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38억장이 인간들 울고 웃겼는데.. 이젠 커피전문점서 문전박대
우리나라 지폐는 경북 경산에 있는 한국조폐공사 화폐 본부에서 모두 찍는다. 조폐공사 인쇄생산관리부 정경원 과장은 "세뱃돈과 명절 용돈이 오가는 설을 앞둔 요즈음이 화폐 본부가 가장 바쁘게 돌아가는 시기"라고 했다.
지난해 상반기의 경우 새로 공급된 지폐의 40%가 설이 있는 2월에 풀렸다. 현금 사용이 줄고 가상화폐 등장 등으로 '돈'의 정체성이 바뀌는 요즘, 그 변화의 흐름을 짚어본다.
스타벅스에서 문전박대당하는 기분을 아십니까. 계산하는 직원의 싸늘한 눈빛에 상처가 컸습니다. 결제용 단말기 옆에 쓴 '현금 없는 매장'이란 안내문이 보이더군요. 뒤에 선 손님도 제 주인에게 닦달합디다. "아저씨, 카드 없어요?"
네, 그렇습니다. 저는 돈입니다. 세상을 누비는 여러분과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함께 나누는 지폐입니다. 종이 쪼가리 주제에 불만이 많다고요? 이래 봬도 저는 325년 역사(1694년 영란은행, 최초 지폐 발행)를 자랑하는, 국가가 보증하는 교환 수단입니다. 그런데도 커피 전문점은 저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흥분을 좀 가라앉히겠습니다. 예전엔 반대였지 말입니다. 카드는 사절, 현금만 받던 가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오죽하면 국가가 나서서 현금만 받는 가게엔 벌금을 물리겠다고(1980년대 말 카드 의무수납제 시행) 했지요.
편의점 결제는 60%, 앞서 말한 스타벅스 결제는 90% 이상이 카드나 모바일 결제일 정도로 이제 현금은 '뒷방 노인' 신세가 됐더군요. 그뿐입니까. 디지털 혁명이네, 가상화폐니 하면서 어느새 저를 쓸모없는 존재 취급하는 나라까지 생겼습니다. 덴마크에선 2017년부터 아예 자체적으로 돈 찍기를 중단했고 스웨덴에선 대중교통을 현금으로 탈 수 없답니다.
저의 본가(本家) 격인 한국은행도 동전은 인제 그만 쓰자는 캠페인을 하는 판입니다. 이러다가 제가 정말 사라질까 걱정이 될 지경이라, 저의 생로병사(生老病死)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합니다.
◇한 때 한 해 38억장 인쇄…이젠 22억장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저의 고향은 경북 경산입니다. 경산에 있는 한국조폐공사 화폐 본부에서 태어났습니다. 평범해 보이는 이 건물에서 한국의 모든 지폐가 태어나 전국에 배포됩니다. 제작 단계별로, 총 여덟 개의 기계가 돌아갑니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서 한 해 38억장 가까운 지폐가 태어났다고 하더군요. 요즘은 22억장 정도를 찍어냅니다. 조폐공사 직원도 한때의 절반 수준인 1500명 정도로 줄었습니다. 돈을 전만큼 적게 찍어서이기도 하지만 위폐 감별 등에 첨단 디지털 기술이 더 많이 활용돼 '사람'이 덜 필요해진 영향도 있었다고 하네요.
저는 '전지(全紙)'라 불리는 커다란 돈 전용 용지에 찍혀 나옵니다. 1000~1만원권은 45장, 5만원권은 28장이 한 장에 붙은 형태로 인쇄됩니다. 특수 잉크가 마르는 시간 등이 필요하기 때문에 돈 하나가 다 만들어지려면 약 두 달이 걸립니다. 워낙 까다롭고 중요한 공정이라 이 세상에 돈을 전부 자체 제작하는 나라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국조폐공사는 페루·태국 같은 나라에 돈을 만들어 수출하기도 합니다.
요즘엔 현금 무용론(無用論)이 번지면서 덴마크처럼 지폐 생산 기술이 있는 국가가 돈을 안 찍겠다 선언하기도 한다니 별일입니다. 또 스웨덴·노르웨이도 2030년까지 현금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며 열심이랍니다. 심지어 스웨덴은 은행 지점 70%에 현금이 없다고 합니다. 제가 멸종 공포를 느낀다 해도 엄살은 아니지요.
◇통화 유통 속도 사상 최저 수준 완벽한 돈으로 '합격' 판정을 받고 나면, 저는 전국 16곳에 있는 한국은행 지역본부로 배정됩니다. 가는 길은 어둡고 차갑습니다. 이른바 '현송(현금 수송)차'라 불리는 10t 트럭들이 저를 운반합니다. 이 차가 움직이는 경로나 생긴 모양은 극비입니다. 혹시라도 범죄에 노출될까 하는 우려 때문이지요. 비밀을 하나만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 트럭은 매우 무겁고 느립니다. 설령 트럭을 어떻게든 탈취하더라도 굉장히 느리게 움직이기 때문에 금세 경찰차에 잡힐 가능성이 크니 엄두도 내지 마십시오.
