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GOUT Interview] 심수창
지난 8월 29일 한화 이글스가 ‘베테랑 투수’ 심수창의 웨이버 공시를 알렸다. 이 소식에 팬들은 ‘왜’라는 물음을 내놓았다. 심수창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유니폼이더라도 그라운드에 다시 선 심수창의 모습을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그에게 주어진 이동시간이 마감됐다. 하지만 잠시 쉬어가는 타이밍일 뿐, 그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더 강한 무기를 장착해 건강한 모습으로 팬들 앞에 설 것을 약속했다. (본 인터뷰는 10월 8일에 진행 됐다)
Photographer 황미노 Editor 표권향 Location 대단한미디어
가슴을 치지만, 어쩔 수 없었던 결정
2016년 FA로 한화에 둥지를 튼 심수창. 3경기로 그쳤던 올해를 제외한 지난 2시즌 동안 114경기에 등판해 170.1이닝을 소화하며 3,028개의 공을 던졌다. 이는 선발로 나선 윤규진, 장민재, 이태양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투구 수다. 혹사논란의 주인공이었던 송창식보다 0.2이닝 모자랐으며 투구 수는 같았다. 한마디로 팀을 위해 희생했다는 소리다.
하지만 올 시즌 심수창의 1군 경기는 3번에 그쳤다. 3월 NC 다이노스전에서 2차례 올라 총 1.2이닝 동안 홈런 2개를 허용한 것이 발목을 잡았다. 2군으로 강등된 후 다시 볼 수 없었다. 그에게 기회는 단 3경기 2.1이닝에 불과했다.
그런데 의아한 건 2군에서 그의 모습이 좋았다는 것이다. 1군 복귀를 목표로 구슬땀을 흘린 5개월 동안 퓨처스리그 31경기에서 35.1이닝을 소화하며 36개 삼진을 잡아냈고, 평균자책점 3.57과 1승 2패 18세이브를 달성했다. 당시 심수창은 퓨처스리그에서 세이브 부문 1위를 하며 강력한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팬들은 심수창의 웨이버 공시에 대한 의구심이 커져만 갔다.
그날 이후 심수창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려고 제주도로 혼자 여행을 다녀왔다. 그곳에 지인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다녀온 후에는 그동안 못 했던 것들을 하나씩 실천으로 옮겼다. 그 첫 번째가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사람을 만나는 자리가 꺼려졌지만, 동창들을 만나는 건 좋았다. 동창 모두가 “왜 그런 선택을 했어”라고 묻겠지만, 이곳 생활을 잘 아는 야구쟁이들의 걱정은 진심이 담긴 위로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선수들에게도 수십 통의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스스로 결정한 일이기에 번복할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소식을 전해 많은 이들이 놀랐다. 주변 반응이 어땠는가.
100명이 연락 왔다면 99명은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아직까지 어린 선수들과 충분히 경쟁할 수 있는데 기회가 오지 않았다. 베테랑으로서 감수해야 하는 것이지만, 남들보다 기회가 별로 없긴 했다. 어린 선수들보다 월등히 좋았어야 했나 보다. 시즌 초반 2이닝 기회를 못 살려서 그 이후부터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래서 후회가 남는다.
당시 퓨처스리그 세이브 부문 1위였다. 그런데 왜 이런 결정을 했는가.
2군에 내려가서 잘하면 다시 올라올 수 있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했다. 솔직히 2군 경기지만, 1군 경기 못지않게 집중해서 던졌고 절실했다. 하지만 1군 콜업 통보는 오지 않았다. 2군 성적도 좋고 공도 괜찮았다. 구속도 145~146km/h가 나왔다. 그래도 기회가 오지 않는 것을 보고 어린 선수들에게 기회가 많이 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때 ‘지금 계약 기간이 1년 남았는데 그 1년 안에 내가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팀으로 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구단에 얘기했다. 하지만 내 의도와 다르게 이 모습이 안 좋게 비춰졌다.
뜻대로 되지 않아 더 답답했겠다.
2군에서 최고참이었다. 꾀도 부릴 수 있고 연습도 쉬엄쉬엄할 수 있는데, 어린 선수들과 똑같이 모든 스케줄을 소화했다. 원정 경기 역시 한 번도 안 빠졌다. 지방이면 지방, 힘든 곳까지 다 갔는데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리고서 2군에 있는 (박)정진이 형 같은 고참들과 상담을 했다. 마지막에는 내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했다.
