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지상주의의 민낯 '밀실의 추악함'

윤은용 기자 2019. 1. 19.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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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체육계 성폭력 피해 폭로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지난 10일 선수촌 관계자가 등록되지 않은 차량의 선수촌 내 진입을 통제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어느 순간 한국 체육계는 ‘밀실’이 됐다. 그들만의 공간에서, 국가의 이름을 맨 앞에 내걸며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공개가 아닌 폐쇄를 택했다. 언젠가부터 이런 방법은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성적에 현혹돼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밀실 내부에서는 밖으로 들리지 않았던 고통의 아우성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지도자와 선수의 관계는 어느새 사제지간이 아니라 갑과 을의 ‘주종관계’로 뒤바뀌었고, 갑이 내지르는 ‘갑질’에 을의 입장인 선수들은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었다. 심석희의 용기가 아니었다면, 그 뒤를 이어 들불처럼 일어난 작은 용기들이 아니었다면 우린 ‘침묵의 카르텔’이라고 불리는 이 밀실에서 이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 줄 끝내 몰랐을 것이다.

보복이 두려운 파벌의 카르텔

이들이 밀실을 만들기 위해 내건 이유는 바로 ‘성적’이다. 그동안 한국 체육계는 과정이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성적 지상주의’에 심하게 물들어 있었다. 어떻게든 대회에 나가 메달을 따면 지도자는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에 지도자들은 모든 초점을 성적에만 맞췄고, 그 과정에서 선수들을 함부로 다루기 십상이었다. 지도자들은 선수들의 교육·훈련을 이유로 들어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갔고, 선수들은 더욱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심석희의 폭로로 만천하에 알려진 한국 빙상계의 현실은 이 사실을 정확히 증명하고 있다. 선수 성폭행 사건이 벌어진 것으로 알려진 장소는 다름 아닌 태릉·진천 국가대표선수촌과 한국체대 빙상장 등의 지도자 라커룸이다. 코치가 선수에게 가하는 위해 상황이 쉽게 노출될 수 있는 장소지만 성적 지상주의에 몰입한 현장에서는 이를 모른 체하며 묵인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체육계의 한 관계자는 “소위 스포츠 강국이라는 국가들은 성적이라는 결실을 맺기까지 수많은 시간과 노력, 지원을 체계적으로 투자한다”며 “지금 한국 체육계의 현실은 분명 잘못되어 있다”고 했다.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시되는 현실. 밀실이 만들어지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추리소설에서는 도저히 깰 수 없는 밀실도 탐정이 나서서 해결하곤 한다. 여러 트릭이 복잡하게 얽힌 소설 안에서의 밀실과 비교하면, 한국 체육계의 밀실은 목소리 하나면 단숨에 깨부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선수들의 목소리는 밀실을 뚫지 못했다. 아니, 아예 그런 목소리 자체가 나오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성적 지상주의는 한국 체육계에 ‘파벌’을 만들었다. 항의나 불만을 제기하면 그에 대한 보복이 반드시 뒤따랐다. 행여 파벌에서 제외될 경우, 선수생활은 물론 은퇴 후 지도자가 돼서도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를 내고 싶어도 뒤에 따를 보복을 생각하면 선뜻 나서기가 힘든 구조였다. 최근 ‘미투’에 동참한 전직 유도선수 신유용은 원래 경찰 고발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코치와 동료의 증언 거부로 무산돼 언론을 통해 자신이 당한 피해를 폭로했다.

파벌은 지도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선수의 성적이 자신의 성공과 밀접하게 연결됐다는 점은 성적 향상을 위해 ‘어떤 수단이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반대로 선수와 학부모 입장에서는 지도자로부터 버림받으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남들보다 불리한 조건에서 싸울 수밖에 없다는 공포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결과적으로 파벌은 더욱 굳건해질 수밖에 없고, 악순환은 되풀이된다.

하나마나한 솜방망이 처벌 또한 밀실이 굳건히 유지되는 데 한몫 했다. 체육계의 폭력과 관련된 뉴스가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씩 터져나오곤 했다. 문제는 잘못을 했으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하지만, 처벌의 수준은 그 잘못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문제를 일으킨 지도자들이 처벌을 받기는 했지만 대부분 가벼운 수준이었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현장에 복귀하는 잘못된 반복이 거듭됐다.

솜방망이 처벌과 책임지지 않는 집행부

현재 벌어지고 있는 한국 체육계 미투 논란의 시발점이 된 조재범 전 쇼트트랙 대표팀 코치도 2018년 1월 심석희를 폭행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한빙상경기연맹으로부터 영구제명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곧바로 중국 대표팀을 맡기로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을 빚기도 했다.

문화관광체육부와 대한체육회는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실효를 거둘 수 있을지에는 의문부호가 붙는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이 1월 15일 발표한 쇄신안을 보면 크게 성폭력 가해자 영구제명 및 국내·외 취업 원천차단, 성폭력 예방 및 피해자 보호를 위한 구조적인 개선방안 확충, 성폭력 조사 및 교육의 외부 전문기관 위탁, 선수 육성 시스템의 근본적 개선방안 마련 등으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딱히 새로운 내용은 없다. 한 관계자는 “가장 큰 문제는 대한체육회 집행부다. 그동안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사과만 반복할 뿐 책임은 지지 않았다”며 “지금 돌아가는 꼴은 마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다. 이 대책이 과연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지난해 미국 체조계는 쑥대밭이 됐다. 미국 체조 국가대표팀 주치의이자 미시간주립대 의대 교수였던 래리 나사르가 150여명의 체조선수들을 성추행·성폭행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피해자 가운데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가브리엘 더글라스와 시몬 바일스 등도 포함돼 있어 충격은 더했다.

이 사건도 원래는 묻힐 뻔했다. 2015년 미국 체조협회가 나사르를 팀 닥터에서 해임했지만 구체적인 사유를 밝히지 않았다. 이 사건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은 선수들의 미투였다. 2016년 전직 체조선수 레이철 덴홀랜더의 폭로로 인해 나사르의 범행이 세상에 공개됐다. 이어 2017년 전·현직 대표선수 150명의 폭로가 연쇄적으로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체조협회가 돈을 주고 폭로를 막으려고 했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결국 나사르는 최대 360년에 가까운 징역형을, 미국체조협회는 선수들의 피해보상금을 마련하지 못해 파산했다.

지금 거센 파도처럼 밀어 닥치고 있는 한국 체육계의 미투는 더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당하기만 했던 선수들도 용기를 내 그동안의 억울함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보상과 함께 향후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확실한 대책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많은 관심과 응원이 필요하다. 선수들의 용기에 이제 우리가 응답할 차례다.

윤은용 기자 plaimsto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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