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격진천뢰, 일본군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은 비밀병기 개발자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 선임기자 http://leekihwan.khan.kr/ 입력 2018. 11. 15. 12:22 수정 2018. 11. 15.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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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전북 고창 무장현 관아에서 호남문화재연구원 소속 조사원들이 비격진천뢰를 발굴하고 있다. 이곳에서만 11발의 비격진천뢰가 쏟아져 나왔다. 비격진천뢰는 1591년(선조 24년) 군기시 화포장인 이장손이 개발한 조선의 최첨단 무기였다.|연합뉴스

이번에 전북 고창 무장현 관아의 무기고 구덩이에서 확인된 11발의 비격진친뢰가 임진왜란 때 쓰인 것인지는 아직 모른다. 동학농민운동 때 관군이 사용하려다 그냥 두고 도주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러나 이장손이라는 군기시 화포장이 1591년(선조 24년) 제작한 이 비격진천뢰가 1년 뒤에 발발한 임진왜란 때 그렇게 요긴하게 쓰일 지 몰랐을 것이다.

비격진천뢰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당대 조선의 최첨단 무기이자 비밀병기였다.

오늘날과 같은 신관(발화) 장치가 있어서 목표물까지 날아가 폭발하면서 천둥 번개와 같은 굉음과 섬광, 그리고 수많은 파편(마름쇠·삼각형 형태의 쇠조각)을 쏟아내는 작렬탄이었다. 시간을 조절해서 폭발한다는 면에서 일종의 시한폭탄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 군사교범인 <융원필비>에 기록된 비격진천뢰 제작 기법. 대나무통과 나선형 목각, 마름쇠, 마감장치 등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연세대 도서관 소장

1813년(순조 13년) 편찬한 병기서적인 <융원필비>에 적힌 비격진천뢰의 원리 구조는 뜻밖에 간단하다.

둥그런 무쇠 속에 대나무통(竹筒)을 꽂고 대나무 통 안에 나선형의 홈을 파놓은 나무(木谷)에 도화선을 칭칭 감는다. 빨리 폭발시키려면 도화선을 10번 감고, 더디게 푹발시키려면 15번 감도록 나선을 만든다. 이어 별도로 뚫린 구멍 속으로 무쇠 안에 화약과 마름쇠(삼각형 쇠), 흙을 잔뜩 넣고 화포에 장착한다. 그런 다음 비격진천뢰의 도화선과 화포의 도화선에 차례로 불을 붙인 다음 발사한다. ‘대나무통과 그 안에 설치된 나선형 나무에 감은 도화선’이 바로 발화장치가 되어 폭발시간을 조절하는 것이다.

<융원필비>에 쓰여진 비격진천뢰 제작원리를 토대로 그린 단면도. 무쇠 안에 대나무통(竹筒)을 꽂고 대나무 통 안에 나선형의 홈을 파놓은 나무(木谷)에 도화선을 감은 뒤 화약구멍 속으로 화약과 마름쇠, 진흙을 넣고 화포에 장착한다. 비격진천뢰의 도화선과 화포의 도화선에 차례로 불을 붙인 다음 발사한다. ‘나선형 목각에 감은 도화선’이 폭발시간을 조절하는 발화장치가 된다.|곽홍인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실 학예연구사 제공

■중국의 진천뢰와는 격이 달랐다.

물론 중국에서도 12세기 금나라 때부터 ‘진천뢰’라는 비슷한 무기가 존재했다.

그러나 중국의 진천뢰는 조선의 비격진천뢰에 외형을 비숫하지만 내부구조는 달랐다. 진천뢰는 철로 만들어진 용기 안에 폭발성이 강한 화약을 채워넣은 것이다. 도화선을 사용해서 점화하여 손으로 던지는 휴대용 폭탄이었다. 일종의 수류탄인 셈이다.

