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관능, 세상이 가두지 못했던 엄마의 몸

2018. 12. 12.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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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남다른 엄마’에 매혹되고
상처받은 나의 과거는 아름답게 시들었다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어린 시절에 관한 강렬한 기억 중 하나는, 동네 남자아이들이 더운 여름날 웃통을 벗고 나와 놀던 모습이었다. 그중 여자아이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걸 알고 의아해했다. 집에 돌아와서 엄마에게 선언부터 했다. 나도 웃통 벗고 나갈 거야. 엄마의 반응은 기억에서 희미하다. 아마 대부분의 경우처럼,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으셨을 거고 나는 알아서 할 일을 결정했을 게다.

웃통을 벗었다. 그대로 뛰어나갔다가 길에 어른들만 보여서 멈칫거린 기억이 난다. 머리칼을 어깨까지 기르고 웃통을 벗고 대문을 나온, 누가 봐도 여자아이로 보이는 나를 두고 휘둥그레지는 어른들의 눈에 발걸음은 지레 힘을 잃었다. 얼마 가지도 못하고 지나가는 아주머니에게 붙잡혔고 풀이 죽은 채 다락방에 올라갔다. 그래도 옷을 챙겨 입진 않았다. 혼자 노는 일상 속으로 스며들자 편안해졌다. 아랫도리마저 벗어버렸다. 나는 자주 벌거숭이가 되어 다락방에서 놀았다. 매 맞는 아내 흉내를 내며 흐느끼기도 했고 때리는 남편이 되어 발광하기도 했다. 적요한 다락방 안의 햇빛은 관객처럼 내 알몸에 갈채를 날렸다. 갑자기 사위가 컴컴해지고 사방으로 무너지고 쏟아붓는 비가 내리면 촘촘한 습기가 몸을 베일처럼 감쌌다. 맑고 촉촉하고 말랑해지는 내 살갗이 마냥 신기해서 여기저기 쓰다듬어보기도 했다.

그녀는 몸을 가리거나 숨기지 않았고

알몸의 감각을 떠올리면 엄마의 하얗고 부드러운 살결과 둥글고 아름다운 몸이 전등처럼 머릿속에 반짝 켜진다. 햇빛을 배경으로 찬란하게 빛나던 그녀의 몸을 보며 어린 나는 아슬아슬해서 숨을 조이다가도, 성큼성큼 걸어가는 동작마다 헝클어지고 출렁였다 되돌아오는 모양새에 숨통이 트이고 내 몸마저 홀가분해짐을 느꼈다. 엄마는 엄마의 몸에 자연스러웠다. 가리거나 숨기지 않았다. 거침없이 드러내고 벗었고 집 안을 활보했다. 여름의 엄마는 더더욱 눈부셨는데, 바람 따라 파도처럼 출렁이는 얇고 부드러운 서머 드레스를 즐겨 입었다. 한 꺼풀 떨어지면 그대로 반짝이는 하얀 몸이 드러났다. 빛으로 떨어지는 물살을 가르는 인어의 비늘 같다고, 그녀의 드레스를 보며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서머 드레스를 즐겨 입던 시절의 엄마는 남들과 참 달랐다. 다른 엄마들이랑도 달랐고 다른 여자들과도 달랐다. 나는 전설의 인어를 쫓는 선원처럼 그녀에게 꼼짝없이 매혹됐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을 게다. 그때 엄마의 나이는 서른을 조금 넘긴 후였다. 가족 모두가 강원도의 어느 해수욕장으로 피서를 갔다. 아빠는 야심만만하게 텐트를 준비했고 우리는 해변의 캠핑장에서 장장 일주일을 보냈다. 껍질이 두 번 벗겨질 만큼 새까맣게 타서 물놀이를 했는데, 어느 날 일광욕을 즐기던 엄마가 수영복을 가만히 내려서는 한쪽 젖가슴을 반쯤 드러냈다. 깜짝 놀란 나는 엄마에게, 남들이 볼 수도 있으니 그러지 말라고 속삭였다. 그녀는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슨 상관이야. 아무도 보지 않아. 봐도 상관없고.”

엄마는 가슴에 작은 멍울이 생겼다며, 햇빛을 받으면 좀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런 엄마를 바라보는 기분은 복잡했다. 부끄러우면서 자랑스러웠다. 그녀의 특별함이, 그녀의 과감함이, 그녀의 아름다움이.

