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완상, 항일·쿠데타에 저항한 가족사를 고백하다 [원희복의 인물탐구]

글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사진 우철훈 선임기자 2018. 11. 18.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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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한완상 3.1운동 100주년 위원장.

그는 우리 사회에서 몇 안 되는 존경받는 원로로 통한다. 그는 세종로 정부청사가 낯설지 않다. 바로 이 건물에서 통일부총리(1993년)와 교육부총리(2001년)를 지냈기 때문이다. 그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3·1운동 100주년위원회) 한완상 위원장(82)이다. 3·1운동 100주년위원회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을 기념하는 각종 사업을 총괄하는 정부 차원의 기구다. 위원회가 추구하는 ‘기억·기념·발전·성찰·미래·희망’이라는 단어에는 우리 현대사 100년과 미래 100년이 함축돼 있다. 한 위원장은 알려지지 않은 가족사 얘기부터 꺼냈다.

“처남 박승헌은 학병 출신으로 만주에서 윤경빈·장준하·김준엽과 함께 탈주했다. 장준하의 <돌베개>에 나오는 P가 처남으로 초혼 주례를 백범이 섰다. 해방 후 그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실의에 빠져 잠시 술과 여자로 세월을 보낸 적이 있다. 그의 첫 아내는 처남이 다른 여성과 있는 현장을 보고 권총으로 자결했는데 백범이 김우전을 시켜 시신을 수습해 오도록 했다. 이후 처남은 국방경비대에 들어갔는데, 동기가 바로 박정희였다. 처남이 대령 헌병차감 시절 5·16 쿠데타가 났다. 그는 쿠데타군 서울 진입을 저지하다 체포됐다. 박정희가 처남에게 ‘나에게 협조하라’고 회유했다. 그때 처남은 ‘일제 만군 출신 쿠데타에 독립군 출신이 어찌 협조할 수 있겠나’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중경에서 백범 등과 함께 찍은 처남의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5·16 쿠데타를 거부한 처남은 이후 힘든 시기를 보냈다. 그는 “독립운동가는 3대가 망했다고 하는데, 절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사 100년을 부대끼며 살아온 우리 모두가 그렇겠지만 한 위원장의 가족사는 매우 슬프고도 또 극적이다.

한 위원장의 슬프고 극적인 가족사 -문재인 대통령도 말했지만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100년이다. 3·1운동 100년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너무 큰 질문이다.(하~하~) 3·1운동의 가치는 첫 번째가 비폭력·평화운동이고, 두 번째가 한 달 후(4월 11일) 생긴 임시정부 국가 정체를 공화제, 즉 민국으로 한 혁명적 의미가 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온국민이 참여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언론이 보편화되지 않은 시기에 이렇게 전국민이 밑으로부터 제국주의에 맞서 평화적으로 민주공화제를 주창했다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최근 발굴된 파리 경찰청 문건을 보면 베트남 호찌민이 우리 김규식 박사를 만나 서로의 독립을 논의했다. 3·1운동은 중국뿐만 아니라, 인도, 베트남 등 아시아 반제국주의 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했다.”

