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기차 '타보니'..입석엔 노인들
[경향신문] “기차표는 역에서 끊어서 왔죠. 인터넷으로 표 사는 걸, 아들 내외가 알려는 줬는데 잘 모르겠어요.”
최영분씨(71)는 설을 맞아 경상북도 영주에서 서울까지 역귀성 했다. 기차로 세 시간이 걸리는 거리다. 아침 일찍 기차역에 나섰지만, 좌석은 이미 매진됐고 할 수 없이 경기도 양평까지 서서 왔다. “사람들이 좀 내리길래 거기서부터 앉아 왔다”는 그는 기차표를 끊을 때면 매번 정해진 출발 시각보다 한두 시간씩 일찍 역으로 향한다. 그래도 좌석을 구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모바일 기차표 예매 사이트 ‘코레일 톡’을 알고 있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쑥스럽게 웃었다. 자식들에게 배우긴 했지만, 본인이 인터넷으로 기차표를 예매해 본 적은 없다고 했다.

■일찍 나와도 ‘서서’ 가는 노인들
지난 2일 서울 청량리역. 역사는 막바지 귀성행렬로 붐볐다. 서울에서 안동까지 내려간다는 김정주씨(67)는 오후 2시 기차를 예매하기 위해 낮 12시에 청량리역으로 왔다. 김씨는 “명절이라 사람이 많을 것 같아서 좀 일찍왔다. 기차 출발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서 역에서 TV를 보며 기다리고 있다”며 “좌석이 없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표가 있어서 입석은 면했다”고 말했다. 김씨 역시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인터넷으로 표를 예매한다는 걸 안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하기는 좀 어렵다”고 말했다.
지난달 8~9일 코레일이 설 기차표 예매를 시작했다. 시작과 동시에 예매분 전 좌석이 매진됐다. 예매 비율은 온라인(77만석, 93%)이 역 현장(6만석 7%)보다 10배 이상 높았다. 명절 연휴 기차표 예매는 소위 ‘전쟁’이라고 표현될 만큼 치열하다. 이때마다 접속 정체 현상도 반복된다. 경부·경전·동해·충북선 등의 예매가 있던 8일에는 오전에는 대기인원이 2만명까지 치솟기도 했다.
모바일 이용에 익숙한 젊은이들이야 접속부터 예매를 위한 기다림까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노인 세대에게 이 같은 일은 낯설게 느껴질 뿐이다. 코레일은 연령별 예매 현황을 취합하고 있지 않다. 젊은이들이 인터넷 기차표 예매의 주 고객이라는 것은 ‘숫자’를 보지 않아도 확인할 수 있다.
이날 청량리에서 안동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좌석을 예매하지 못한 이들이 입석으로 기차에 올랐다. 서서 가는 이들 상당수가 50대가 넘어 보였다. 이미정씨(31)는 “지난 추석 때 어머니와 함께 기차를 탔다. 내가 표를 예매해서 어머니는 앉아서 갔지만, 주위에 노인들이 많이 서 있었다. 어머니가 ‘노인들만 서 있네’라고 혼잣말을 하셨는데, 그때부터 이런 모습이 신경 쓰였다”고 말했다. 그는 60세가 넘은 어머니에게 지난해 인터넷 기차표 예매 방법을 알려드렸다. 이씨는 “처음엔 혼란스러워하셨는데, 몇 번 연습하니 이제는 혼자서도 예매를 하실 줄 안다. 예전엔 표를 못 구해 입석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다행”이라고 말했다.
■‘자식’ 아니더라도 인터넷 알려줄 곳 필요
기차표 예매뿐만 아니다. 최근 현금 없는 매장, 무인 주문기 ‘키오스크’를 이용한 매장이 늘어가면서 기계 조작에 미숙한 노인들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는 얘기가 많다. 정보격차 때문에 실생활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도 많다.
국내 3대 패스트푸드점은 매장의 과반수는 이미 키오스크를 사용 중이다(1월 1일 기준). 롯데리아는 전국 1350개 매장 중에 826개 매장에 설치해 61%의 도입률을 보이고 있다. 맥도날드는 420개 매장 중에 60%, 버거킹도 3백여개 매장 중에 68%에 키오스크를 도입했다. 지금은 일부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곧 보편적인 모습이 될 수도 있다.
시대가 변하는데 노인들이 새로운 생활 방식을 배우지 않고 옛것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다. 이날 서울에서 원주까지 가기 위해 기차를 탄 최은영씨(25·가명)는 예매해 놓은 자리에 한 할머니가 앉아있어 약간의 소동을 겪었다. 최씨는 “예매한 좌석이라고 말씀드렸지만, 할머니께서 잘 이해하시지 못해 역무원을 불러 해결했다”며 “서서 가는 할머니가 안돼 보이긴 했지만, 정당하게 표를 예매했으니 양보해 드릴 수도 없었다. 어르신들도 인터넷 예매를 배웠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역마다 사람이 내리자 빈자리가 하나둘씩 났다. 통로에 서 있던 김정자씨(63)는 이때마다 빈자리에 앉았다. 역에서 입석 표를 끊고 기차를 탔다는 그는 “자식들에게 배웠는데 인터넷 예매 방법을 아직 다 외우지 못했다. 매번 물어보기도 미안하다. 화면이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다”며 “나이가 되게 많은 편도 아닌데 이런 것 못한다고 하면 부끄럽다. 하지만 영어도 잘 모르고 배워야 할 게 많다. 메신저를 처음 쓸 때도 어려웠다. 동영상 보기, 인터넷 뱅킹 등 이제는 익숙한 것들도 있지만 아직 어려운 게 많다. 편하게 배울 수 있는 데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희진 기자 go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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