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인의 예(藝)-<87>노수현 '사계산수도']소나무와 운치 곁들인 정자..묵향에 스민 '무릉도원'
스승 안중식 지도로 5폭씩 그린 사계절 산수화
남종화 멋스러움에 북종화 섬세함 절묘히 조화
일제강점기 마지막 왕실 궁궐벽화 작업 맡아
조일선관도로 창덕궁 경훈각 동쪽벽 꾸미기도


1899년 봄 황해도 곡산에서 3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노수현은 일찍 부친을 여의었다. 그래서 할아버지 손에서 컸다. 조부는 3·1운동 때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노헌용이다. 노수현이 보성중학교에 입학했다가 서화미술회에 들어가 미술 공부를 시작할 때도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자금 조달에 바빴다. 노수현은 스승 안중식을 특히 따랐고, 동급생 이상범(1897~1972)과 친했다. 하루는 안중식이 노수현과 이상범에게 종이 다섯 폭씩 나눠주며 춘하추동 산수화를 그려보자고 했다. 두 제자는 그간 배운 것들을 모조리 쏟아 부었다. 남종화의 멋스러움과 북종화의 섬세함이 적재적소에 자리 잡았다. 전문용어로 얘기하자면 청나라 초 사왕화법(四王畵法)이 스승에게서 제자로 이어져 그림에 담겼으니 안중식은 흡족했다. 그래서 자신의 호인 심전에서 심(心)자를 노수현에게 주어 심산(心山)이라는 호를, 전(田)자는 이상범에게 주어 청전(靑田)이라는 호를 갖게 했다. 그래서 관객이 봤을 때 10폭 짜리 병풍그림의 오른쪽 5폭에는 청전, 왼쪽 다섯 폭에는 심산의 호가 적혀 있다. 앞서 본 그림은 그중 맨 왼쪽의 세 폭이며, 노수현의 나머지 두 폭은 봄날을 그린 ‘도원도(桃園圖)’로 그림들이 하나같이 계절감각과 시적 감수성을 두루 갖췄다. 때마침 소장처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개막한 ‘대한제국의 미술-빛의 길을 꿈꾸다’에서 작품 전체를 볼 수 있다.


한편 노수현이 한창 서화미술회에서 그림을 배우던 1917년 11월, 창덕궁 대조전에 불이 났다. 순종이 내전 재건공사를 지시했고 햇수로 3년을 넘긴 1920년에야 끝났다. 공사 마무리 단계에 이르니 대조전과 희정당, 경훈각의 벽화 제작이 필요했다. 이왕직의 일본인 관리들은 일본 화가를 추천했지만 왕실은 안방의 그림까지 그들에게 내주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조선인 화가를 공개적으로 모집했다. 순종의 응접실이던 희정당 벽화는 서화연구회를 이끌며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관을 운영하기도 했던 김규진이 그렸다. 창덕궁의 침전인 대조전과 경훈각은 오일영·김은호·이상범·노수현·이용우 등 서화미술회의 신진들이 맡았다.
왕실에서는 창덕궁 벽화를 대청 윗부분 벽 전체를 뒤덮는 형식으로 주문했다. 파격이었다. 노수현은 이상범과 함께 경훈각을 맡았다. 왕실 여성들의 처소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경훈각이다. 둘은 중국 전설을 소재로 신비롭고도 환상적인, 동양적 낙원의 분위기를 그렸다. 훗날 대가가 된 이들의 팔팔 뛰는 청년기 작품이자 가장 큰 그림이다. 스물 한 살의 노수현은 경훈각 동쪽벽을 천도복숭아 든 공자가 등장하는 ‘조일선관도’로 꾸몄다. 사선 구도로 시선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가며 집, 나무, 산, 바위, 인물 등을 하나하나 살펴볼 수 있다.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고 추켜세우면서 전통화법을 따르되 서양과 일본의 최신 화법까지 가미해 개량을 통한 새로운 모색까지 그림에 담았다. 노수현과 그의 동료들이 그린 조선의 마지막 궁궐 벽화는 나라의 자주성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끝까지 지키고픈 자존심이고 자부심이었다.
훗날 노수현은 동아일보에서 삽화를 그렸고 조선일보에서 ‘멍텅구리 헛물켜기’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연재 만화가로 활약한다. 꼿꼿했던 그도 나중에는 친일매체에 ‘운전이라도 배워서 전쟁에 나가 나라를 도와야 한다’는 취지로 ‘멍텅구리-운전수편’을 발표하는 등 흠을 새겼다. 그의 평생 친구 이상범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살사건을 이끌었으나 후에 친일했듯, 심란한 시절이었다. 광복 후 노수현은 서울대 미대에서 후진을 양성하며 전통을 계승했고, 10대가·6대가·4대가로 꼽혔다. 시절이 암흑기였건만 오히려 어두워서 더 빛나는 그림들을 남겼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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