그러나 조선의 비격진천뢰는 무쇠 내부에 설치된 발화 장치(죽통과 나선형 나무에 감은 심지)가 신관(발화) 역할을 한다. 이 발화장치가 폭발시간을 지연시킴으로써 화포발사가 가능했다. 단순 폭발이 아니라 날아가 폭발하는 작열포였다. 그래서 천지를 진동하는 소리가 들린다 해서 붙은 이름(진천뢰·震天雷) 위에 ‘포탄이 날아간다’는 의미에서 ‘비격(飛擊)’자가 가미됐다.

■서양도 만들지 못한 시한폭발탄

수류탄과 비슷한 중국의 진천뢰도 상대방에게 타격을 입혔지만 ‘비격진천뢰’는 동서양 무기사에서 커다란 획을 긋는 최첨단 무기였다. 불과 19세기 전반까지도 동·서양의 포탄은 비격진천뢰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었다.

즉 대포에서 발사하는 포탄은 폭발하지 않는 단순 고체덩어리였다. 그저 성벽을 부수거나 함선을 격파하는데 사용될 뿐이었다. 포탄이 적에게 도달할 때까지 폭발을 지연시키는 기술을 개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1805년 나폴레옹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사용한 함포 발사물도 터지지 않는 포탄이었다.

무장현 관아에서 출토된 비격진천뢰. 온전한 형태의 비격진천뢰가 한꺼번에 11발이나 쏟아진 발굴성과는 획기적이다.|호남문화재연구원 제공

비격진천뢰는 달랐다. 내부에 화약을 충전하고 발화장치를 갖추고 있어 적의 위치에 도달할 때 쯤 자체폭발을 일으켰다. 따라서 비격진천뢰는 성이나 함선격파용이 아니라 인마살상용이었다. 비격진천뢰는 폭발 때 발생하는 천둥번개와 같은 폭풍과 화염으로 적을 살상하는 효과를 낸다. 폭발음이 주는 공포감도 중요한 효과였다. 또한 파편인 마름쇠가 흩어져 터지니 그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2017년 국립중앙박물관은 창녕 화왕산성에서 출토된 비격진천뢰를 CT(컴퓨터 단층촬영) 장비로 찍은 결과, 내부에 무수한 기공(氣孔)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한 바 있다. 기공은 원래 주물 작업 때 생긴다. 당대의 장인들이 일부러 기공을 많이 만들어 잘 폭발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 아닐까.

비격진천뢰를 발사했던 화포(보물 제 858호). 비격진천뢰의 심지에 불을 붙이고, 화포의 심지에 불을 붙여 발사했다. |국립진주박물관 소장

■‘별처럼 폭발한’ 비격진천뢰에 혼비백산한 왜병

그랬으니 이 기사의 맨처음에 인용했듯 의기양양 조선을 유린하고 있던 왜적들이 이 무시무시한 비격진천뢰의 위력에 깜짝 놀란 것이다. 1592년(선조 25년) 9월1일 박진의 경주성 탈환 작전과 관련된 사료는 제법 많다.

서애 류성룡(1542~1607)의 <징비록>은 왜적이 점령한 경주성에 비격진천뢰를 떨어질 때의 광경을 자세하게 묘사해놓았다.

“비격진천뢰를 성안으로 쏘자 적병이 점령한 경주성의 객사의 마당 한가운데 떨어졌다. 왜적들은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몰라 다투어 몰려들어 구경하고 서로 밀며 굴려보고 살펴보았다. 갑자기 포가 폭발하자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 흩어지니 이를 맞고 즉사한 자가 30여명 되었다. 이튿날 아침 적병이 성을 비운 채 도주했고, 경주가 드디어 수복됐다.”

진주성터에서 발견된 비격진천뢰 파편. 그러나 이 유물은 지표면에서 수습한 것이어서 고고학적인 가치가 다소 떨어진다.|국립진주박물관 소장

그러면서 류성룡은 “비격진천뢰포 하나의 위력이 수천 명 군사보다 낫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비격진천뢰는 군기시의 화포장 이장손이 만든 무기다. 진천뢰를 대완구(대포)에 넣어 쏘면 500~600보를 날아가 땅에 떨어져 한참 있으면 불이 그 안에서 일어나 터진다. 왜적들은 이 무기를 가장 무서워했다.”

