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1년 마침내 암벽을 뚫다..임금 상투 잡는 것보다 어렵다는 국가대표 미투까지

오는 29일이면 서지현 검사(수원지검 성남지청 부부장)가 미투(#Me Too·나도 당했다)에 나선 지 1년이 된다. 이전에도 수많은 딸과 아들들이 성추행· 성폭력 피해를 호소했지만 서 검사로 인해 우리사회는 미투를 '폭로' 이상의 그 무엇으로 보고 반응하게 됐다. 이는 '검사'라는 타이틀이 주는 무게와 함께 생방송 뉴스에 등장했던 용기가 만들어낸 결과다.
이후 문화계와 학계, 정계 등 각 분야에서 수많은 미투가 이어져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잠잠해질 즈음 새해 들어 나온 여자 쇼트트랙 간판 심석희의 '미투'는 서 검사 못지 않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심석희의 상징성, 남성 중심의 기득권이 공고한 체육계의 환경 등을 볼 때 그의 미투는 용기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심석희는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릴레이 3000m 2연패 주역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2개나 목에 건 한국여자 쇼트트랙 간판스타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심석희가 '죽도록 맞았다'라는 말보다 훨씬 충격적인 "10대때부터 조재범 (전 국가대표팀 쇼트트랙) 코치한테서 성폭행을 당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지난달 17일 조 전 코치를 경기남부지방경찰청에 아동·청소년의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강간상해) 혐의 등으로 고소했다. 고소장에 17세 때인 2014년 여름부터 조 전 코치에게 수차례 성폭행과 강제추행을 당했다고 썼다.
경찰은 빠른 속도로 수사에 나섰고 정부와 국회, 체육계는 대책마련·책임자 처벌 등 많이 봐왔던 '수습 상차림'을 들고 호들갑을 떨었다.

스포츠 세계에서 사제 관계, 선후배 관계는 그 어떤 조직보다 위계질서가 엄격하다. 중고등학교 때보다 대학교, 실업의 감독이나 코치가 더 큰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
운동선수의 꿈이라는 국가대표의 경우 더 심하다. 모든 선수가 열망하는 올림픽 메달을 따려면 엄청난 훈련과 노력에 더해 코칭스태프의 말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국가대표 발탁이나 올림픽 출전 자체가 힘들어질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국가대표(선발)를 좌지우지 하는 감독이나 코치는 '부모와 스승, 선배와 상사 모두를 합친 것 보다 더 무서운 존재요 권력자다'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이렇게 된 것은 스포츠 세계의 독특한 특성, 악습과 잘못된 인식 때문이다.
즉 △ 상명하복에 길들여져 있고 △ 인성교육을 받을 기회가 적었고 △ 성적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 일정부분 강제성을 띄지 않을 경우 혹독한 훈련량을 소화해 낼 수 없는데다 △ 상급학교 진학, 프로진출과 대표선수선발 등에도 인맥이 영향을 미치고 △ 항명은 곧 영원한 퇴출로 연결되며 △ 평판이 은퇴 후 생활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이런 것들이 쌓여 시쳇말로 찍히면 끝이고, '죽어서도, 이민을 가서도 벗어날 수 없다'는 고정관념까지 생겼다.

성적부진이 아닌 석연치 않은 이유로 감독이나 코치가 사퇴하는 예가 있다. 속을 파보면 팀내 불화, 폭력, 금전문제와 함께 성 문제가 원인이 된 경우가 적지 않다.
수십년 전 특급스타 A는 은퇴 뒤 지도자로 변신해 매스컴과 팬들의 주목을 받았다. 얼마 뒤 팀을 떠났고 스포츠판에 "여제자를 성폭행했다"라는 말이 나돌았다. A가 받은 불이익은 사표, 흥미거리에 불과했던 소문이 다였다.
유명한 여성 스포츠 스타 B는 유부남 스승과 살림을 차렸다. 사랑으로 볼 수 있지만 스승이 권력을 행사한 결과였다는 말이 지배적이었고 혼인신고도 못한 채 오랜기간 뒷바라지만 했다. 그들 세계는 다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공개적으로 문제삼지 않았다.
일부 지도자는 선수를 완벽히 통제하는 수단으로 성폭력을 사용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경우 '다 알리겠다'고 협박, 여자 선수의 몸과 마음을 아바타처럼 조종했다.
미국 체조대표팀 주치의(래리 나사르)도 선수 심리를 이용해 17년간 150명이 넘는 여자선수들을 성추행, 성폭행했다가 징역 175년형을 선고받았다.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은 11일 경찰청, 교육부, 법무부, 보건복지부, 고용노동부, 문체부 등 관련부처 관계자와 정부서울청사에서 '범정부 성희롱·성폭력 근절 대책'마련에 머리를 맞댔다.
진 장관은 "심석희 선수의 용기와 결단에 경의를 표한다"며 "문체부와 함께 신고체계가 제대로 작동돼 피해자가 두려움 없이 신고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같은날 더불어민주당 권미숙 원내대변인은 "성폭력 피해선수들의 폭로가 얼마나 오랜 고통과 어려운 결단에서 나온 것인지 알고 있다. 그들의 용기가 헛되지 않도록 체육계 성폭력과 폭력이 근절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고 했다.
앞서 안민석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 등 여야의원 19명은 △지도자는 반드시 폭력 방지 교육이수 △ 선수의 신체에 폭행을 가하거나 상해를 입일 경우 지도자 자격 정지 △형 확정시 체육계 영구제명 등의 내용이 담긴 국민생활체육진흥법 개정안을 발의키로 다짐했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심석희 선수의 용기 있는 외침을 들으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안쓰럽고 미안할 따름이다"며 "문제 재발을 막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함께 찾아보고,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했다.

심석희의 미투를 계기로 우리사회 마지막 남은 구질서라는 체육계도 변화가 불가피하게 됐다. 서 검사의 미투를 계기로 여러 분야에서 용기있는 목소리가 쏟아진 것처럼 체육계 미투도 이미 봇물이 터졌기 때문이다.
체육계 수장인 이기흥 체육회장은 "심석희 선수에게 깊은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전하며 이로 인해 상처를 받은 피해자 가족들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도 깊이 사과드린다"라며 사과문을 냈다. 그러면서 시스템 재검토, 무관용원칙, 현장조사 즉각실시 등의 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젊은빙상인연대’ 등 단체들은 판에 박힌 사과라며 이 회장 등 체육회 집행부 전원 사퇴를 요구했다.
이런 가운데 뜻있는 체육인들은 "마지막 적폐라는 소리를 떨쳐 버리려면 체육계 스스로 '원스트라이크 아웃' '즉시 형사고발' '24시간 신고접수 체제 가동' 등 특단의 대책을 내놓고 즉시 실행해야 한다"며 이번이 스포츠계가 구체제에서 벗어날 마지막 기회라고 촉구했다.
한편 독일 베를린서 진행 중인 제26회 세계남자핸드볼선수권대회 남북단일팀 개막전을 참관하기 위해 독일에 간 이 회장은 이번 사태에 책임을 지고 집행부 총사퇴 여부를 고민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
사진=SBS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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