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에코 트레일ㅣ21구간 역사문화] 속리산이 키워 낸 비극적 영웅 임경업

글 월간산 신준범 기자 2018. 12. 17.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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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영웅호걸이 거쳐 간 명산이자, 한강·낙동강·금강이 분기하는 산

속리산은 ‘영웅호걸의 산’이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무인과 문인 등 영웅호걸의 전설과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신라의 최치원이 거쳐 갔으며,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즉위하기 전 이곳에 머물렀다. 쿠데타로 왕권을 거머쥔 세조 역시 이곳에서 몸과 마음을 치유했고, 우암 송시열과 당대의 시인 백호 임제가 발자취를 새겨 놓았다.

[월간산]임경업이 장검을 내리쳐 갈랐다는 금강석문. 바위 틈 사이를 지나면 임경업이 머물렀던 관음암과 장군수가 나온다.

속리산俗離山이란 이름은 신라시대부터였다고 전한다. 신라 말 진표眞表 율사는 법주사를 중창하기 위해 보은 땅으로 들어섰다. 밭을 갈던 소들이 대사를 알아보고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들이 저럴진대 하물며 우리야”하며 대사를 알아보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 길로 낫과 괭이를 버리고 속세俗를 떠나니離 속리산이란 이름이 여기서 유래되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휴식을 위해, 또 쿠데타 합리화를 위해 속리산을 찾았다는 설이 있다. 세조와 관련된 정이품송, 목욕소, 문장대 설화의 핵심은 자신의 집권이 하늘의 뜻이었다는 것. 산을 세속화해 정치에 이용한 것이다. 한편으론 600여 년 전에도 백성 누구나 아는 명산이었음을 보여 준다.

흔히 속리산을 흔히 삼파맥三派脈, 삼파수三派水의 산이라고 말한다. 백두대간 속리산에서 금북정맥, 한남정맥이 뻗어나가기 때문이다. 실제로 속리산 천왕봉에서 물을 버리면 북쪽으로 떨어진 물은 한강으로 가고, 동쪽으로 떨어진 물은 낙동강으로 가고, 남쪽으로 떨어진 물은 금강이 된다.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의 생명의 근원인 한강·낙동강·금강을 가르는 중요한 꼭지점이 속리산이다.  

속리산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법주사法住寺다.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된 법주사는 ‘부처님의 법이 머문다’는 뜻을 담고 있다. 전란을 피해 피신하던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여기서 기도했고, 태조 이성계도 여기서 구국기도를 했다고 한다. 팔상전, 쌍사자석등, 석련지의 국보 3점이 있고 보물, 문화재, 천연기념물이 100여 점에 이른다.

법주사의 상징은 역시 금동대불이다. 처음 세워진 1964년에는 시멘트로 만든 대불이었으며, 1990년 붕괴 직전에 청동대불로 다시 태어났다. 2000년부터 청동을 금동으로 바꾸는 공사를 시작했다. 개금불사改金佛事는 2002년 6월에 완공되었다. 3㎜ 두께로 금을 입혔는데 총 80㎏의 금을 쏟아 부었다.

속리산을 거쳐 간 인물 중 가장 영웅호걸 이미지에 걸맞은 이는 임경업 장군이다. 조선 중기의 명장 임경업은 속리산에서 무예를 익혔다.

임경업은 어릴 적부터 병정놀이가 취미였고 활쏘기가 특기였다. <손자>, <사마법> 같은 병서에 통달했으며 무예 실력이 빼어났다. 뼈대 있는 양반 가문이지만 몰락한 빈가의 가장이었던 부친 임황은 용장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격려했다고 한다.

임황이 “왜 장군이 되려 하느냐”고 묻자 임경업은 “대장부로서 멋있고 통쾌하지 않습니까”하고 답했다. 임황은 “장군이 되기는 틀렸다”며 질책하기도 했다. “장군이 되고자 함이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뽐내기 위한 것”이라 지적하자, 임경업은 부끄러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월간산]경업대에서 본 입석대. 길쭉하게 선 바위가 임경업이 7년 수도의 내공을 보여 주기 위해 세웠다는 입석대다.

이후 임경업은 속리산에 들어 무예를 익혔는데, 대표적인 장소가 ‘경업대’다. 임경업이 무예를 연마한 경업대는 속리산에서 가장 기이한 모양의 영웅바위다. 거대한 바위 예술의 결정체인 경업대에 서면, 소시민이라 할지라도 발 아래로 펼쳐지는 웅장한 경치에 반해 대장부의 기상이 충전됨을 느낄 수 있다.

경업대 부근 능선에는 입석대가 있는데, 임경업이 7년 수도 끝에 내공을 보여 주기 위해 누워 있던 바위를 세웠다는 전설이 전한다. 경업대 아래의 금강석문은 임경업이 장검을 내리쳐 갈랐다는 전설이 전한다. 경업대 아래에는 관음암이란 암자가 있는데 임경업이 토굴을 파고 살았다 하여 ‘임경업토굴’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곳에는 석간수가 있는데, 임경업이 마신 물이라 하여 ‘장군수’라 불린다. 임경업이 속리산에서 무술을 익힐 때 사부는 독보獨步 대사였다고 한다. 독보 대사의 무예는 독보적이라 병자호란 때 나름의 공을 세웠다고 하나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독보 대사에게 전수한 임경업은 신기에 가까운 무예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임경업은 25세에 무과에 급제해 이괄의 난 때 공로를 세워 두각을 보이며 처음 이름을 알렸다. 그는 정묘호란, 병자호란 같은 난세에 영웅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조선을 대표하는 명장으로 백성들에게 두터운 신망을 받았으며, 명나라와 청나라에서도 명성이 높았을 정도였다. 산처럼 우직했던 그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꺾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 속 영웅의 말로가 대부분 그러하듯 조선 3대 간신으로 꼽히는 모략과 이간질의 귀재 김자점의 모함으로 역모죄를 뒤집어쓴 채 고문을 받다 옥사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채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한다.

“아! 나는 어찌하여 이 좁은 땅에서 태어나 초라하게 살다 가는가! 천하의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죽어야 하다니!”

속리산이 키워낸 영웅의 말로는 허무했으나, 그는 스스로 산이 되었다. 이해득실이 아닌 우국충정의 신의를 끝까지 지켜 4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역사 속에 변치 않는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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