짐 정리를 하러 서산 2군 구장에서 대전에 있는 집으로 가던 길이 걱정된다.
아무래도 복잡했다. 한화에서 2년간 170이닝 이상을 던졌는데 그런 건 아무도 안 알아줬다…. 팀을 위해, 이기기 위해 열심히 했는데 전화 한 통화로 끝난다는 것이 그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본인이 원했던 방향은 무엇인가.
솔직히 기회는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찬스가 내게는 오지 않았다. 1군 개막하고 홈런을 2개 맞고 2군으로 내려갔다. 그건 내가 못했고, 첫 번째 기회를 날렸으니까 합당한 일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는 나도 노력하면 남들과 똑같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구단 기조에 맞지 않았다. 내가 제일 잘 느꼈기에 구단에 찾아가서 말했다.
원하는 구단이 있었는가.
그런 건 없다. 다만 내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팀이 있을까 싶어 풀어달라고 구단에 요청한 것이다. 2군도 쉽지 않고, 모든 선수가 열심히 하는 리그다. 그곳에서 세이브 1위를 하며 잘하고 있었기에 답답했다. 언제 올지 모르는 기회를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물론 한 달 기다리고 떼쓰는 게 아니다.
선수가 아닌 코치로서의 제안은 없었는가.
그렇다. 그리고 만약 내게 코치 제안이 왔어도 지금 당장은 그럴 생각이 없다. 아파서 그만두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군에서 충분한 기회를 얻었음에도 안 되겠다 싶었으면 스스로 지도자에 대한 생각을 할 텐데, 1년에 2이닝으로 끝났다. 이런 점이 아쉬워서 더 해보고 싶었다.
만약 다음 시즌에 현역으로 복귀하게 된다면 39세다. 흔히 말하는 노장 선수인데, 본인이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선발로 나섰을 때와 중간으로 등판했을 때의 구질이 조금 달랐다. 중간에서 던질 때 다양한 구질을 던지려고 했다. 야구를 하면서 한 보직으로만 던진 건 지난 시즌이 처음이다. 그전에는 왔다 갔다 해서 정체성을 몰랐는데 작년에 해보면서 루틴이 생겼다.
현재 선수 생활의 연장을 원하고 있다. 다음 시즌을 준비해야 한다.
정규리그가 다 끝났다. 남들보다 한 달 정도 먼저 끝냈다고 생각한다.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운동하고 몸 만들고 공 던지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다.
웃음 뒤에 숨겨진 눈물
오래전부터 심수창의 공은 완급조절이 수준급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46km/h의 직구와 지저분한 투심, 주 무기인 체인지업에 꺾이는 각도가 예술인 슬라이더까지 장착했다. 빠른 직구를 바깥쪽으로 붙인 뒤 체인지업을 몸 쪽으로 붙여 상대 타자로부터 헛스윙을 유도해낸다. 상하좌우 곳곳을 찌르는 제구력은 타고난 어깨가 한 몫 거들었다.
그의 명성은 메이저리그까지 퍼졌다. 배명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 보스턴 레드삭스로부터 입단 제안을 받았다. 당시 제시액은 80만 달러의 거금이었다. 하지만 거절했다. 프로야구가 좋았기 때문이다. 심수창은 “프로야구는 상상만 해도 즐겁다. 꿈의 무대다”라며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웃음이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무리하게 투구폼을 수정하다가 블래스 신드롬에 걸리고 말았다. 공을 10m도 못 던져 어쩔 수 없이 타자로 전향했다. 하지만 투수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노력의 첫 번째 평가는 한양대 시절 2004 아테네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팀에 유일한 아마추어 선수로 합류한 것이다.
그렇게 한 단계씩 목표를 이뤄나갔다. 마침내 꿈의 무대인 프로야구 구단에 입단했다. 2006시즌 10승을 달성하는 등 당시 토종 선발진에서 유일하게 ‘믿을맨’으로 활약했다. 2009시즌에는 6승에 그쳤지만, 봉중근과 함께 LG 트윈스의 원투펀치로 불렸다.
지금 돌이켜보면 메이저리그에 가지 않은 것이 후회될 것 같은데….
후회는 없다. 메이저리그는 정말 대 선수들이 가는 곳이다. 그저 프로야구가 좋았다. 어렸을 때 LG의 팬이었다. 내가 원하는 LG에 가고 싶었다. 우리나라 팬들에게 사랑받고 싶었기에 한국에 있고 싶은 마음이 컸다.
