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청와대의 뜻' 호응, 재판 개입 수단 깨알 지시..43차례나 '공범'으로 적시 [사법농단]
[경향신문] ㆍ검찰의 임종헌 공소장에 드러난 양승태 사법농단
임종헌이 ‘행동대장’ 판단 ‘상고법원’ 위해 국정 협력 정부와 거래 사례 상세 소개
“피고인은 2016년 9월 대법원장실에 찾아가 양승태 대법원장(왼쪽 사진)으로부터 ‘강제징용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하겠다’는 취지의 말을 듣고 외교부에 전달했다.”
15일 경향신문이 입수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59·오른쪽) 공소장에 등장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70)의 혐의 부분이다. 공소장에 따르면 양 전 대법원장은 일제 강제징용 사건을 지연시키고 뒤집고 싶어 하는 ‘박근혜 청와대’의 뜻에 호응해 사건을 대법관 전체가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에 회부한다는 뜻을 임 전 차장을 통해 외교부에 전달한다. 행정부와의 재판거래를 승인한 정황으로 볼 수 있다.
공소장엔 이런 혐의도 나온다. “2015년 8월 인사모(국제인권법연구회 내 소모임)에서 상고법원에 대해 반대하는 취지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자 양승태는 ‘인사모의 동향을 파악해 제재 및 와해 방안을 강구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하고….” 양 전 대법원장이 자신의 숙원사업인 상고법원을 반대하는 법원 내 조직을 제재·와해시키려 한 점은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와도 닮았다.
경향신문 분석 결과 임 전 차장 공소장에는 양 전 대법원장이 이런 식으로 43차례 공범으로 등장한다. 임 전 차장의 직속상관으로 법원행정처장을 지낸 박병대(30회)·고영한(17회)·차한성(2회) 전 대법관에 비해 훨씬 많다. 공소장에 나타난 양 전 대법원장은 임 전 차장을 ‘행동대장’으로 두고 범행을 지시하고 보고받는 주범이다.
우선 재판 개입을 지시한 정황이 다수다. 서울행정법원이 2015년 11월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지위는 헌재가 정당 해산을 결정한 터라 법원이 판단할 수 없다며 소송을 각하하자, 양 전 대법원장은 “어떻게 이런 판결이 있을 수 있냐, 법원행정처의 입장이 재판부에 전달된 것이 맞느냐”고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을 질책했다.
2015년 9월 박정희 유신독재시절 긴급조치 사건 피해자에 대해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김기영 재판장(현 헌법재판관)의 1심 판결이 나오자, 양 전 대법원장은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들이받는 판결이 선고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강한 불만을 터뜨렸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이 판결 한 달 전 상고법원 도입 등 현안 논의를 위해 박 전 대통령과 만나, 긴급조치의 합법성을 근거로 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던 대법원 판결을 국정운영 협력사례로 소개했다. 이후 행정처는 김기영 재판장의 징계 방안 등을 검토했고, 재판은 다시 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뒤집혔다. 올해 들어 헌법재판소가 대법원의 판단이 잘못됐다며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고 나서야 피해자들이 배상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양 전 대법원장의 한마디가 사법농단의 출발점이 됐다. 법원행정처가 더불어민주당 유동수 의원의 재판 대응을 도운 혐의는 양 전 대법원장이 2016년 특허청장 인터뷰 기사를 보고 “가만두면 안되겠다”고 얘기한 것이 기화가 됐다. 특허청이 특허무효 소송에서 낸 증거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자 특허법원의 영향력 위축을 막기 위해 특허청을 관할하는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소속 유 의원을 포섭했다는 것이다.
2014년 8월 변호사대회에서 대한변호사협회가 상고법원 도입에 반대하는 공식 의견을 표명하자 그 자리에 참석한 양 전 대법원장이 격분해 대한변협에 대한 적극적인 압박 수단을 마련하도록 지시한 것이 실행으로 옮겨졌다. 행정처가 일제 강제징용 사건을 활용해 법관의 신규 해외 파견을 추진한 것도 양 전 대법원장이 2014년 오스트리아 방문에서 주오스트리아 대사에게 “주오스트리아 대사관에 법관의 신규 파견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말한 데서 비롯됐다고 검찰은 파악하고 있다.
조미덥·유희곤·정대연 기자 zor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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