나는 사랑스러운 그녀가 자랑스러웠다

자랄수록 엄마를 향한 마음은 부끄러움보다 자랑스러움 쪽으로 기울어갔다. 나는 나의 엄마가 매력적인 여자임이 자랑스러웠다. 그녀는 잦은 돌발 행동으로 지루한 일상에 날씨를 바꾸듯 활기를 불어넣었다. 나는 그녀가 마냥 신나고 귀여웠다. 나의 귀여운 엄마, 사랑스러웠던 그녀는 보수적이고 강압적인 아빠와의 결혼 생활 동안 요리조리 피해 다니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해냈다. 연애를 했고(나는 그 남자들을 엄마와 함께 만나기도 했다), 미니스커트에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신고 외출했고(아빠가 뺏어서 버리면 주워서 다시 신고 나갔다), 일을 했고 성공했고, 또 실패했다. 아빠가 집에서 살림하고 엄마가 돈을 벌어오는 구조를 정착시켰다. 엄마의 논리는 간단했다. 당신이 나보다 요리 잘하고 좋아하잖아. 나는 당신보다 돈을 더 잘 벌잖아. 가고 싶을 때 여행 다 보내줄 테니, 내가 나가서 일하는 거 가지고 뭐라 하지 마. 그럭저럭 우리 집의 가장 평화로운 시기가 한동안 이어졌다. 아빠는 즐겁게 살림했고 취향에 맞는 가사 도구를 마련하는 데 재미를 붙였으며, 좋은 식재료를 사기 위해 먼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한 달가량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왔고 출판사를 차린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다 돈을 잃기도 했다. 엄마는 그에 대해 일절 아무 말도 없으셨다. 속상해하지도 않고, 그건 그 사람이 나한테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이니까 들춰내지 않는다고만 했다.

엄마는 손도 예뻤고 발은 알맞게 못생겼고 다리는 감탄할 만큼 예뻤다. 어릴 적 엄마 옆에서 잘 때마다 엄마가 등을 돌려 누울 때마다 가슴이 무너졌다. 엄마를 깨우면 안 되었기 때문에 나는 자리를 바꿔 다시 엄마 품을 바라보며 누웠다. 엄마의 등은 크고 쓸쓸해서 비워둘 수 없을 것 같아 이불을 꼭꼭 덮어두었다. 그녀가 전화 통화를 하거나 사람을 만날 때면 나는 엄마 등에 귀를 대고 앉아 있고는 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등을 타고 울리는 감촉이 좋았다. 엄마가 자주 입던 드레스에는 엄마 냄새가 흥건했다. 엄마가 사라지는 날이면 엄마의 옷장에 들어가서 엄마 옷에 코를 파묻고 엄마를 기다렸다. 태평한 얼굴로 되돌아오는 엄마를 보면 무너지듯 울었다. 엄마는 그런 나를 이해 못했다. 나도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를 잃을까봐 두려웠고 매일매일이 그녀가 조금씩 사라지는 날들 같아 시름이 쌓였다.

1996년 여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기 전 날의 오후는 엄마 곁에서 느릿느릿 보냈다. 낮잠이 든 엄마를 빛이 가득한 안방에서 가만히 보고 또 봤다. 수동 사진기를 들고 엄마를 찍었다. 엄마의 얼굴, 엄마의 손, 엄마의 발, 엄마의 목, 엄마의 어깨, 엄마의 배, 엄마의 다리, 엄마의 무릎 등등으로 조각난 엄마의 몸을 퍼즐처럼 간직했다. 그리울 때마다 엄마를 그렇게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면 조금은 견딜 만할 것 같았다. 그러다 사람 사진을 조각내서 간직하는 건 그 사람에게 불운을 가져다준단 말을 듣고 모조리 불태웠다. 파리에서의 어느 날이었다. 불길 속에 사그라지는 엄마의 몸들을 예전처럼 애타게 그리워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등을 훑고 지나가는 소름처럼 서러움이 지나갔다.

엄마의 특별함은 ‘남들처럼’ 빛이 바랬지만

그토록 끝이 없을 것 같은 사랑도 영원하지 않다니.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사랑일 것 같은 엄마를, 이제는 그 부재마저 익숙해져버리다니. 훗날 다시 깨달았다. 사랑이 영원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그 시절 그 사랑이 유별났다는 걸. 시간이 흘렀고 숱한 일이 지나갔다. 엄마를 향한 나의 사랑은 지나치게 일방적이었음이 낱낱이 드러나는 세월이었다. 학대에 가까운 엄마의 연속된 행동을 두고 주변 사람들은 물었다. 도대체 왜, 그 모든 걸 감수하고도 엄마를 놓지 못하느냐고. 나는 대답했다.