졸업 후 원하던 LG에 입단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지명 순위가 낮았다.
블래스 신드롬에 걸려서 고등학교 때는 타자로 지명 받았다. 미련이 남아 대학교에 가서 다시 투수를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졸업 후 좋은 계약금을 받고 들어갔다. 꼴등으로 들어갔다가 졸업할 때는 1등으로 나와 뿌듯했다.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았다는 것에 기분이 좋았다.
LG에서 토종선발로서 찬란했던 순간을 보냈다.
그땐 너무 어려서 대단한 일인지도 몰랐다. ‘이거 10승 한 건가? 그런 거구나…’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때 더욱 정신 차렸어야 했는데 그냥 흘러가는 대로 가다 보니 절실함이 떨어졌다. 10승을 하는 것이 대단한 것인지도 몰랐다.
심수창 하면 ‘불운의 아이콘’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18연패는 평생 따라붙을 것 같다. (웃음) 내가 이기고 싶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다. 당시 18연패 동안 승리 투수 요건을 갖추고 내려갔는데 승리가 날아간 적도 많다. 그렇게까지 연패가 이어질 줄은 몰랐다. 그때부터 심리적으로 쫓겼다. 하지만 하늘의 뜻이 그런 것인데, 나가는 경기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넥센 히어로즈로 이적 후 두 번째 선발 등판에서 786일 만에 선발승을 따냈다. 당시 마무리 손승락 등 넥센 선수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심수창의 승리를 지켰다. 그날 많이 울던데….
울려고 운 건 아니다. 안 좋은 상황에서 트레이드가 됐고, 가자마자 2경기 만에 승리를 얻으니까… 가슴에 응어리가 있었나 보다. 꽉 막힌 하수구가 뚫린 느낌? 가슴 한구석이 꽉꽉 막히고 답답했는데 그날 이후로는 ‘아… 이제 좀 리셋이 되는구나, 이런 꼬리표가 없어지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어 살이 많이 빠졌었다. 스트레스란 스트레스는 진짜 다 받았던 것 같다.
연패 탈출 이후에도 순탄하지만 않았다. 2013년 11월 가고시마 마무리 훈련 중 2차 드래프트로 롯데 자이언츠행이 결정됐다.
한 번 겪어 보니까 아무렇지도 않더라. 마침 마무리 훈련을 갔는데 넥센과 롯데의 숙소가 가까웠다. 쉬는 날 시내에 뭐 먹으러 나가서 롯데 선수들을 만나면 ‘어, 안녕!’하고 인사했는데 갑자기 짐을 빼서 그쪽 호텔로 가라고 하니까 기분이 되게 이상했다. 해외에서 팀과 호텔을 모두 옮긴 건 내가 최초일 것이다. (웃음)
그래도 롯데에서는 성적이 좋았다.
롯데 선수들이 워낙 잘해줬다. 처음에는 아는 사람이 없고 연고지도 아니기 때문에 적응을 못 했다. 집에 가면 TV만 보고, 음악만 듣고 있었다. 그런데 (송)승준이 형이랑 (강)민호가 많이 챙겨줘서 점점 적응할 수 있었다. 좋은 기억이 많다.
본인이 평가하는 심수창의 통산 14시즌은 어떤가.
야구를 썩 잘하지는 못했다. 커리어하이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프로에서 FA 할 때까지 버틴 사람이 몇 있겠는가. FA라는 것을 이루었을 땐 야구선수로서의 꿈을 이룬 것과 같았다.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나머지는 보직에 상관없이 다 해봤다. 성적을 떠나 야구 하나만 생각하며 생각했던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
‘잠시만 안녕’이라고 인사하지만….
사실 실력보다 외모가 더 화제였던 선수다. LG 시절에는 이대형과 함께 묶여 ‘LG는 선수를 얼굴로 뽑는다’는 말도 들었다. 일본 잡지에도 소개가 됐을 정도로 ‘잘생긴 운동선수’를 소개하는 글에는 마흔을 앞둔 나이에도 꼭 등장하고 있다. 잘생겼다는 말에 기분 나빠할 사람은 없지만, 심수창에게는 은근히 스트레스였다. 성적과 외모가 비교 대상이었기에 남모를 스트레스가 있었다.
성적보다 외모 얘기가 많지 않은가.
