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원 바지에 500만원 가방' 한국의 소비 신인류

신창호 기자 2019. 1. 19.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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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소비 양극화 시대
사진=게티이미지
사진=게티이미지

부(富)의 양극화는 선진국, 후진국을 가리지 않고 벌어진다. 보편적 복지가 일반화된 서구도 이 현상에선 벗어날 수 없게 된 게 오히려 21세기 현대사회의 특징이라 할 만하다. 사회적 제도가 일부 계층의 ‘기회와 부의 독점’을 보완한다고 하지만, 더 많은 부자와 더 많은 빈자가 발생하는 양상이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만 달러를 넘는 선진형 국가에선 소비의 양극화도 벌어진다. 소비 양극화는 부의 양극화와 정비례하는 현상이 아니다. 부자가 더 많은 부를 쌓고, 빈자는 더 빈곤해지는 악순환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자신의 구매력을 초과하는 명품을 구입하고선 월셋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젊은이도 수두룩하다. 자신이 지닌 경제력, 부에 환원되지 않는 소비 패턴이 지속되는 것이다. 각종 고가 사치품을 구매하는 소비자가 생활필수품은 최저가 가성비 상품에 집착하고, 구매력이 높지 않은 20대 청년층이 초고가 명품 수집에 열을 올리는 현상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이상한 소비’. 똑같은 옷도 수백만원짜리 디자이너 브랜드는 잘 팔리고, 10만~20만원 중저가는 잘 안 팔리며, 1만~7만원 초저가 SPA(의류기획·디자인, 생산·제조, 유통·판매까지 전 과정을 제조 회사가 맡는 의류 전문점) 옷은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현상이 우리 사회에서도 대세가 돼 가고 있다. 할인마트는 장사가 안 되는데 백화점은 역대급 호황을 누린다. 합리적인 가격과 맛을 내세운 패밀리레스토랑은 줄줄이 문을 닫는 반면 최고급 호텔 뷔페는 하루 이틀 전엔 예약조차 힘들 정도다. 연휴만 되면 인천국제공항엔 패키지 해외여행을 나서는 이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소비 양극화를 ‘일단 나누어지면 서로 정반대 방향으로 치닫는’ 부의 양극화처럼 단순한 양극화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온라인 구매와 해외 직구로 듣도 보도 못한 외국산 명품이 젊은 세대 사이에 유행하고, 가격 대 성능을 따지는 ‘가성비’가 아닌 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을 추구하는 ‘가심비’ 현상이 일반화하면서 소비시장이 급격히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 소비의 종언(終焉)

전통적 형태의 소비 양극화는 부의 양극화와 대체로 정비례하는 소비 패턴을 일컫는다. 부자가 값비싼 사치품을 쓰고, 빈자가 값싼 물건을 소비하는 현상 말이다. 따라서 ‘브랜드=신분과 계층’이란 등식이 성립하는 소비인 셈이다. 물건 하나의 사용가치보다 브랜드가 지닌 이미지와 가격을 소비했다고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 명품 샤넬 핸드백을 구매한 부유한 여성은 샤넬의 화장품과 향수를 쓰고 드레스 원피스를 입고, 시장패션을 입는 아줌마의 구매 원칙은 ‘이 제품이 얼마나 싼지’인 식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 사회는 이 같은 형태의 전통적 소비 양극화가 깨져가고 있다. 상류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초고가 명품과 서민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최저가 브랜드가 한 사람의 소비자를 통해 뒤섞인다. SPA 브랜드의 3만원짜리 청바지를 입은 여성이 500만원짜리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는 한국판 젊은 ‘신(新)인류’가 대세가 돼 가는 시대라는 것이다.

골프 마니아인 30대 직장인 A씨는 최근 스웨덴산 J브랜드의 골프 캐디백을 65만원 주고 구매했다. 얼마 전 그는 10년 된 드라이버를 바꾸면서 국내 소매점에서 50만원이 훌쩍 넘자 해외 옥션 사이트를 샅샅이 뒤져 30만원에 똑같은 채를 낙찰받았다. 골프채보다 가방이 비싼데도 A씨는 “이전보다 만족감이 훨씬 높다“고 했다. 캐디백과 옷가방을 합쳐 100만원인데 말이다.

