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고용 한다더니..일터에서 등 떠밀린 하청 노동자

반기웅 기자 2019. 1. 5.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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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해 12월 31일 KT새노조 손말이음센터지회가 더불어민주당사 앞에서 한국정보화진흥원 정규직화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KT새노조 손말이음센터지회

지난해 12월 28일 오전 9시. KTcs가 위탁운영하는 한국정보화진흥원 손말이음센터에서 근무하는 황소라씨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부)로부터 한 통의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황씨는 청각언어장애인의 전화 소통을 돕는 중계사였다. 문자메시지는 과기부가 보냈다. 과기부는 “센터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며 황씨가 장관 표창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알려왔다.

같은 날 오후 5시. 과기부로부터 문자메시지가 또 왔다. 이번에는 한국정보화진흥원에서 보낸 문자다. 내용은 천지차이였다. 진흥원 측은 황씨가 최근 진행된 중계사 직접고용 전환채용에서 불합격했다고 통보해왔다. 한국정보화진흥원은 과기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센터에 기여한 공로로 장관 표창까지 받게 된 황씨에게 대체 무슨 결격 사유가 있길래 진흥원 측은 불합격 판정을 내렸을까. 황씨는 “진흥원 측이 사실상 채용 사기를 벌였다”며 억울해하고 있다.

■ 불합격이 ‘해고’가 된 이유

황씨의 사연을 이해하려면 센터가 처음 설립된 2005년부터 KTcs로의 업무위탁 과정, 이후 진행된 최근의 전환채용 과정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난 2005년 한국정보화진흥원은 청각언어장애인을 위한 통신중계서비스 제공을 위해 손말이음센터를 설립했다. 2009년부터 진흥원은 손말이음센터를 KT 자회사인 KTcs에 위탁 운영하도록 맡겼다. 위탁 계약 만료일은 지난해 12월 31일이었다.

진흥원이 KTcs에 손말이음센터를 위탁하면서 기존 손말이음센터 중계사들은 KTcs의 정규직 직원으로 전환됐다. 황씨의 경우 업무위탁이 시작된 뒤인 2011년에 KTcs에 정규직으로 입사했다. 대부분이 여성인 중계사들은 KTcs 소속으로 손말이음센터에서 일하는 동안 저임금과 고용불안, 직장 내 성희롱에 시달려 왔다. 지난 2017년 국정감사에서는 수개월간 성폭력 피해자와 가해자를 함께 근무하도록 한 손말이음센터의 운영실태가 밝혀지기도 했다.

황씨는 당시 KT새노조 손말이음센터지회의 지회장이었다. 황씨는 국감 참고인으로 출석해 손말이음센터의 실태를 증언했다. 지난해엔 중계업무를 하며 당한 온라인 성희롱을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지난해 1월 고용노동부는 KTcs가 손말이음센터 직원들에게 자격수당과 연장근로수당을 지급하지 않았다며 근로기준법 위반사항에 대해 시정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는 손말이음센터 중계사들이 겪는 폐해가 간접고용에서 비롯된 구조적인 문제라고 진단했다. 정부가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추진하면서 손말이음센터 중계사들도 직접고용 전환대상에 포함됐다. 이에 한국정보화진흥원은 KTcs와의 위탁계약을 2018년 12월 31일자로 종료하고 직접고용(무기계약직)으로 40명을 채용키로 계획을 세웠다. 채용규모를 40명으로 잡은 건 KTcs에서 실제 근무하던 34명의 중계사 인원 규모를 고려한 조치였다.

한국정보화진흥원은 진흥원으로의 직접고용을 원하는 중계사 가운데 적합한 사람을 선별하는 방식으로 채용 전형을 진행했다. 황씨 등에 따르면 진흥원은 “기존 중계사들에게 채용 기회 우선권을 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황씨 등은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는 한 진흥원 정규직으로 전환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와 크게 달랐다.

진흥원은 지난달 3차에 걸쳐 무기계약직 전환 시험을 진행했다. 30명이 채용절차에 응시했지만 18명만 합격했다. 응시자의 40%에 달하는 12명이 떨어진 것이다. 여기에는 장관 표창을 받을 예정이었던 황씨도, 센터에서 일한 지 10년이 넘는 장기근속 중계사도 포함됐다. 진흥원 관계자는 “간접고용으로 불안정한 공공일자리를 안정적인 일자리로 바꾸자는 취지로 진행한 채용”이라며 “기존 중계사를 모두 직접고용한다는 취지가 애초부터 아니었다”고 밝혔다.

■ 불투명한 전형에 줄줄이 탈락

채용에서 탈락한 중계사들은 전환채용 과정이 석연치 않았다고 주장한다. 중계사들은 전환시험 하루 전날에야 문자로 시험 안내 통보를 받았다. 응시자 가운데에는 안내문자를 아예 받지 못한 중계사도 있었다. 최종 전형인 3차 임원 면접도 입사예정일을 5일 앞두고 긴박하게 치러졌다고 주장한다. 중계사들은 “진흥원이 고의로 촉박한 전형 일정을 잡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며 “향후 불합격자들이 문제제기를 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꼼수를 부린 것”이라고 밝혔다.

