의 죄를 행하느냐? 홍 순사는 심장과 골수를 찌르는 선생의 일언일구에 감동해 잘못을 사과하고 도리어 갈 길을 인도해 여비 70원을 내어드렸다."

한국역사시스템이 공개한 국민보 기사에 따르면 남자현은 남만주에서 북만주로 가던 중 기독교 신자가 돼 북간도에서 교회를 12곳 설립했다. 또 여자교육회를 조직해 여성 교육에 힘썼다. 기사는 그의 활약을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

"만주에 있는 동안 일본 경찰에서 우리 독립운동기관에 대해 정찰이 강화돼 애국 투사들의 행동이 불리하게 됐다. 다행히 여자들의 행동엔 감시를 소홀히 해 남 여사는 의복을 남루하게 차리고서 시베리아에 강한 바람과 찬 눈보라를 맞는가 하면 대륙성의 삼복더위를 견디면서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침식을 잊고 독립운동에 동분서주했다."

1927년 길림대검거사건(吉林大檢擧事件)을 계기로 벌인 안창호 구명 운동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사건은 중국 군대가 안창호 등 만주에 기거하던 조선의 독립운동가 약 50명을 무더기로 검거했다가 중국에서도 비난 여론이 들끓자 모두 풀어준 사건이다. 당시 남자현은 상해 임시정부에 연락해 사태를 알려 석방 여론을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서울=뉴시스】우정사업본부가 지난 2016년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해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우표를 발행했다. 왼쪽 남자현. 2016.05.31. (사진=우정사업본부 제공) photo@newsis.com

독립운동사에 결정적인 장면으로 남은 것은 두 차례의 암살 시도와 세 차례의 혈서다. 그는 일본 총독 사이토마코토(齋藤實)에 이어 만주에 파견된 일본전권대사 무토노부요시(武藤信義)를 암살하려고 계획했다. 또 하얼빈을 방문한 국제연맹조사단장 리튼에게 '대한독립원' 이라고 쓴 혈서를 전달하기 위해 왼쪽 약지 두 마디를 잘랐다.

남자현은 무토노부요시 암살 계획이 탄로 나 일본 경찰에 붙잡혀 단식 투쟁을 하다가 61세 일기로 끝내 숨졌다. 중국 하얼빈 '남강외인묘지'에 묻혔다고 알려졌지만 일대 개발로 외국인 무덤이 이장되면서 유해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기사는 아래와 같이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전했다.

"1934년의 일이었다. 치마 속에 무기를 감추고 왜신(무토노부요시)을 제거하고자 숙소인 영사관 구내에까지 당도했지만 거사 일보 직전에 불행히도 탐정의 밀고로 무기는 압수되고 여사는 감방에 갇힌 몸이 되고 말았다. 여사의 호련한 자세는 당시에 임장한 왜경찰들도 탄복했다. 옥중에서 여사가 단식으로 생명이 위태하게 되자 출소 조치 된 이후 1934년 8월22일 마침내 투사 남 여사는 세상에서 고요히 잠이 들었다."

▲참고자료: 이상국 <남자현 평전>(2018), 강윤정 <여성독립운동가 南慈賢의 항일투쟁>(2018),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 제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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