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의 편지-이름에 담겨 있는 그 사람의 사연 [만화로 본 세상]

2018. 12. 12.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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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의 편지〉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이름은 단순히 한 사람을 부르는 명칭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을 둘러싼 관계와 사건들마저 포괄한다.

얼마 전 대만의 백색 테러 역사기념관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대만은 1945년 일본이 철수한 이후, 30여년간 계엄령이 선포된 시기를 지내면서 정치사상이 다른 이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살해하는 백색 테러를 겪어 왔다. 각각의 기념관에는 억울하게 살해되거나 다친 이들의 이름이 벽면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특히 뤼다오 인권기념관에 새겨진 이름은 약 8600개로, 1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곳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하거나 오랜 세월 감금되었다.

조현아 작가의 만화 <연의 편지>의 한 장면 | 네이버웹툰

이 벽면을 가득 채운 이름들은 그저 누군가를 부르는 호칭이기만 한 걸까. 이 물음에 이르자 최근 네이버 웹툰에서 인기리에 연재된 단편만화 〈연의 편지〉가 떠올랐다. 〈연의 편지〉에서는 이름을 중요한 소재로 다룬다. 주인공 ‘이소리’는 전학 온 학교의 책상서랍 속에서 누군가의 편지를 발견하는데, 편지 안에는 다음 편지를 찾아보라는 힌트와 함께 같은 학급 친구들의 이름, 학교에서 일하는 분들의 이름, 학교 안의 꽃과 나무 이름 등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소리는 계속해서 편지를 따라 다음 편지를 찾아내면서 여러 이름을 익히고 학교의 숨겨진 공간들을 발견하면서 새로운 학교에 점차 적응할 수 있게 된다. 소리는 자신을 ‘전학생’이라고 부르는 친구에게 “고마워, 수경아”라고 대답하고, 학생들이 ‘마녀’라며 기피하는 학교의 경비에게 ‘김순이 기사님’이라고 이름을 부르며 인사한다. 소리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곧 관계가 맺어지는 시작점이 된다.

소리가 호연의 편지를 찾는 여정에는 같은 학교 친구인 동순도 합류한다. 동순은 호연이 전학 가기 전 호연과 친하게 지낸 친구다. 호연은 동순이 괴로워할 때 묵묵히 동순의 곁을 지켜주면서 그와 시간을 함께 보내곤 했다. 동순은 호연과 함께 지내면서 동순의 이름을 ‘똥순’이라고 부르던 아이들과 용기내어 절연하고, 학교 안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을 때도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나 소리는 정작 편지를 쓴 당사자 정호연을 찾지 못한다. 순이 기사님으로부터 호연의 이름을 알아냈지만, 정작 호연은 소리가 전학 오기 전에 이민을 떠난 학생이었다. 소리는 편지를 찾아내면서 호연이 자신에게 이러한 편지를 남긴 이유가 무엇인지를 함께 탐색하다가 마침내 호연을 발견해낸다. 그렇게 발견된 호연은 글자뿐이었던 이름 ‘정호연’이 아니라 호연이 가졌던 과거와 그 과거 속에 맺어진 관계들 안에서 비로소 한 사람의 ‘정호연’으로서 드러난다.

〈연의 편지〉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이름은 단순히 한 사람을 부르는 명칭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을 둘러싼 관계와 사건들마저 포괄한다. 뤼다오 수용소에 10여년을 갇혀 있었던 프레드 첸(Fred Chen)은 대만으로 유학 온 말레이시아 사람이었는데, 수감된 그를 보기 위해 프레드의 어머니가 말도 통하지 않는 먼 이국의 땅으로, 또 그 땅에서 한 시간 넘게 배를 타야 하는 뤼다오로 방문했다고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벽면에 새겨진 프레드의 이름은 비단 프레드라는 이름을 가진 이의 삶뿐만 아니라 프레드를 걱정하고 그리워하는 가족들과 친구들까지도 포괄하는 애도의 장치다.

대만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이름이 있다. 억울하게 죽은 이름들, 여전히 아픈 이름들, 고통받는 이름들. 우리 사회는 이 이름들을 어떤 방식으로 나눠 가질 수 있을까.

조경숙 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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