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베네수엘라 '석유 동아줄' 붙잡고 있다가 도미노 몰락

아바나(쿠바)/안상현 특파원 2018. 12. 17.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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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난 허덕이는 쿠바.. 안상현 특파원 르포]
베네수엘라 석유지원 의존했지만 유가 폭락으로 지원 뚝 떨어져
경제, 23년만에 마이너스 성장
아바나(쿠바)=안상현 특파원

지난 7일 오후 6시(현지 시각) 쿠바 수도 아바나. 시내 중심 베다도 지역은 퇴근 시간인데도 왕복 6차선 도로가 썰렁했다. 승객을 가득 실은 버스와 택시가 종종 지날 뿐 개인 승용차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주민 클라우디아씨는 "3~4년 전엔 이곳에도 교통 체증이 있었다"며 "교통량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 말했다. 말레콘 해안 도로에서 도심 혁명광장까지 4~5㎞를 걷는 동안 지나친 주유소 5곳 중 2곳은 간판의 불이 꺼져 있었다. 한 주유소 직원은 "정부 공급이 끊겨 기름을 팔지 못한 지 8개월 정도 됐다"고 했다.

중남미 사회주의 터줏대감 쿠바가 구(舊)소련 붕괴 이후 20여년 만에 또 한 번 지독한 경제난을 겪고 있다. 이번엔 좌파 포퓰리스트 정권이 집권한 베네수엘라 경제가 붕괴하자 도미노처럼 타격을 받았다. 남미 최대 산유국 베네수엘라는 2000년대 들어 사회주의 형제국 쿠바에 헐값 석유를 공급했지만, 유가 하락으로 경제가 파탄 상황에 빠지자 쿠바 지원 물량을 크게 줄였다.

◇붕괴하는 중남미 좌파 국가들 경제

1959년 혁명 이후 쿠바는 30여년간 소련의 경제 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쿠바 수출입의 80%를 소련이 차지했다. 소련이 무너지자 쿠바에서도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먹을 것조차 구할 수 없던 국민은 길고양이와 동물원 동물들도 잡아먹었다.

충격에서 서서히 벗어나던 쿠바는 2000년대 들어 새 '물주'를 찾았다. 1999년 집권한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권과 손을 잡았다. 두 나라는 '반미(反美)'와 '21세기 사회주의'로 찰떡궁합을 자랑했다. 베네수엘라는 쿠바에 국제 시세 절반값에 석유를 제공했고, 쿠바는 베네수엘라에 의사와 교수, 군사 고문 등 전문 인력 수만명을 보냈다. 쿠바는 베네수엘라 석유에 중독됐다. 2014년 쿠바의 전체 수입액의 39.8%, 수출액의 42.6%가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한 것이었다.

빵도 기름도 부족해요 - 지난 13일(현지 시각) 쿠바 수도 아바나의 한 빵집 앞에 빵을 사려는 쿠바인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쿠바 정부가 재정 악화로 생필품·의약품 수입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최근 두 달 새 쿠바는 극심한 밀가루난에 시달리고 있다. 아바나 시내에 있는 국영 주유소‘엘 모델로’에 있는 주유기 계기판이 아예 꺼져있다(오른쪽 사진). 이곳은 기름이 없어 8개월째 운영을 못 하고 있다. 쿠바에 헐값으로 석유를 공급하던 베네수엘라 경제가 파탄 나면서 석유 공급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AFP 연합뉴스·안상현 특파원

하지만 쿠바가 잡은 건 '썩은 동아줄'이었음이 드러났다. 유가 폭락으로 베네수엘라 경제가 붕괴됐고, 쿠바에 대한 석유 지원 물량이 급감했다. 베네수엘라가 쿠바에 공급한 석유는 2008년 하루 평균 10만배럴에서 작년 4만배럴로 60%가 줄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오바마 정부 때 이룬 쿠바와의 국교 정상화를 폐기하고, 개인 여행 금지 등 제재 조치를 복원한 것도 큰 타격이 됐다.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은 "쿠바는 2016~2017년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면서 "23년 만에 처음"이라고 했다.

◇고혈압약 쪼개 먹고

아바나 시내 3층짜리 대형 마트 '라푼틸야'에서 만난 주부 줄리에(46)씨는 음식 재료 코너를 돌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며칠째 밀가루를 구경도 못 했다"면서 "밀가루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했다. 쿠바에선 요즘 생필품과 식료품이 돌아가면서 품귀 현상을 보이고 있다. 지난 7월엔 우유가 자취를 감췄고, 2개월 전부터는 밀가루가 시장에서 사라졌다.

약품도 마찬가지다. 북부 연안 도시 만탄사스에 사는 고혈압 환자 아나 마리아 로페즈(80)씨는 "4월에 국영 약국에서 산 약을 반씩 쪼개 먹으며 2개월 버텼지만, 이마저 떨어진 이후 약을 먹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생필품·의약품난은 쿠바 정부 재정이 구멍 나 해외에서 수입을 제대로 못 해오기 때문이다. 코트라 아바나 무역관 정덕래 관장은 "쿠바는 베네수엘라 석유를 정제한 후 되팔아 달러를 벌었는데, 베네수엘라가 어려움에 빠지면서 이 같은 구조가 무너졌다"고 말했다. 쿠바의 정제유 제품 수출은 2013년 5억달러에서 2016년 1540만달러로 약 97% 줄었다.

◇"진짜 동아줄은 미국에서 보내는 돈"

쿠바 통계정보청에 따르면 2016년 쿠바인 월평균 임금은 740쿠바페소(CUP)로 미화 29.6달러 정도다. 이 돈으로는 제대로 끼니를 때우기 어렵다. 국영 정육점에서 파는 돼지고기는 1파운드(약 453g)당 5쿠바페소지만 운이 좋아야 살 수 있고, 대부분 50쿠바페소(약 2달러)를 주고 암시장에서 사야 한다.

지난 6일 아바나 시내 산 라자로 동네에 있는 국영 정육점엔 판매할 고기도, 손님도 없었다. 에리사(78)씨는 "국영 정육점에서 주는 한 달 배급량은 1파운드 남짓 닭다리 하나 정도"라며 "이걸로는 일주일도 못 버틴다"고 했다. 그의 손에는 한 명당 하루에 하나씩 주는 40g짜리 배급용 빵이 들려 있었다. 한 끼면 사라질 양이다. 쿠바인들은 부족한 고기·식료품은 국영 상점이 아닌 개인이 하는 작은 가게나 암시장 등에 의존하고 있다.

쿠바인들 생계를 지탱해주는 건 미국에서 오는 돈이다. 미국에는 쿠바 교포 180만명이 살고 있다. 전체 쿠바 인구가 1120만명인 것을 감안하면 쿠바 국민 6명당 1명꼴이다. 한 가정당 한 명쯤은 미국에 가 있는 셈이다. 이들이 고국 가족에게 보내는 돈은 매년 수십억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쿠바에선 이 돈을 미국계 금융회사인 웨스턴 유니언의 쿠바 지점에서 인출한다. 20대 청년 크리스티안씨는 "8년 전 미국 마이애미로 간 아버지가 차량 정비공으로 일하면서 1년에 300~400달러를 보내준다"며 "이 돈으로 먹을 것도 사고 생필품도 산다"고 했다. 쿠바인들의 진짜 '동아줄'은 사회주의 형제국 베네수엘라가 아닌 미국 달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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