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갈치엔 있는데 노량진엔 없는 것

2018. 11. 18.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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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노량진 옛 시장 상인들 “분양 사기”…
일방적 전통시장 현대화가 뿌린 갈등의 씨앗

2015년 설 연휴를 앞둔 옛 노량진수산시장의 모습. 한겨레 강성광 기자

“새 시장에서 좋은 자리 못 차지하니까 옛 시장 불법 점유하고 장사하는 거다. 기득권 상인들의 ‘떼법’ 더 이상 안 통한다. 원칙대로 철거해서 본때를 보여줘라.”

최근 노량진수산시장 사태를 다룬 기사에 달린 한 베스트 댓글이다. 새 시장으로 이전을 거부하는 옛 시장 상인들의 반발을 불법·떼쓰기로 보는 시선이 담겨 있다. 노량진수산시장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 대부분이 같은 내용이다. 사업자인 수협이 명도(건물, 토지, 선박 등을 남에게 주거나 맡김)소송 끝에 올해 8월 대법원에서 이기고 옛 시장 상인들이 강제집행을 막아선 뒤로, 상인들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더욱 커지고 있다.

낯설지만 익숙한 풍경이다. 재개발, 전통시장 현대화 등 집단 이주를 동반하는 대규모 부동산 개발에서 마지막까지 버티는 사람은 ‘양보를 모르는 고집불통의 이기주의자’가 되곤 한다. 여기에 ‘불법’ 딱지가 추가된다. 사태가 장기화할수록 이들이 버티는 이유는 사라지고 갈등과 폭력이 부각된다.

상인들의 벼랑 끝 저항에는 사실 민주주의의 문제가 숨어 있다. 이해 관계자의 참여를 배제한 개발 사업이 갈 길을 가다 이제 마지막 역에 도착한 것이다. 상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진행됐던 부산 자갈치시장의 현대화 사업 성공 사례와 비교하면, 현재 노량진수산시장의 갈등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보인다.

수협 ‘합의했다’ vs 상인 ‘분양 사기’

수협이 2015년 상인 대표들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상인들에게 제공한 시장 현대화 사업 자료. 개별 상인들이 실제 입주 뒤 상황을 상상하기엔 정보가 부족한 설계 도면이다. 수협 제공

노량진수산시장 현대화 사업은 14년 전 첫 단추를 끼웠다. 2004년 김대중 정부 때 대통령 자문기구인 농어업·농어촌특별대책위원회가 시장 현대화 계획을 세웠다. 2005년 예비타당성을 조사했고, 2007년 해양수산부가 현재 새 시장이 있는 곳으로 시장 이전을 결정했다. 2012년 새 시장 건물 공사가 시작돼 2015년 완공됐고 2016년 개장했다.

상인 중에는 시장 현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합의는 없었다. 또한 현대화의 구체적인 내용을 설계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초기부터 정부와 수협이 상인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했다면, 새 시장의 모습은 달라졌을 것이다. 넓은 면적에 단층 구조인 옛 시장과 달리 새 시장은 부지 면적이 좁고 밀폐형이며 복층으로 설계됐다. 상인들은 옛 시장처럼 개방된 공간의 1층에서 장사하기를 원했다.

2009년 수협이 복층 건물 계획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자, 상인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수협은 한발 물러서 1층에 경매장과 점포를 배치하겠다며 상인 대표들과 양해각서를 썼다. 여기엔 건물의 세부 구조와 점포별 크기, 임대료 등 핵심적인 내용은 없었다. 당시 수협은 상인들에게 ‘수평 이동’을 해주겠다고 이야기했다. 일부 상인들은 이 말이 기존 시장의 구조, 점포 크기, 임대료 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장점만 추가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일종의 구두계약을 한 셈이다. 최근 노량진수산시장을 찾은 기자에게 한 상인은 “보험 약관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계약을 맺은 것 같다”고 말했다.

사업자인 수협은 상인들에게 정보를 충분히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2007년부터 워크숍 2회, 설명회 14회, 대책위원회11회, 국회의원 주관 토론회 1회, 국회 상임위원회 주관 간담회 1회 개최 등 수십차례의 각종 회의를 통해 시장 종사자들과 현대화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나누고 공감대를 형성하고 여러 이견에 대한 통일된 의견을 수렴하는 등 시장 종사자들과 충분한 의사소통을 거쳐 사업을 진행해왔습니다.”(수협, 2016년 1월, ‘노량진수산시장 현대화사업 바로 알기’)

하지만 설명회에서 일부 상인에게 제공된 정보는 이해하기 힘든 도면뿐이었다.

2015년 9월 건물이 거의 완공되고 나서야 상인들은 실제 건물 내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상과 다른 모습에 당황했다. 점포의 실사용 면적이 줄어든 점, 건물이 밀폐형인 점, 임대료가 2~3배 오른 점등 여러 문제를 제기하며 입주 거부 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상인들에게 주어진 길은 이사 아니면 퇴거밖에 없었다. 수협은 ‘시장 이전에 합의했으면서 왜 인제 와서 딴소리냐’고 했고, 상인들은 ‘분양 사기’라고 맞섰다. 수협은 옛 시장의 전기와 바닷물 공급을 끊고 무단 점거로 인해 생기는 피해액을 청구하겠다며 압박했고, 상인 상당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입주하게 됐다. 전체 상인의 20% 정도인 131개 점포 상인만이 아직도 옛 시장에 남았다.