종합적으로 볼 때 진흥원의 이번 전환채용 과정은 ‘상시·지속적 업무를 하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한’ 정부 방침에 맞지 않는다는 게 중계사들이 내린 결론이다. 황씨는 “정부가 제시한 ‘전환’의 개념이 기존 업무의 연속성과 고용승계를 보장하는 개념인 데 비해 진흥원 측의 전환채용 과정은 실제 ‘채용’에 가깝다”고 밝혔다.

전환채용에서 떨어진 중계사들은 현재 무직 상태다. 시험에 응시했던 중계사들 모두 1차 전형이 시작되자 KTcs에 일괄적으로 사직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시험에서 떨어지면 당장 갈 곳이 없는 중계사들은 합격이 되기도 전에 왜 사직서부터 냈을까. 중계사들은 시험 전 열린 전환 설명회에서 진흥원 측으로부터 ‘이번 전환은 기존 중계사들을 탈락시키려는 시험이 아니다’라는 설명을 들었다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중계사들은 전환시험을 ‘형식적인 채용절차’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일러스트 김상민

중계사들은 진흥원 측이 입사 후 노조활동을 할 만한 중계사들을 고의로 탈락시켰다는 의혹도 제기하고 있다. 탈락자 중에는 노조의 핵심 조합원 5명도 포함됐다. 노조 관계자는 “진흥원의 이번 정규직 전환은 애초부터 직접고용 목적이 아니었다”며 “정규직 전환을 빌미로 센터 내에서 부당한 일에 목소리를 내는 노조 간부와 강성 조합원을 골라 해고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진흥원 측은 이 같은 주장들이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했다. 진흥원 관계자는 “전환채용 절차는 엄격하고 공정하게 관리했다”며 “전환 방법과 일정에 대해서도 충분한 설명을 했다”고 밝혔다. 진흥원 관계자는 “노조 관계자, 장관 표창 수여자, 장기근속자 등에 대한 불합격 통보는 사전에 자기소개서에도 나타나 있지 않은 내용으로 임직원 면접자들이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며 “노조활동 우려 등 특정한 사유를 들어 불합격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 KTcs는 왜 퇴사를 종용했나

중계사들의 원소속 업체인 KTcs는 이번 전환채용 과정에서 중계사들의 퇴사를 종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KTcs는 전환채용 논의가 한창 진행 중이던 지난해 11월부터 중계사들을 상대로 직접고용 희망 여부를 물었고, 희망자를 대상으로는 사직서를 받았다. 진흥원의 전환시험이 시작되고도 사직서를 내지 않은 중계사들에게는 ‘12월 19일 정오까지 퀵서비스를 통해서라도 사직서를 접수하라’고 공지했다.

KTcs는 중계사들과의 개별 면담에서도 퇴사를 권유했다. 중계사와의 면담 자리에서 KTcs 측은 “내년에는 우리가 받는 사업 예산이 깎여서 중계사 처우가 더 열악해진다. KTcs 말고 진흥원으로 가라”고 설명했다. 사측이 사직서를 내고 진흥원으로 갈 것을 노골적으로 권했다는 게 중계사들의 주장이다. 당시 KTcs와 면담을 했던 중계사는 “사측이 ‘진흥원보다 처우가 좋은 곳은 없다’면서 ‘여기를 그만두는 게 낫다’고 설명했다”고 말했다.

아직 전환채용이 확정되지도 않은 자사 직원에게 퇴사를 권유하고 종용한 것이다. 노조 측은 KTcs가 이렇게까지 나온 이유로 노조문제를 들고 있다. 손말이음센터 중계사 대다수는 노조에 가입한 상태였다. KTcs가 위탁운영을 해온 처음 9년 동안 손말이음센터에는 노조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부당노동행위를 견디다 못한 노동자들은 지난 2017년 6월 KT새노조 손말이음센터지회를 결성했다.

이후 노조는 KTcs의 부당노동행위를 잇따라 고발했고 사측은 결국 노동부로부터 시정지시까지 받았다. KTcs 입장에서 손말이음센터 중계사들은 한마디로 ‘눈엣가시’였던 셈이다. KT새노조 관계자는 “사측이 이 기회에 노조 조합원을 털어낸 것으로 보인다”며 “그렇지 않고서는 사직서 작성을 재촉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KTcs 측은 “직원을 상대로 사직 의사를 취합한 것은 위탁업무 종료를 앞두고 진행한 정상적인 절차”라며 “면담 과정에서도 퇴사를 강요한 사실이 없다”고 해명했다.

공공부문의 건전한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취지로 진행된 이번 전환채용 과정에서 12명의 중계사들은 안정적인 새 직장을 얻기는커녕 아예 직장을 잃고 생계를 위협받는 처지에 놓였다. 한국정보화진흥원은 미충원된 중계사 자리는 단기 아르바이트로 채운다는 계획을 세웠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된 중계사들이 문제제기에 나서자 단기 아르바이트 채용계획을 취소했다.

중계사들의 사정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악화되자 진흥원 측은 뒤늦게 중계사들을 달래기 위한 중재안을 내놨다. 한국정보화진흥원은 3일 “이번 전환채용 과정에서 탈락한 중계사들을 다음 공개채용에서 최대한 구제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노조 관계자는 “진흥원에서 제시한 중재안은 중계사들이 납득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라며 “향후 진흥원 측과 추가 협상을 벌일 것”이라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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