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고급 아파트 살아도, 89세 할머니는 상한 통조림 먹었다

홍준기 기자 2018. 11. 20.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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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실종 1만명] [中] 부족한 치매환자 관리 인프라
노인 10명 중 1명 치매앓는 시대
정부 돌봄 인력·시설 확충 더뎌 독거노인 등 관리 사각지대 놓여

겉으로만 보면 전모(89) 할머니는 멀쩡했다. 한강이 보이는 고급 아파트에 살았고, 당장 쓸 돈이 없는 것 같지도 않았다. 치매 때문에 때로 흐릿하긴 했지만 입성도 깔끔하고 혼자 힘으로 정기적으로 복지관에도 나왔다. 4년 전 복지관 사회복지사가 담당 노인들을 가가호호 방문하던 차에 할머니 집 벨을 눌렀다가 충격을 받았다. 냉장고에 썩은 과일과 유통기한 지난 인스턴트식품이 꽉 차 있었다. "할머니가 내온 복숭아에서 악취가 났어요. 함께 가져온 주스 병을 보니 유통기한이 4년 지나 있었고요. 부엌엔 설거지 안 한 그릇이 쌓여 있고 집 한쪽엔 쓰레기 더미가 수북했어요."(허정훈·당시 사회복지사·28)

동물과 교감 나누는 치매환자들 - 지난 6일 오전 서울의 한 구청 치매안심센터에서 진행된‘동물교감 치유활동’에서 치매 환자들이 레트리버‘보리’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서울시는 이미 2007년부터 각 구청과 함께‘치매지원센터’를 운영하면서 치매 노인들이 지역사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지난해부터 치매 국가책임제가 도입되면서 이 기관들이 치매안심센터로 전환됐다. 정부는 서울시 모델을 전국으로 확대하려 하고 있지만 인력·시설 확충은 현장의 바람보다 더디다. /김지호 기자

흔히 치매 환자들을 보고 "아들도 못 알아보더라"는 말을 한다. 현실에선 가족 못 알아보는 것만 문제 되는 게 아니다. 전 할머니는 인지력과 판단력이 떨어져 상한 통조림을 먹고 살았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돈이 있어도 돈 쓰는 법을 잊어버렸다. 가족 없이 혼자 사는 처지라 아무도 옆에서 "이런 음식 잡수시면 큰일 난다"고 말리거나 챙겨주지 않았다.

치매 환자들의 '존엄성'이 흔들린다. 문재인 대통령이 '치매 국가책임제'를 들고 나왔지만 치매 환자 증가 속도에 비해 국가가 인력·시설을 확충하는 속도는 더디기 짝이 없다. 2017년 서울 강동구의 한 고시원에서 "웬 할아버지가 옷을 벗고 돌아다닌다"는 민원이 들어왔다. 83세 할아버지가 툭하면 옷을 훌훌 벗고 아무 곳에나 대소변을 봤다. 술을 마시고 길바닥에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했다. 치매 치료를 잊은 건 물론이고, 고혈압약 챙겨 먹는 것도 잊어버려서 건강이 계속 나빠졌다. 기초생활수급자라 월 50만~60만원씩 나라에서 나오는데, 그 돈을 간수하지도 못하고 자신을 위해 쓰지도 못했다. 할아버지가 주변 사람들을 불러모아 밥을 샀는데, 다 같이 술과 음식을 먹은 뒤 할아버지만 남겨놓고 일어서 버린 적도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분들을 사람답게 정중하게 돌볼 인프라가 아직도 너무 부실하다"고 했다. 올해 국내 치매 환자 수는 76만4000여 명으로 만 65세 이상 노인 인구 739만5000여 명의 10.3% 수준이다. 노인 10명 중 1명이 치매 환자인 셈이다. 이 중엔 '관리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이 많다. 예전처럼 가족이 함께 살며 치매 환자를 돌보기 어려워서다. 이동영 서울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치매는 조기에 발견해 치료를 받는 것이 중요한데 독거 노인이 늘어나서 제대로 관리가 안 될 수 있다"며 "앞으로 '치매 환자 노부부'가 한집에 사는 상황도 올 수 있다"고 했다.

정부는 전국에 256개의 치매안심센터를 만들어 치매 환자와 그 가족에게 치매 상담·검사를 제공하고, 치매 환자 쉼터·가족교실 등을 운영해 치매 환자 가족의 부양 부담도 덜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지난달 기준 치매안심센터 중 정식으로 개소한 곳은 78곳(30%)에 불과하다. 나머지 178곳은 시설·인력이 부족해 치매 선별 검사 등 기본적인 기능만 수행할 수 있다. 일종의 '임시 개업' '부분 개업'인데 이걸 정부는 '우선 개소'라고 부른다.

특히 전북 전주의 치매안심센터 같은 곳에서는 지난 8월 기준으로 직원 1명이 치매 환자 527명을 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국회 장정숙(바른미래당) 의원은 지난 국정감사에서 "직원 1명이 200명 이상을 맡고 있는 치매안심센터가 전국에 7곳이 된다"고 지적했다. 직원 수가 보건복지부가 제시한 필수 인력(7명)에 미치지 못하는 곳도 전국에 11곳 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도 "복지부가 대통령 핵심 공약인 치매안심센터 사업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돌봄 구조는 이미 '가족 책임→국가 책임'으로 바뀌었지만 가족은 이미 해체됐고, 국가 인프라는 아직 허술하기 때문에 결국 치매 환자가 공중에 붕 떠 있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손치근 한국치매협회 사무총장은 "치매안심센터 등 시설을 구축해 나가는 한편 지역사회의 이웃들이 치매 환자의 '보호자'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시스템을 잘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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