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여대생 선수도 피해" 韓 체육계 '(성)폭력 연대기'

CBS노컷뉴스 임종률 기자 2019. 1. 20.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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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본 기사와 관련이 없습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한국 체육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미투 운동. 쇼트트랙 여자 국가대표 심석희(한체대)의 폭로로 촉발된 체육계의 폭력과 성폭력 척결 움직임이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 전 세계를 강타한 미투 운동이 한국 스포츠계에도 번지고 있다. 심석희에 이어 유도 선수 출신 신유용과 태권도, 정구 등 피해를 입었다는 선수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한국 체육계는 그동안 성적 지상주의 속에 가려졌던 폭력의 어두운 그늘에 대해 늦었지만 자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여성가족부 등 정부가 나서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뿌리깊게 박힌 한국 스포츠계의 어긋한 관행이 단시간에 사라지기는 쉽지 않다. 한국 체육 특유의 엄격한 사제, 선후배 관계 속에 폭력이 어느 정도 용인되는 분위기가 바꾸려면 체육계 모두가 부단한 노력을 쏟아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 체육계에는 도대체 언제부터 폭력과 성폭력이 고질처럼 자리잡게 된 것일까. 몇 십 년 동안 이어온 한국 스포츠계 폭력의 연대기를 돌아본다. 특히 이번 사태의 발단이 된 빙상계를 중심으로 짚어본다.

▲90년대 빙상연맹 회장부터 폭력, 전설도 성 추문

한국 사회는 1960년대부터 군부 독재 시절을 거치면서 폭력이 만연한 문화가 자리잡았다. 결과를 내기 위해서 어떤 희생이 나오든 문제가 되지 않았다. 스포츠도 마찬가지였다. 일본과 북한 등 라이벌들을 제치기 위해서라면 구타와 얼차려 등 강압적인 방법도 가리지 않았다.

1983년 멕시코세계청소년축구대회 4강 신화의 주역 박종환 전 감독이 대표적이었다. 국제대회 성공을 위해 스파르타식 훈련이 용인됐고, 결과에 대한 찬사 속에 폭력은 잊혀졌다. (다만 박 전 감독은 수십 년 지도 방식을 버리지 못하다 2014년 선수 폭행으로 성남 FC 지휘봉을 내려놓아야 했다.)

민주화 시대가 도래했지만 한국 스포츠의 폭력 문화는 바뀌지 않았다. 특히 빙상계는 수장부터 폭력을 사용할 정도였다. 1990년대 당시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은 국제대회에서 모 지도자와 말다툼 끝에 폭력을 행사했다.

한 체육계 인사는 "당시 연맹 회장은 재야파 지도자들과 갈등을 빚고 있었는데 선수 출전을 놓고 불만이 생기자 이를 설득하려 했지만 되지 않자 폭행한 것"이라고 회상했다. 당시 연맹 회장은 장명희 아시아빙상연맹 회장으로 각종 비리가 감사에서 적발돼 연맹에서 물러나 있다.

최순실의 조카 장시호와 각종 동계스포츠 이권사업에 개입한 의혹을 받고 있는 전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이규혁이 2017년 2월 17일 오후 서울 서초동 중앙지법에서 열린 국정농단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이규혁은 최순실과 장시호가 함께 설립한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서 초대 전무이사를 맡았다. 황진환 기자
당시 빙상계는 성 추문도 적잖았다. 빙속 전설로 꼽히는 이규혁은 1994년 12월 고교생 국가대표로 일본 오비히로 스피드스케이팅월드컵에 출전했다. 대회 뒤 파티를 마치고 선수단이 모두 숙소로 돌아간 가운데 이규혁은 음주 상태에서 일본 여대생 선수에게 불미스러운 일을 했다.

대표팀 코칭스태프도 몰랐던 일이었지만 수 개월 뒤 일본 관계자들이 이에 항의하기 위해 방한하면서 연맹도 알게 된 사건이었다. 당시 장명희 회장 체제였던 연맹은 별다른 징계 없이 이규혁에게 반성문을 받는 선에서 사건을 덮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규혁은 2016년 11월 당시 CBS노컷뉴스와 통화에서 "너무 어리기도 했고, 파티에서 어울려 다소 술을 마신 가운데 일어난 일"이라면서 "상대 여대생 선수와 관련해 (성폭행 같은)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고 해명한 바 있다. 이규혁은 2016년 스포츠토토 빙상단 감독으로 선임됐지만 국정농단의 중심 최순실 씨의 조카 장시호 씨와 얽힌 사실이 밝혀지는 등 논란이 되자 사퇴했다.

▲여고생 성폭력 피해 빈발 "솜방망이 처벌 문제"

세기가 바뀌었지만 폭력과 성폭력의 그늘은 걷히지 않았다. 사실 심석희 이전에도 빙상계는 이런저런 사건, 사고들이 끊이지 않았다. 폭력과 성폭력에 대해 엄중하고도 확실한 징계가 내려지지 않은 시스템도 문제였다.

한 빙상인은 최근 CBS노컷뉴스에 "4년 전 한 지도자가 고교생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대한빙상경기연맹에서 영구제명된 적이 있다"고 귀띔했다. 이어 "그러나 해당 지도자가 변호사를 사서 '서로 좋아했던 사이'라고 주장해 다시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연맹도 확인한 부분이다. 연맹 관계자는 "당시 해당 지도자가 공정위원회로부터 징계를 받은 것은 맞다"면서 "그러나 인권 보호 차원에서 사설 지도까지 막지는 못했고, 경기장에도 관중석까지는 출입할 수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2017년 7월 당시 CBS노컷뉴스에 모 지방 고교 야구부 폭행 피해 선수가 보내온 사진. 야구 배트에 맞고 스파이크에 찍힌 사진이다.
심석희를 비롯해 대표 선수들을 폭행한 조재범 전 대표팀 코치는 연맹에 영구 제명 징계를 받았지만 중국 대표팀 지도자로 옮겨가려는 시도가 있었다. 폭행을 하고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던 셈이다. 물론 이번 사태로 정부는 폭력 및 성폭력 지도자들에 대해 해외 진출을 막는 방안을 마련했지만 이전까지는 이런 방지책이 미비했다는 점을 시인한 모양새다.

한국 체육계에는 지도자와 선수뿐 아니라 선후배 사이에서도 폭행은 하나의 문화였다. 이른바 군기를 잡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쇼트트랙의 경우 대표팀 훈련 도중 선배가 후배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린 사례도 있었다. 스피드스케이팅도 이승훈과 노선영이 후배들을 괴롭혔다는 주장이 나왔다.

다른 종목도 마찬가지다. CBS노컷뉴스는 2017년 7월 지방의 한 고교 야구부에서 선배가 후배를 세워놓고 야구공으로 맞히고, 스파이크로 찍는 등 폭행을 가한 사건을 보도한 바 있다. 최근 프로야구 히어로즈 소속이던 문우람도 2015년 선배 이택근에게 배트로 머리를 맞았다고 폭로한 바 있다.

한국 체육은 일제와 군부 독재의 잔재 속에 사제와 선후배 사이에 엄격한 규율이 전통이라는 미명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여기에 합숙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폭력과 성폭력이 일어나기 쉬운 게 한국 체육계다. 심석희의 폭로 속에 촉발된 한국 체육의 미투 운동이 오랜 관습을 깨고 새롭고 건전한 스포츠 문화를 다지는 초석이 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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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임종률 기자] airjr@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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