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지만 16장, 긴 지문.. '스피드 테스트'로 변질된 수능
수험생 "문제풀이 기계로 만들어"
올해 수능이 끝난 지 나흘이 지났지만 시험을 둘러싼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동서양 우주론과 만유인력·질점 등에 대한 국어 31번이 지나치게 어렵게 출제돼 수험생들을 당황하게 했는데, 이 문제가 수능 전반에 대한 논란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학 총장과 교육·입시 전문가들도 "수능의 킬러 문항(최고난도 문제)은 대학 수학 능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교육의 목적이 재수생 양산이냐"고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교육계는 "수능이 상위권 학생을 변별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나치게 어려운 문제를 출제하면서 교사들도 풀지 못하는 '괴물'이 되어버렸다"고 지적한다.
◇"국어가 아니라 스피드 평가"

19일 수능 출제 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이의신청 게시판에는 국어 31번에 대해 "국어 문제가 아니라 물리 문제였다" "무작위로 찍어 맞을 확률보다 정답률(18.3%·EBS 가채점)이 낮은 이런 문제는 내지 마라"는 글이 수십 건 올라왔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국어 31번과 같은 문제가 더 이상 출제되지 않게 해달라"는 의견부터 "수능 영어를 미국인이 출제하게 해달라" "수능을 아예 폐지시켜 달라"는 의견까지 올라왔다.
수능은 암기 위주의 지식 확인 시험이었던 학력고사를 대신해 대학에서 공부할 때 필요한 사고력을 측정하겠다는 취지에서 1994학년도에 처음 시행됐다. 그런데 갈수록 길고 어려운 지문이 출제돼 사고력 측정보다 '스피드 테스트' '기계식 문제 풀이'처럼 변질됐다고 수험생들은 말한다.
특히 국어가 문제다. 수험생들은 국어 시험지 16장을 80분 만에 읽고 45문제를 풀어야 한다. 문제당 평균 107초꼴이다. 실제론 최대 한 페이지에 달하는 긴 지문과 보기와 선지(1~5번)까지 읽어야 하고, 마지막에 답을 옮겨 적고 검토하는 시간도 있어야 한다. 이런 시간을 제외하면 한 문제를 50초 안에 풀어야 한다. 수학과 영어는 문제당 3분, 107초 만에 풀어야 한다. 이마저도 한 문제에 온전히 쓸 수 없다. 과목마다 3~4개씩 나오는 '킬러 문항'에 시간을 더 써야 하기 때문이다. 입시 전문가들은 "문제당 30초~1분 안에 답을 골라내야 한다"고 말한다.
한 수험생 학부모는 "애 학원 선생님이 '2점짜리 문제는 그냥 문제를 보자마자 답이 몇 초 안에 나와야 1등급 맞을 수 있다'고 가르치더라"면서 "결국 생각할 필요 없이 문제 보면 딱 바로 답이 나오는 기계 같은 애들을 만드는 게 지금의 수능 시험"이라고 했다.
◇"킬러 문항은 대학 수학 능력과 무관"
수능은 수험생의 상위 4%는 1등급, 4~7%는 2등급을 받는 '상대평가'다. 그 때문에 어느 정도 변별력을 갖춰야 동점자도 줄고 수능으로 대학들이 학생을 뽑을 수 있다. 아무리 이런 점을 감안해도 지나치게 어려운 문제를 짧은 시간에 풀라고 하는 것은 테스트의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 학생들을 고통에 빠뜨린다는 지적이 많다. 아주대 박형주 총장은 지난 8월 초 세계수학자대회에 가서 전 세계 수학자들에게 수능 수학 문제를 풀어보라고 건넸다. 여기저기서 'gosh'(어이쿠)라는 말이 나왔다. 외국 학자들은 "창의력보다는 기술적인 능력만 요하는 문제"라고 했다.
수능 영어 영역은 원어민들도 풀지 못한다. 수능 전날 한 유튜버가 영국의 영어 교사 5명에게 작년 수능 영어 문제 하나를 주면서 50초 안에 풀도록 했다. 대부분은 틀렸을 뿐 아니라 "여기 나오는 표현과 어휘를 누가 사용하느냐"고 비판했다. 작년엔 미국 시카고대와 서울대 대학원을 나온 미국인 방송인 타일러 라쉬가 "한국의 수능 영어는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부자연스러운 단어들을 쓴다"고 비판했다.
배상훈 성균관대 교수는 "소위 '킬러 문항'들은 실제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선 대학 수학 능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면서 "그런데도 정상적으로 고교 교육과정을 이수했다면 누구나 풀 수 있는 문제를 출제했다고 말한다면, 온 국민 우롱죄를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태중 중앙대 교육학과 교수는 "현재의 상대평가 수능 입시에서는 지금 같은 '변별을 위한 괴물 같은 문제'는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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