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가 검찰조사 받아보니.."이런 식일 줄은"

류인하 기자 2019. 2. 17.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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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으로 새 경험… “검찰이 이런 식으로 조사할 줄 몰랐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 전 피의자심문을 받기 위해 1월 2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들어서는 모습을 카메라기자들이 촬영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과정을 법원 밖에서 바라본 변호사들은 “이제 판사들도 우리 마음을 알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피고인이 검찰 조사과정에서 주변 지인에 대한 은근한 압박 등 강압조사를 받았다고 주장해도 대부분의 재판장은 “지금 시대가 어떤 때인데 그런 말이 나오냐”는 식의 반응을 보여 왔지만 이제 그들도 당해봤으니 알 거라는 얘기다.

변호사들의 예상은 적중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을 거치면서 100명 이상의 전·현직 판사들이 검찰 조사를 받았다. 이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검찰이 판사에게까지 이런 식으로 조사할 줄은 몰랐다”였다.

검찰 조사를 받고 온 한 부장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검찰이 질문할 내용을 미리 예상하고, 기억을 떠올려 갔다. 그런데 당초 예상했던 질문은 15~20분 정도로 끝나고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과거의 일을 물었다.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는 것들이라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고 했다. 검찰이 ‘이러이러한 의도로 했던 거 아니냐’고 했다. 분명한 건 당시 그럴 상황도 아니었고, 나는 그럴 위치에서 상의를 할 자격도 없었기 때문에 아니었다고 답하니 그때부터 언제든 나를 참고인 신분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바꿀 수 있다는 뉘앙스를 내비쳤다. ‘아, 이게 검사들의 수사방식이구나’라는 것을 그때 처음 느꼈다. 말 그대로 참고인이었는데도 그 순간만큼은 압박감을 느꼈다.”

또 다른 법원행정처 출신 부장판사는 “검찰이 e메일 내역을 임의제출해달라는 요구를 ‘생각해보겠다’는 말도 못하고 그대로 동의해 제출했다”고 말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남긴 유산? 검찰이 작성한 조서가 묘하게 검찰에 유리한 식으로 질문과 답변이 바뀌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또는 질문 내용과 답변이 조서에 전혀 반영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한 판사는 “아 다르고 어 다른 문장에서 마치 내 답변이 검찰의 질문에 ‘예스’라고 답한 것처럼 적혀 있었다. 나는 조사에서 단 한 번도 ‘그렇습니다’라고 한 적이 없는데 검찰이 유도하듯 했던 질문에는 전부 답이 ‘그렇습니다’로 돼 있었다. 문제제기를 하고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조사받는 과정에서 너무 지쳐 조서를 제대로 수정하지 못하고 나왔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조서를 집어던져라’고 했던 말이 내 일이 되고보니 그대로 와닿았다”고 했다. 또 다른 판사는 “‘아까 질문하셨던 내용이 조서에 없습니다’라고 하니 검사가 ‘그건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거라 따로 조서에 적지 않았다’고 답했다”고 했다.

말 그대로 역지사지(易地思之)다. 판사들은 참고인 또는 피의자 신분이 되고 보니 그동안 법정에서 피고인 측 변호인들이 주장했던 검찰의 강압수사와 검찰조서의 증거능력 여부를 다투는 이유를 알았다고 고백한다. ‘겪어보니 알겠더라’는 얘기다.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이번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를 거친 많은 판사들의 경험이 보다 더 인권친화적인 사법부를 만들 것이라고 말한다. 절반은 진심이고, 절반은 짓궂은 농담이다.

일부 판사들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남겨준 유산’이라고 뼈 있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검찰에 수사의뢰를 하고, 검찰이 사건을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로 배당한 시점부터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및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을 기소하기까지 239일간 진행된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가 없었다면 이렇게 많은 판사들이 검찰 조사를 받는 경험을 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 중 대표적인 문제로 언급되는 것이 대부분 판사가 겪었던 ‘피의자로 신분이 전환될 수 있음을 은근히 내비치며 조사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ㄱ 부장판사는 “모든 사람은 무결할 수 없다. 나는 떳떳하다는 생각으로 검찰청사를 들어가도 조사실에 앉아 있는 순간부터 온갖 생각이 떠오른다. 그 심리를 검사가 파고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법원 내부에서 제기되는 포토라인에 대한 인권침해 주장 역시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와 무관하지 않다. 강민구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공개 소환조사 다음날 자신의 블로그에 ‘이제 포토라인 악습도 걷어내자’라는 제목의 글을 작성해 포토라인 관행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강 부장판사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적어도 유죄의 1심 판결이라도 나기 전에 그 의사에 반해 카메라 세례를 받게 하는 포토라인은 중세 마녀재판과 행태가 다르다고 누가 이론적으로 주장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 포토라인에 서고 안 서고를 검찰이 자의적으로 선별하여 결정한다. 누가, 어떤 법령이 검찰에 그 권한을 부여했나. 검찰이 알 권리를 구실로 현대판 멍석말이를 하고 있다”고 했다.

포토라인 관행의 문제점 도마에 그동안 포토라인이 국민의 알 권리라는 명분 앞에 무죄추정의 원칙을 무시한 폭력에 해당한다는 지적은 인권단체를 중심으로만 제기돼 왔다. 법정에서 처음으로 피고인을 만나는 판사들에게 ‘포토라인 문제’는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문제였다. 이 역시 판사들이 겪어보니 문제라는 것을 인식한 사례 중 하나다. 대한변호사협회와 법조언론인클럽은 지난 1월 15일 ‘포토라인, 이대로 좋은가’라는 주제로 공동토론회를 열어 이 문제를 공론화하기도 했다.

재판부의 집중심리 문제 역시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변호인단은 첫 공판을 앞둔 1월 29일 재판부에 전원 사임서를 제출했다. 일종의 항의성 조치다. 재판부가 심리에 속도를 내기 위해 집중심리로 재판을 하겠다는 계획을 밝히자 피고인의 방어권과 변호인의 변론권 보장이 어렵다며 전원 사임이라는 초강수를 둔 것이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구속기한 만료일이나 사안의 방대성 등을 고려해 임의로 집중심리를 할 수 있다.

임 전 차장의 재판을 맡고 있는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재판장 윤종섭 부장판사)는 주 4회 기일을 열어 재판을 진행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집중심리는 그러나 신속한 재판은 가능하지만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이 어렵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무기대등의 원칙(법정에 선 양 당사자는 대등한 지위에서 법적 다툼을 해야 한다는 원칙)에도 어긋난다. 검찰은 공소유지를 위한 모든 증거자료를 갖춘 상태에서 법정에 들어서지만 변호인단은 검찰이 열람·복사를 허용할 때까지 빈 손으로 재판에 임해야 한다. “아직 열람·복사가 끝나지 않아 한 차례 더 기일을 열어주시면…”이라며 재판장에게 부탁하는 변호사의 모습은 법정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법원 내부에서 이 문제가 지금처럼 논쟁거리가 된 적은 없었다. 이 역시 판사가 겪어보니 집중심리가 얼마나 피고인 방어권 보장에 미흡한 제도인지 알게 된 사례로 볼 수 있다.

혹자는 왜 이제서야 그런 지적을 하느냐며 문제제기 시점을 탓하고, 제식구 감싸기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 중견 변호사는 “몸소 겪어봤으니 이제는 법정 안 풍경도 조금씩 달라지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 역시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가 남긴 성과일지도 모른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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