결혼 10년째인 B씨는 최근 인터넷 해외 구매 대행 사이트를 통해 스위스산 명품 손목시계를 800만원에 구입했다. 그리곤 시계 전문점에 가서 결혼선물로 받았던 시계를 400여만원에 팔았다. B씨는 “아내와 상의해 결정한 것”이라며 “아무래도 디자인이 구닥다리라 좀 젊고 스포티한 시계로 바꾸고 싶었다. 조만간 아내도 결혼시계를 이렇게 바꿀 것”이라고 했다.

예상치 못한 반전, 백화점↑ 할인점↓

경기 불황과 소비 침체에도 백화점들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 반면 대형마트들은 침체다. 극도로 인색한 소비자들의 자린고비 구매에다 온라인몰에 손님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다.

10여년 전 경기 불황이 시작될 당시 유통업계는 고급품을 파는 백화점은 엄청난 침체를 겪을 것이고 할인점과 초저가, 중저가 브랜드가 호황을 누릴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가 된 것이다.

유통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말까지 신세계백화점의 명품 매출은 전년도보다 19.1%나 늘었다. 2016년 9.4%였던 명품 매출이 2017년 18.4%, 지난해 이같이 급증한 것이다. 국내 경제성장률이 3%를 밑도는 상황을 감안하면 놀라운 수치다. 이 백화점의 연령대별 명품 구매 증가율을 보면 20대가 전년 대비 78.6%, 30대 16.7%로 40대(12.9%)와 50대(13.0%)를 크게 앞선다. 전체 명품 매출에선 20대가 30% 선을 넘어 2년 전(8.4%)보다 3.6배 높아졌다. 30대도 16%가량을 차지해 20, 30대 매출 비중이 약 47%에 달한다. 현대백화점 롯데백화점 등도 이런 현상은 마찬가지다.

반면 대형마트는 고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마트의 2018년 3분기까지 매출은 10조125억원으로 2017년 같은 기간보다 7.8% 늘었지만 영업이익은 12.5% 줄었다. 같은 기간 롯데마트는 1818억원의 영업적자를 냈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대형마트가 온라인 가격보다 높고 차별화된 상품과 타깃 고객층을 확보하지 못해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여행 외식 자동차도 마찬가지 양극화

패밀리레스토랑 같은 외식업은 불황을 겪고 있지만 고급 호텔 뷔페 레스토랑은 번창을 거듭하고 있다. 편의점 도시락 판매는 계속 느는데, 평범한 동네 식당은 개점휴업이다. 국내여행은 불황인데, 호화 해외여행 패키지는 유례없이 잘 팔려나간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소비자심리지수는 12월 97.2, 11월 96.0으로 100을 밑돈다. 소비자심리지수는 소비자의 체감 경기를 보여주는 지표로 지수가 100을 밑돌면 장기 평균보다 소비자심리가 비관적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전체적인 유통업 매출은 증가세다. 산업부에 따르면 2018년 10월 유통업체 매출은 2017년 같은 기간보다 6.7% 증가하는 등 올 들어 11개월 연속 증가세를 보였다. 오프라인은 3.6% 감소했지만 온라인이 28.3% 늘었기 때문이다. 가격 경쟁력을 갖춘 온라인 쇼핑은 젊은 세대에게 바쁜 일상에서 소비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방편으로 여겨진다.

자동차 소비도 양극화가 뚜렷하다. 준중형 이하 국산차 판매는 떨어지고, 고가의 수입차가 잘 팔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15일 한국수입자동차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1억원 넘는 수입차 판매(2만6314대)는 전년보다 10.5% 증가해 사상 최다였다. 2015년 24.9%에 달했던 준중형 이하 승용차급의 비중이 올해는 14.9%까지 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SUV(다목적스포츠차량)로 고객층이 이동한 것도 큰 원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수입차 증가와 준중형 승용차 수요 감소는 30, 40대 ‘두 번째 차량 구매층’의 선호도 변화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자동차의 성능, 승차감 같은 전통적 구매 기준이 ‘하차감’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하차감은 ‘내가 차에서 내릴 때 그 차를 보면 만족하는 감도’를 일컫는 신조어다. 국산차에 식상한 젊은 소비자들이 같은 성능이라면 좀 더 많은 돈을 지불하더라도 신선한 외국산 럭셔리 브랜드 자동차를 구입하려 한다는 것이다.

신창호 기자 proco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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