상인 직접 참여한 자갈치시장 현대화는 달랐다

노량진수산시장 상인들은 자신들이 현대화 사업 추진 과정에서 소외되고 무시됐다고 느낀다. 이는 옛 시장에 남아 있든 새 시장으로 이전했든 마찬가지다. 최근 옛 시장을 방문한 기자에게 상인들은 하나같이 “인터뷰하기 싫다”고 했다. 상인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든, 언론에서 이 사건을 이권 다툼 프레임(틀)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 이전 과정의 비민주성이 이들의 싸움에 큰 이유인데도 이를 다루는 언론이 많지 않아 상인들은 억울해한다.

노량진수산시장의 갈등 원인을 분석한 논문은 국내에 딱 한 편 있다. 조은영 박사(경희대 행정학과 김광구 교수 연구실) 등이 2016년 12월 발표한 ‘전통시장 현대화 과정의 정책 네트워크 분석-자갈치시장과 노량진수산시장 비교분석을 중심으로’다. 부산 자갈치시장 현대화의 성공과 노량진수산시장 현대화의 실패를 비교분석했다.

자갈치시장은 노량진수산시장보다 약 10년 앞서 현대화 사업을 시작했다. 중간에 갈등도 있었지만 비교적 원만하게 마무리됐다. 논문은 자갈치와 노량진의 가장 큰 차이로 ‘이해 당사자의 참여’를 꼽았다.

결론의 한 대목이다.

“자갈치시장의 경우 상인 주도하에 의제를 형성하고 협의와 집행 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참여하면서 사업의 중요한 주체 역할을 했다. 반면 노량진수산시장의 경우 의제 형성은 정부가 시작했고, 사업의 진행 과정에서도 수협이 독단적으로 사업을 시행하는 모습이다. 이 과정에서 자원의 비대칭이 문제가 되었고 상인들은 사업 과정에 참여할 유인을 갖지 못했으며, 아직까지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조은영 박사는 상인들을 인터뷰하면서 차이를 확연히 느꼈다고 했다. “자갈치시장은 상인들이 현대화를 원해서 자발적으로 협의체를 구성했고 점포 위치 선정 등으로 갈등이 생겼을 때도 스스로 타협안을 찾으려고 했어요. 반면 노량진수산시장의 상인들은 딱히 현대화 사업을 원한다는 느낌을 못 받았습니다. 시장 상인을 위한 현대화라고 보기 힘들다는 생각도 듭니다.”

가락시장 갈등도 현재진행형

가락동 농수산물 도매시장(가락시장) 현대화도 상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추진된 사업이다. 서울시 농수산물공사(공사)가 주도했다. 지상의 옛 시장에서 채소·과일 등을 중도매(도매와 소매의 중간)로 팔던 상인들은 현대화된 건물의 지하 1층으로 들어가라는 공사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사가 안된다는 이유였다. 노량진수산시장처럼 상인과 사업자 간 갈등이 장기화됐다.

2017년 당시 중재에 힘썼던 김진철 전 더불어민주당 시의원은 “공사의 잘못이 컸다”고 말했다. “물류 속도를 높이는 등 도매시장 기능 현대화에 집중해야 했는데 엉뚱하게 건물만 현대화했어요. 상인들이 어떤 장사를 하는지 이해도 부족했고요. 시장 상인을 위하기보단 공사 직원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한 현대화 사업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 정도예요.”

서울시와 서울시의회의 중재 등으로 상인들은 현대화 건물 입주를 2년 6개월가량 유예받고 현재 대체 터에서 장사하고 있다. 타협안을 만들긴 했지만 사실 갈등을 뒤로 미룬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런 갈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집단 이주를 동반하는 대규모 개발 사업은 사업 결정 단계부터 이해 관계자의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박성율 목사(토지강제수용철폐 전국대책위)는 이렇게 말했다. “재개발·재건축·시장현대화 등을 추진할 때 도시계획위원회 몇 명이서 심의 절차를 거친 뒤 공익성이 있다며 사업 결정을 내려요. 한번 결정 고시가 나면 절대 뒤집을 수 없어요. 원주민의 삶을 개선하는 게 목적인데 실제 원주민의 의견은 거의 묻지 않아요. 저항하는 사람은 ‘공익’에 반대하는 게 되고요.”

전통시장을 현대화할 때는 더더욱 섬세하게 접근해야 한다. 조은영 박사는 문화체육관광부 ‘문전성시’ 사업단에서 27개 전통시장 활성화 사업을 진행하면서 이 사실을 깨달았다. “아파트 반상회를 생각해보세요. 반장이 한 동을 대표한다고는 하지만, 반장 얼굴도 모르고 지내는 사람이 많죠. 상인들은 더욱 파편화돼 있습니다. 상인회가 여러 개고 여기 속하지 않은 상인도 많습니다. 게다가 서로 이해관계가 달라 갈등도 있고요. 상인회 대표 몇 명과 이야기한 뒤 상인 전체 의견을 수렴했다고 하면 안 됩니다. 직접 찾아가서 이야기를 들어야 해요.”

‘진짜’ 전체 의견을 수렴하라

조 박사는 시장 현대화 사업 결정을 내리기 전부터 정부와 지자체가 상인들 간의 이해관계를 사전 조사하고 설명회를 충분히 하며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상인들도 내부적으로 의견을 통일하는 노력을 해야 협상력을 가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물론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실컷 사전 조사하고 이해 관계자를 설득했는데도 사업 반대 결정이 나오면 공무원 행정력 낭비라는 소리가 나오겠죠. 하지만 이제는 그걸 감수할 정도의 사회가 됐다고 저는 생각해요.”

변지민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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