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년 달 착륙의 충격, 캔버스에 흐르는 무한우주
24시간 인공위성 돌아가는 세상
매순간 확장하는 시·공간 형상화
동심원·나선 반복패턴 눈에 띄어
61년 프랑스로 간 영원한 이방인
요즘 젊은이들에도 새로운 130점
남북통일 염원 담은 '상봉'도 나와
한국에서 홍익대 미대 교수였던 그는 61년 마흔 일곱살의 나이에 프랑스로 건너가 그림에만 매달려 지내던 터였다. 후에 그는 이때 받은 충격을 이렇게 밝혔다. "인공위성에서 (지구 위)우리 생활을 감시할 정도로 과학이 발전했는데, 과거의 공간 개념을 답습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과학적인 공간을 탐구해 화폭에 담고 싶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11일 개막한 한묵 작가의 유고전 ‘한묵: 또 하나의 시(詩) 질서를 위하여’는 신선한 충격과 감동, 그 자체다. 관람객들은 작품이 전하는 치열한 작가 정신에 놀라고, 여태 이 작가의 존재를 잘 몰랐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란다.
개막일 전시장을 찾은 작가의 부인 이충석(86)씨는 "우리 선생님 작품 앞에서는 언제나 옷깃을 여미게 된다”며 "선생님은 평생 에트랑제(Etranger, ‘이방인’이란 뜻)로 살았다. 저는 지금도 작품을 보면 선생님을 만난 듯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기하 추상의 거장’ 한묵의 작품 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자리다. 국내에 처음으로 공개되는 작품 60여 점을 포함해 130여 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백기영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부장은 "시대를 앞선 한묵 작가의 감각은 지금 젊은 세대와 소통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이번 유고전이 소통의 문을 여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50년대 구상 회화부터 90년대 말까지의 작업을 시기별로 5부로 나누어 작품이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전쟁 이후 ‘가족 이산’ ‘가난’의 경험을 담았던 그의 작품은 57년 ‘모던아트협회’를 결성한 이후 추상으로 접어들었다. 특히 파리에 도착한 61년부터는 대상을 오로지 면과 색, 선으로만 표현하는 순수추상에 매달렸다.
판화 작업으로 독창적인 공간 표현 방식을 체득한 작가는 이를 캔버스로 옮기기 시작했다. 75년작 ‘푸른 나선’과 89년작 ‘십자성의 교향’ 등은 모두 "역동적이면서도 우주로 열린 무한공간”을 표현한 대표 작품이다. 이 중에서도 신 큐레이터는 남북통일을 기원하면서 작업한 91년작 ‘상봉’을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로 꼽았다.
오광수 미술평론가(뮤지엄 산 관장)는 "69년의 달 착륙은 작가에게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는 깨달음을 가져다줬다”며 "작가는 공간의 다이너미즘(역동성)에서 생명의 에너지를 보았고, 이를 절제된 형태와 풍부한 색채로 빚어냈다”고 말했다.
신 큐레이터는 "한묵은 시공간과 생명의 근원을 성찰하며 독창적인 조형언어를 창조한 선구적인 작가였다”며 "안타깝게도 현재까지는 이 작가에 대한 연구 논문 한 편이 없다. 이번 전시가 한묵 작가를 새롭게 돌아보는 의미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2019년 3월 24일까지.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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