한은 지역본부에 배치되고 나서도 저는 아직 '돈'이 아닙니다. 여러분 지갑에 있는 지폐와 생긴 모습은 똑같지만 한 장에 몇 십원 들여 만든 '상품'에 불과합니다. 시중은행이 한은에 요청해와 저 육중한 한은의 보관 창고 문을 박차고 나가고서야, 저는 '쓸모 있는 놈'이 됩니다. 돈이 돈값을 한다고나 할까요. 그다음부터 저는 세상을 돌고 돕니다. 현금 인출기로도 가고, 분식집에서 주인에게 밥도 사 먹이고, 때론 세종대왕·신사임당 낯 부끄럽게 뇌물로 쓰이는 일도 생깁니다. 운 없으면 금고에 몇 년씩 처박히는 일도 있지요.
이래저래 돈이 도는 속도를 통화 유통 속도(명목 국내총생산/통화량)라고 합니다. 경제가 잘 풀리면 속도가 빨라지는데 요즘은 아시다시피 경제 활력이 떨어져 이 속도가 사상 최저를 기록 중입니다. 지난해 3분기까지 4분기 연속 0.7을 밑돌았는데, 이런 적은 처음이네요.
◇돈도 고령화… 수명 14개월 늘어 여전히 제가 할 일이 남아 있긴 합니다. 예컨대 소주 몇 잔 털어 넣고 집에 가는 길, 추우니 택시 타고 가라며 만원 한 장 주머니에 꽂아주는 선배의 마음이 카드로 어찌 전달이 되겠습니까. 결혼식장·장례식장·돌잔치… 인생의 가장 기쁘고 슬픈 순간에 저는 바삐 움직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저의 마지막 '용처'라 믿었던 이런 이벤트 현장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합니다. QR코드(정보가 담긴 사각 문양)를 활용한 카카오페이를 결혼식장에 설치하고 휴대폰으로 축의금 받는 젊은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하니까요. 세배는 동영상으로, 세뱃돈은 모바일 페이로 주고받는 세태도 생겨나고요.
전만큼 애정을 받지 못하는 데 따른 장점도 있습니다. 제 수명만큼은 계속 길어지는 중입니다. 여러분처럼 저도 고령화가 진행 중이라 할까요, 하하. 저를 찍어내는 한국은행에 따르면, 7년 전보다 1000원짜리는 14개월, 1만원짜리는 22개월 정도 수명이 길어져 각각 52개월, 121개월 산답니다. 현금 많이 쓰는 나라일수록, 아무래도 손상도 빨리 되니 돈의 수명이 짧습니다. 예를 들어 '겐킨(현금)'을 여전히 많이 쓰는 일본은 '돈 수명'이 세계 주요국 중 가장 짧습니다. 5000엔권 수명이 저(1만원권)의 7분의 1인 1년 6개월 수준이니 '애걔걔' 소리가 나올 수밖에요. 한국의 현금 결제 비중이 20% 수준인 반면, 일본은 65%를 여전히 현금으로 결제한다고 합니다. 일본 지폐들아, 힘내라!
◇반년간 폐기된 돈 에베레스트 3.6배 높이 저는'비자금' 꼬리표를 달고 장판 아래 같은 곳에 파묻혀 있다가 열과 습기에 눌어붙는 일도 겪습니다. 못 쓸 지경이 된 돈은 한은 지역본부로 가져오시면 됩니다. 웬만하면 새 돈으로 바꿔줍니다. 지난해 상반기에 폐기된 이른바 '손상 지폐'는 약 2조200억원어치(3억장)였습니다. 그나마 2017년 하반기에 비하면 402억원 줄어든 수준이지만, 여전히 참 많은 돈이 망가지는 건 사실입니다. 이게 얼마나 많은 분량이냐 하면요. 이 돈을 쌓아 올리면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산의 3.6배 높이가 된답니다.
제가 수명을 다하면 전국의 한은 본부에서 저를 분쇄합니다. 누군가가 주워가도 절대로 다시 지폐로 만들지 못하게, 아주 잘게 부숴 버립니다. 돈을 분쇄하는 지역은 한은 본부 안에서도 보안 등급이 가장 높습니다.
잘게 갈린 돈은 주먹만 한 원기둥꼴 블록으로 뭉쳐져 포대에 담깁니다. 한은 서울 강남본부의 경우 한 달에 한 번씩 모 중소기업이 와서 포대째로 저를 (공짜로) 거둬들여 갑니다. 나름 고급 면(綿) 소재인지라 화폐로서의 수명이 다하고서도꽤 쓸모가 있어 재활용됩니다. 방진(防振)·방음(防音) 소재로 특히 좋다고 하고요. 그러니 여러분, 제가 떠난다고 너무 슬퍼 마십시오. 저는 시끄러운 이 세상에서도 여러분이 조금이나마 편해지도록, 자동차 범퍼와 벽 속에 계속 살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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