-100년 전 ‘동방의 등불’로 꼽히던 조선의 이런 사실과 정신이 계승되지 못했다. “그게 중요하다. 일제 36년간 3·1운동 정신을 말할 수 없었다지만, 해방 후에는 왜 계승되지 못했나. 1945년 8월 15일은 해방의 날이 아니라 치욕의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해방도 광복도 없고 단지 분단만 있었다. 분단이 일제강점기의 두 배인 70년이나 지속되면서 3·1운동 정신이 계승될 수 없었다. 남북 간 분단을 이용한 적대적 공생관계가 계속됐기 때문이다. 이런 친일·냉전·분단·반공세력이 3·1운동 정신을 제일 싫어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북 능라도경기장 연설을 옆에서 들으며 느낀 소감이 세간에 회자되고 있다. 한 위원장은 “북한을 악마라고 생각해 왔는데, 진짜 악마는 우리 안에 있구나”라고 소회를 밝혔다. “사실 나는 문 대통령의 연설을 들으며 불안했다. 북은 헌법에 ‘핵 보유국’으로 명시하고 있고, 국민 모두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포기하자는 문 대통령의 연설에 평양시민이 어떻게 대응할까 의문이었다. 정신적 혼란이 올까, 박수는 못 치고 그렇다고 야유도 못하고, 그래서 차가운 침묵이 흐를 줄 알았다. 그런데 연설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질 때 깨달았다. ‘평양 시민은 냉전의 빙벽을 무너뜨린 반면, 개방되고 민주적이고 다원주의 체제에서 산 우리가 오히려 무서운 악마의 모습을 지니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한 위원장은 능라도경기장의 감회를 다시 느끼는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태극기·성조기를 들고 그 증오를 재생산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서 “북을 악마화하면서 자신이 악마화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4·27 정상회담에서 내년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남북이 공동으로 하기로 합의했다. 8·15 광복의 경우 남북은 상당히 평가를 달리하지만, 3·1운동은 그래도 남북이 공통의 인식을 갖는다. 한 위원장은 “북·미관계 교착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문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치고 나가야 하고, 김정은 위원장도 호응해야 한다”면서 “비관도, 낙관도 하지 않지만 트럼프 미 대통령도 북·미 간 모멘텀을 살리고 싶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전쟁 겪으며 ‘소셜닥터’ 꿈꿔

3·1운동 100주년 위원회는 ▲위원회 자체 행사로 100주년 기념 평화공원 및 기념조형물 조성사업 ▲남북이 공동으로 하는 사업으로 3·1운동 100주년 공동기념식 및 부대행사, 3·1만세운동 한반도 릴레이 재연행사 ▲국민참여 사업으로 국민대토론회를 비롯한 독립운동가 마을 조성 등의 사업을 추진한다. 이를 위해 각 부처와 자치단체, 민간단체까지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다. 사실 3·1운동 100주년, 임정 100주년 기념 준비는 너무 늦었다. 프랑스 에펠탑은 프랑스 혁명 100주년, 미국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 독립 100주년 기념 조형물이다. 하지만 우리는 박근혜 정권 시기 ‘쓸데없는’ 건국절 논란으로 시간만 보냈다. 임정기념관은 옛 서대문형무소 위편 서대문구의회 자리에 신축하고 있다.

“미국 자유의 여신상에 버금가는 3·1운동 100주년 상징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소는 용산이 가장 적지다. 용산은 몽골군에서 시작해 청군-일본군-미군까지 외국군대가 주둔했다가 철수한 곳으로 민족 자주, 실제적 독립의 성지다. 상징물은 어떻게 생태공원을 훼손하지 않고 만드냐를 논의 중이다. 상징물 꼭대기에서 보면 아름다운 한강 풍광이 보이게 한다. 밤에는 강북 강변북로와 강남 88도로가 마치 용 두 마리가 꿈틀거리며 하늘로 올라가는 것같이 보일 것이다.”

한 위원장은 용산 생태공원에 있는 건물을 리모델링해 역사박물관을 만들고, 효창공원에 독립운동 후손을 위한 치유센터도 만들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독립운동가들이 친일파와 나란히 국립현충원에 묻히는 것을 꺼려하는 점을 감안해 현 효창공원을 확충하든지, 현 효창운동장을 공원화하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정부와 협의를 거쳐 최종 확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 위원장은 1936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났지만 주로 본가인 대구에서 자랐다. 부친은 교감선생님이었다. 중학(김천중) 2학년 때 6·25가 났다. 그때 미군 제트기의 폭격으로 외사촌형이 아내와 아들 둘이 죽었다며 어머니와 오열하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어린 가슴에 왜 저렇게 죽어야 하나, 누구의 죄인가를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다. 특히 국민방위군에 끌려가 해골 같은 모습으로 볕을 쬐던 형님을 보면서 ‘사회질병’을 고치는 ‘소셜닥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1955년 사회학과가 있는 서울대 문리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는 “막상 사회학 공부를 해보니 내가 원하던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62년 미국에 유학해 당시 한창이던 흑인 인권운동을 지켜봤다. 그는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도 신학대에 진학하기 전 사회학과를 다닌 사실을 알았다. 그는 “킹 목사가 나의 소셜닥터 모델이 됐다”고 말했다.

