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의 크고 작은 사건들은 술꾼들 앞에 어떤 칵테일을 내놓을까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경향신문] 우리가 누리는 라이프스타일은 모두 지난 역사의 결과물이다. 그중에서도 음식과 술의 발전은 역사적 사건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왔다. 와인이나 사케처럼 오래된 음료에 비해 칵테일에는 당대의 이미지가 다분하지만, 세련된 혼합주 또한 20세기 세계사의 굴곡을 통해 완성되었다.

칵테일의 기원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인류의 유서 깊고 놀라운 발명품들이 대체로 그렇듯, 그 유래에 대한 추측만 있을 뿐이다. 최초의 칵테일은 원시적인 와인의 거친 맛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물이나 과즙을 섞어 마신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로마에서는 포도주에 맑은 물을 탔고 인도에서는 약 2000여년 전 펀치라는 칵테일을 마시기 시작했다.

칵테일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1900년대 초, 와인 업계의 위기가 칵테일의 발전을 불렀다. 포도나무 뿌리를 갉아 먹는 진딧물 필록세라의 출현으로 유럽 전역의 포도밭이 황폐화되었고, 한창 유행하던 브랜디나 코냑 생산량이 급감했다. 대체품을 요구하는 술꾼들을 위해 위스키 시장이 활성화되었고, 낯선 풍미의 독주를 베이스로 삼은 칵테일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한계와 위기로부터 새로운 문화가 성장한 셈이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1920년대 미국에 금주령이 내려지며 대도시에서는 불법 증류소들이 성행했다. ‘후치’라 불리던 밀주의 형편없는 술맛을 감추기 위해, 사람들은 술에 다양한 재료를 섞어 마시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금주령으로 인한 많은 사회 문제가 등장했다. 고급 술을 밀수해 폭리를 취하던 마피아가 거대 조직으로 성장했고, 정치적으로도 부패가 심했다. 험악한 사회 분위기와 실직에 좌절한 미국 바텐더들이 유럽으로 진출한 덕에, 프랑스와 런던의 칵테일 문화가 한층 진보하기도 했다.
1933년 금주법이 폐지되자 ‘술과 와인의 나날’이 찾아왔다. 1940년대에는 재즈와 춤, 우아한 분위기를 갖춘 무허가 술집들이 난립했다. 세계적으로도 다채로운 스피릿의 황금기가 열렸다. 영국에서는 저녁 식사 전 즐기는 칵테일 파티가 유행했고, 쿠바에서 데킬라와 모히토가 등장했다. 열대병을 막는 일종의 약으로 진토닉이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195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술의 소비량이 주춤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 냉장고가 보급되며 얼음을 사용한 칵테일이 사랑받기 시작했다. 전후의 활기찬 분위기에 힘입어 숙성할 필요 없이 빠르게 생산할 수 있는 독주들이 인기를 얻으며 보드카가 한 시대를 풍미했다.
1970년대에는 부풀린 아프로헤어와 반짝이는 스팽글 의상처럼 화려한 칵테일이 대세였다. 1970년대 바텐더들은 싸구려 술을 섞어 매력적인 결과물을 내놓았다. 과일 주스와 우유, 크림 등을 사용해 선명한 색깔을 내는 한편 거품이나 미니어처 우산 등으로 잔을 장식했다. 1980년대는 칵테일의 ‘대량 생산’이 정착된 시대다. 이즈음 등장한 대형 패밀리 레스토랑들은 모든 매장에서 같은 풍미를 내기 위해 칵테일 제조법의 매뉴얼을 개발했다. 1988년 톰 크루즈가 주연한 <칵테일>이 폭발적 인기를 누리자, 독주와 다양한 음료의 혼합물은 세계적인 트렌드가 되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는 양적 팽창보다 질적 성장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런던을 중심으로 고급 칵테일 문화가 발전하며 다양한 실험이 이뤄졌다. 시판되는 주스 대신 즉석에서 짠 과일즙과 신선한 허브, 향신료를 활용하기 시작한 것도 21세기 이후의 변화였다. 음식과 술의 유행은 언제나 그 변화의 궤도를 함께했다. 신선한 재료로 만든 칵테일이 ‘유기농’ 열풍의 여파였다면, 2000년대 초반 분자 요리의 방법론 또한 칵테일의 상상력을 한껏 자극했다. 큐브 얼음 모양 젤리 안에 넣은 진토닉이나 시가 향을 술에 불어넣은 럼 칵테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20세기 초 밀주 시대 칵테일의 잊힌 제조법을 복원하려는 노력 또한 ‘크래프트 칵테일’이라는 이름 아래 진행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사건들 또한 새로운 칵테일이 출현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시대를 돌아보며 새로운 술의 출현을 이야기할 미래가 있을 것이다. 그 미래의 술꾼 앞에 놓여 있을 칵테일은 어떤 맛일지 문득 궁금해진다.
정미환|오디너리 매거진 부편집장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극우의 아전인수식 ‘지귀연 판결문’ 사용법
- “출신학교 쓰지 마라”…채용시장 뒤흔드는 ‘학벌 차별 금지법’ 논쟁
- 음주운전 사고 내고 달아나다 아들 귀가시키던 아버지 숨지게 한 50대 징역 6년
- 이 대통령,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에 ‘PK’ 임기택·황종우 압축
- 주한 러시아대사관 건물에 ‘승리는 우리의 것’ 현수막 논란…우크라이나 등 겨냥했나
- [단독]김민석 ‘인천 계양을’ K국정설명회에 김남준 참석…송영길과 맞대면 이뤄지나
- 강원 고성 토성면 산불 주불 진화…한때 인근 주민 대피령
- 식료품 7개 시켰더니 택배상자가 4개?···환경단체 “제도 공백 속 과대포장 반복” 지적
- ‘금액만 254조’ 전례없는 최고난도 환불···상호관세 돌려받으려면 “5년 동안 법정 싸움”
- 윤석열 무기징역형에도…국민의힘, 윤어게인 ‘풀액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