그것 때문에 피해를 봤다고 생각한다. 잘생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조금만 못해도 기사가 나오니까 스트레스를 받았다. 다른 선수들처럼 성적으로만 얘기할 수 있는 것도 나는 더 크게 화제가 돼버리니 안 좋았다.
지난해 한화가 첫 시리즈 스윕을 기념해 제작한 ‘독깨비-독수리여 깨어나라 비상하라’에 주인공 ‘독깨비’로 출연했다. 연기자로 데뷔하는 건 아니냐는 농담이 있었다.
아니 그건 말도 안 되고! 얼떨결에 찍었는데 연기하는 것이 참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그때 (윤)규진이 때문에 웃음이 너무 나서 힘들었다. (웃음) 야구를 할 땐 야구만 생각하는 것이 정답인 것 같다. 고참이 되면서 은퇴 후에 장사해볼까 등 이것저것 다른 생각을 하는 순간 야구가 잘 안됐다. 많은 나이에 야구만 생각하기에는 어렵지만, 야구를 할 때만큼은 야구만 생각하는 것이 정답이다.
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좋은 동료들을 많이 만났기에 지난 시간이 후회로만 남진 않을 것 같다.
승락이…. 동생이지만 때론 선배처럼 조언해준다. 지금까지도 심적으로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승준이 형과 (김)사율이 형은 롯데에 있을 때 잘 챙겨주고 적응할 수 있게 도와줬다. 그만뒀지만 전 LG의 장진용 선수 등 여러 선수가 나한테 참 고마운 존재들이다. 한화에서는 (김)태균이, (정)우람이, (안)영명이, (송)창식이, 정진이 형이 잘 해줬고 도움을 받았다.
안 그래도 개인 SNS에 화관을 씌운 배영수, 박정진, 정우람과 찍은 사진을 올렸다.
팀에서 나온 뒤 아무 표현도 안 하고 있었다. 한화 팬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괜히 티를 내서 수고했다는 말을 듣기는 싫었다. 시간이 지나고 아무 생각 없이 잊혔을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올렸다.
여기에서 해시태그로 ‘숨어있는 1인’은 본인을 가리키는 것인가.
못 봤어? 따로 숨어있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눈만 이렇게 나온 사람! 태균이가 거기 숨어있다. (웃음)
가만히 보면 혼자 삭이는 모습이 많다. 아닌 척, 괜찮은 척하며 속으로 앓는다. 마음도 약해서 눈물도 많다.
인정! 혼자 삭이다가 누가 봐도 이건 아닌 것 같다 하면 그때 행동으로 옮긴다. 참고 참고 계속 참는다. 도가 지나치다고 판단되면 그때 행동으로 움직인다.
한화가 11년 만에 포스트시즌을 치렀다. 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한다는 점에 아쉬움이 클 것 같다.
‘아, 내가 저기에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은 하지만, 아쉬움은 없다. 잘 됐다는 생각뿐이다. 어린 선수들을 중심으로 육성 기조에 잘 맞춰서 모든 선수가 잘 해줬다. 응원할 것이다.
팬들은 심수창이 다시 복귀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팬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야구 인생에서 언제나 몸 사리지 않고 해왔듯, 나를 원하는 구단이 있다면 몸 사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다. 팬들에게 다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그 팀에 헌신하고 싶다. 아팠다면 이런 생각이 안 들었을 텐데, 몸도 멀쩡하고 공도 좋았기에 다시 팬들 앞에 서는 상상을 하고 있다. 꼭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원하는 구단이 없다고 하면 내 야구 인연이 여기까지라고 인정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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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 프로야구는 육성을 앞세우며 ‘베테랑’ 선수들을 정리하고 있다. 팀을 위해 헌신한 시간을 잊은 채 고려장하듯 골방 늙은이 취급을 하고 있다. 야구에서도 선발과 마무리 투수 사이에 중간계투가 있다. 선수단을 꾸리는 데 있어서 중간을 절충하여 신구조화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인터뷰 이후 반가운 이야기가 들려왔다. 23일 LG가 심수창과 계약을 하며, 그가 2011년 트레이드 이후 7년 만에 고향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선수로서 마지막 결승선을 향해 달려가는 그에게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있을까. 그의 투구를 그리워했던 팬들도 마운드에서 심수창을 다시 한번 더 연호할 수 있다. 아픔을 겪었던 2018시즌을 넘어 2019년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심수창의 역투를 기대해본다.
위 기사는 대단한미디어에서 발행하는 더그아웃 매거진 2018년 11월호(91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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