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과 개-초토화된 세상, 인간성 파괴는 어디까지 [장르물 전성시대]

2018. 12. 5.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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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나락으로 몰리면 과연 어디까지 추락할까? 〈소년과 개〉는 주인공에 대한 호불호와 별개로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지 새삼 자문하게 한다.

할란 엘리슨의 단편 <소년과 개> 원작을 영화화한 동명의 영화 한 장면. | LQ/JAF Productions

사람은 무엇을 얻기 위해 살까? 부나 명예? 아니면 사랑? 권력? 답은 개인마다 다르리라.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게 있다. 애초 어떤 답을 떠올렸건 간에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상황이라도 그 답이 변치 않고 유효할까? 할란 엘리슨(Harlan Ellison)의 단편 〈소년과 개·A Boy and His Dog〉(1969)는 바로 이러한 물음 아래 ‘산다는 것’의 의미를 되돌아본다. 전면 핵전쟁으로 지상의 거의 모든 게 초토화된 세상, 생존자들은 얼마 남지 않은 자원을 서로 먼저 손에 넣어 목숨을 부지하고자 저마다 패거리 지어 쟁탈전을 벌인다. 도시 폐허 곳곳을 뒤지며 그날그날 연명하는 15세 떠돌이 소년 ‘빅’은 그나마 패거리에도 끼지 못해 언제 돌림빵당할지 모르는 처지. 지금까지 그가 버틴 건 강력한 이빨과 생존에 긴요한 지혜를 제공하는 텔레파시 개 ‘블러드’ 덕이다. (이 소설에서 일부 개들은 유전공학과 IT기술이 접목되어 지능이 인간 못지않고 인간과 텔레파시로 소통한다.)

소년과 개의 유대는 어느 날 소녀가 나타나며 삐걱대기 시작한다. 10대 소녀 ‘퀼라’는 말로만 듣던 지하세계 출신이다. 모든 게 끝장나기 전 상류층 인사들은 지하도시를 세워 안전하게 몸을 숨겼던 것이다. 그곳에는 여자들도 많단다. 대도시 치고 핵폭탄 맞지 않은 곳이 드무니 지상의 민간인들은 벙커 안에 몸을 피한 군인들보다 피해가 컸다. 그러니 빅에게 여자 구경은 하늘의 별 따기다. 어쩌다 만나도 방사능후유증에 시달리는 기형이 아니면 다행이다. 무너진 마트 구석에서 뭔가 먹을 만한 걸 챙기자면 다른 자들을 따돌리거나 죽여야 하는 가혹한 환경에서 심성이 모질게 다져진 빅이지만 잔존문명 세계에서 온 예쁘장한 퀼라에게 홀딱 반한다. 소년은 시도 때도 없이 소녀와 섹스한다. 그러나 알고 보니 퀼라는 자기 말대로 평온한 지하도시에서 부모 잔소리에 질려 잠시 바람 쐬러 나온 철부지가 아니었다. 실은 빅 같은 지상의 혈기왕성한 남자들을 지하세계로 유인하려는 미인계에 동원된 하수인이었다. 지하도시 위정자들이 변화 없는 지하도시의 안온한 삶에 자꾸만 무기력해지는 남성들의 유전인자를 개선할 대안으로 거친 야생마나 다름없는 빅을 일종의 종마(種馬)로 삼아 자기네 여성들에게 씨를 뿌리도록 획책한 것이다.

결국 빅은 지하도시의 포로가 되나 어느덧 그에게 끌린 퀼라의 도움으로 탈출한다. 그러나 다시 만난 빅과 블러드는 반가울 새도 없이 불청객 퀼라 탓에 관계가 악화된다. 위기에 빠진 빅을 구하다 심한 부상을 입은 블러드는 당장 먹을 게 없으면 곧 죽을 판이다. 주위에는 쌀 한 톨도 없다. 블러드는 자신과 빅의 오랜 동지관계를 새삼 상기시키며 빅에게 결단을 요구한다. 빅은 퀼라를 죽여 블러드에게 먹인다.

이러한 결말은 발표 당시 미국에서도 큰 논란을 낳았다. 인간이 나락으로 몰리면 과연 어디까지 추락할까?

〈소년과 개〉는 주인공에 대한 호불호와 별개로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지 새삼 자문하게 한다. 정말 나쁜 인간은 소년이 아니라 살풍경한 대재앙의 세계를 초래한 강대국 우두머리들이 아닐까? 인간이 인간다운 위엄을 고수하려면 제풀에 빠질 불행한 덫을 애초에 만들지 말았어야 하지 않을까? 이 단편은 작가가 30년 이상 써온 장편의 일부로 영화와 만화로도 만들어졌다. (이 단편은 2017년 아작에서 펴낸 할란 엘리슨 선집 1권 〈제프티는 다섯 살〉에 실렸다.)

고장원 SF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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