한완상 위원장이 사무실에서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엮여 고초

1970년 귀국해 모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동아일보>에 탈영군인 문제 ‘난동사병 총구는 사회 부조리를 향하여’라는 제목의 칼럼을 쓰면서 본격적인 ‘고난’의 길로 들어섰다. 1971년 대학 자율화 선언을 주도하다 1975년 교수 재임용에 탈락해 결국 해직됐다. 1980년에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엮여 남산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징역 3년을 구형받았으나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 1981년 미국으로 사실상 유배갔다. 한 위원장은 10년간 서울대 교수 발령장을 세 번이나 받을 정도로 순탄치 않은 교수생활을 했다.

92년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김영삼 대통령은 그를 통일부총리에 임명했다. YS의 유명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다”는 취임사는 바로 그의 생각이었다. 이 취임사를 들은 김일성 주석이 YS에게 깍듯이 ‘각하’라는 호칭을 붙였다고 한다. 이어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의 송환을 비롯해 김영삼-김일성 정상회담을 추진한 것도 그였다. 한 위원장은 지난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백두산 천지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한 위원장은 이러한 사실을 전하면서 “할아버지 시대에 성사되지 못했던 일이 지금에야 이뤄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김 위원장이 활짝 웃더라고 말했다.

-그렇게 감동적인 취임사를 한 YS가 왜 점차 보수의 길을 걸었을까. “자신 속에 내면화된 냉전적 가치를 털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모친을 공산주의자에게 잃은 트라우마가 있었겠지. 그러나 무엇보다 주변에 냉전적인 인사들이 포진했기 때문이다.”

-요즘 극우적 행보를 걷는 김문수, 홍준표, 김무성 모두 야당·진보운동을 하다 YS에 의해 발탁됐다. 그러나 이들 정치적 후배가 잘못해 YS가 지금 저평가되는 측면이 있다. “정확히 봤다. YS의 정치 후배들이 뭐했나. 대부분 박근혜 밑에 있다가 탄핵당하게 만들지 않았나.”

한 위원장은 2001년 김대중 대통령 시절 교육부총리, 2004~2007년 노무현 대통령 시절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지냈다. 그러고 보니 뒤늦게 ‘관운’도 괜찮은 편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3·1운동 100주년 위원장을 맡은 것은 그동안 경험을 환원하는 ‘봉사’ 차원이다.

지난해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라는 회고록을 남겼다. 회고록 첫 장에는 “이 땅의 민주화와 평화를 위해 헌신한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돼 있다. ‘사자가 여물을 먹는다’는 표현은 성서에 나오는 표현이다. 사회적 강자가 약자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넘어 가슴으로 공감하는 역지감지(易地感之),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 바로 먹이(생명)를 바꿔보는 역지식지(易地食之)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의미란다.

하지만 지난 박근혜 정권에서 보듯이 우리 사회의 강자들, 교수는 부정 입학·학점을 남발하고, 총장 출신 역사학자는 국정교과서를 만들고, 유명 의대 교수는 병사라 우기고, 판사는 재판을 거래했다. 이에 한 위원장은 “한국의 강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몰염치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한탄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1948년 장덕수 재판에서 백범이 증인으로 나와 ‘직업이 뭐요’라는 질문에 ‘독립운동이오’라고 대답했다. 2018년 겨울인 지금도 독립운동을 계속해야 한다. 왜? 아직 광복이 안 됐기 때문이다. 남북이 평화롭게 하나가 되어 성숙한 체제를 구축할 때 비로소 광복과 해방이 되는 것이다. 이 결론에 보수나 진보 모두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글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사진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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