“매력적이잖아요. 정말로 매력적이잖아요. 게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데. 저 사람이 무너지는 걸 견딜 수가 없어요.”

첫아이는 예정일보다 일주일 늦게 나왔다. 산후조리를 도와주러 온 엄마와 아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곳곳을 걸어다녔다. 대부분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엄마는 온통 한 사람 이야기만 했다. 주저앉아 울기도 했다. 나는 그런 엄마가 지겨워 소리쳤다.

“도대체 출산 앞둔 딸한테 와서 이혼도 안 해놓고선 실연당했다고 울고불고하는 엄마가 어디 있어?”

“어디 있긴 어디 있어? 여기 있지. 이렇게 슬프고 힘든데, 너라도 좀 다독여주면 안 돼? 넌 행복하잖아. 넌 다 가졌잖아. 그런 네가 왜 나를 더 살펴주면 안 돼?”

엄마의 행복은 언제부터인가 남들의 시선과 남들과 같아지는 일로 기울어갔다. 보란 듯이 잘 살고 싶어 했고 그게 잘되지 않자 당신이 살지 못한 삶을 내가 대신 살아주길 바라셨다. 엄마의 불행이 시작된 건 남들처럼 갖고 남들처럼 사랑받는 삶을 휘청이며 따라잡기 시작한 때부터였을까. 한동안 나는 엄마의 불행까지 모조리 책임지고 싶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사랑이었지만, 불행에 허우적대는 엄마 대신 그녀가 원한 행복을 찾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슬픔에 푹 절여진 엄마는 아이 아빠에게 사랑받는 내 모습을 보고도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당신이 꿈꾸던 모든 걸 내가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때 어렴풋이 깨달았다. 난, 엄마의 숨겨진 욕망을 따라 살아왔구나. 내가 사랑했던 엄마의 특별함은 까마득히 잊은 채 그녀의 불행을 대리 행복으로 위로하려 했구나. 그리고 언제나 너무 멀리 나간 선의는 실패로 돌아온다.

“왜 나는 하나도 못 받은 걸 너는 다 누리고 사니? 왜 나는 이 모든 것을 받을 수가 없니?”

이렇게 한탄하는 엄마가 처량해서 나도 울었다.

아이가 태어나 서너 살이 될 때까지 가능하면 집 안 창문은 모조리 열어놓고 알몸으로 두었다. 나 역시 옷을 한 꺼풀 걸치듯이 지냈다. 우리는 매일매일 날것의 바람과 햇빛의 축복을 누렸다. 나도 아이들도 서로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즐기는 나날이었다. 사춘기가 오면서부터 아이들은 제 몸에 좀더 조심스러워졌지만, 옷을 입고 누리는 자유에서만큼은 가볍고 과감하다. 겨울을 맞이하며 여름의 옷가지를 정리하다 옷장을 가득 채운 서머 드레스에 눈길이 머물렀다. 가볍고 부드럽게 몸에 감기는, 한 겹씩 떨어지는 꽃잎 같은 것들.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누드 톤의 긴 드레스는 가슴과 어깨만 감싸고 배와 등을 얼굴처럼 내민다. 다시 허리와 엉덩이를 감았다가 발등까지 떨어진다.

나도 ‘남의 눈’ 대신 ‘내 느낌’대로… 엄마처럼

벗을 수 없음은 분노였고 갈망이었다가 관능의 가면을 썼다. 다 보이지 않음으로 더 벗어버리는 일, 시선을 가로질러버리는 일. 당신들의 눈빛을 내가 먼저 가지고 놀다가 무심하게 지나가버리는 일. 내가 한때 엄마가 사는 삶이라고 믿었던 그 빛의 궤적. 불현듯 옷을 벗고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본다. 남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일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어도 삶을 그곳에 묶어두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내 모습은 대체로, 결점투성이의 살과 뼈의 조합이다. 나는 대신 감촉으로 나를 본다. 느낀다. 이런 감각을 가르쳐준 건 어쩌면 오래전의 다락방과 아름다웠던 엄마와 그때의 바람과 햇살과, 갑작스레 비를 퍼붓던 가르쳐준 습기 찬 구름들 덕택이다.

이서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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