사실 경주성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1562~1611) 휘하의 군사들이 별다른 저항없이 점령해 있었다. 그해(1592년) 8월 경상 좌병사 박진과, 영천 전투에서 승리한 의병장 권응수와 정세아 등이 합세해서 경주성 탈환작전을 펼쳤지만 실패했다. 이에 박진은 결사대 1000명을 모아 전열을 정비한 뒤 이장손의 비격진천뢰를 사용해서 경주성 탈환에 성공했다. 새로운 과학무기의 위력을 마음껏 과시한 전투라 할 수 있다. <연려실기술>은 더 적나라한 표현을 덧붙이고 있다.

“비격진천뢰가 터지자 맞고 넘어져서 즉사한 놈이 20여 명이나 됐다. 온 진중이 아찔하여 거꾸러져서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놈이 없었다. 왜적들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 귀신의 조화라고 하면서 이튿날 성을 버리고 서생포(울주)로 도망갔다. 박진은 경주성에서 곡식 1만여 섬을 얻었다.”

■진주대첩, 행주대첩에서도 사용된 비격진천뢰

비단 경주성 전투 뿐이 아니다. 그 해 10월의 진주대첩 때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학봉 김성일(1538~1593)이 진주대첩의 전말을 전한 보고서에 등장한다.

“목사(김시민)는 성 위에 비격진천뢰와 질려포(쇠조각이 든 탄환을 쏘던 화포), 그리고 큰 바윗돌을 모아 두고 적의 접근을 막았습니다.…적이 몰려오자 진천뢰나 질려포를 터뜨리고, 큰 돌멩이와 불에 달군 쇠붙이를 던지기도 하고, 끓는 물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왜적들은 계속 죽어나갔는데, 비격진천뢰에 맞아 넘어져 죽은 시체가 수도 없이 쌓였습니다.”(<학봉집>)

또 1593년(선조 26년) 2월 행주산성 전투에서도 “우리 군사들이 활을 쏘고, 돌을 던지며 크고 작은 승자총통(휴대용 개인화기) 및 비격진천뢰와 지신포(신호용 탄) 등의 화기를 쏘았다”는 기록이 있다.(<선조실록>) 홓

1597년(선조 30년) 8월13일 남원성 전투에서도 “성 중에서 잇달아 진천뢰를 발사하여 적병의 사상자가 매우 많이 발생하자 적은 도로 물러갔다”(<난중잡록>)고 했다. 이외에도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사용한 예가 나온다.

그랬으니 의병장 김해(1555-1593)의 <향병일기>는 “왜적을 토벌하는 방책으로 비격진천뢰를 능가하는 것은 없다”고 기록했다.

■일본에게 충격과 공포였던 비격진천뢰

일본측도 조선의 비밀병기를 ‘충격과 공포’로 받아들였다.

예컨대 일본측 기록인 <정한위략>은 “적진에서 괴물체가 날아와 땅에 떨어져 우리 군사들이 빙둘러 서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폭발해서 소리가 천지를 흔들고 철편이 별가루처럼 흩어져 맞은 자는 즉사하고 맞지 않은 자는 넘어졌다”고 했다. 왜군이 느끼는 심리적인 압박감은 대단했다. 일본의 병기전문가인 아리마 세이호(有馬成甫)는 <조선역 수군사>에서 “비격진천뢰의 발화장치는 매우 교묘한 것으로 그것은 화공술로서의 획기적인 일대 진보라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생몰연대 ‘?~?’으로 남은 이장손

박재광 씨는 “조선의 최첨단 무기인 비격진천뢰는 중국의 진천뢰와도 다르고, 유럽의 어떤 포탄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자기술로 만든 비밀병기였다”면서 “당시로서는 가장 선진적인 작렬포탄이었다”고 말했다. “한 줄 기록으로만 남은 비격진천뢰 개발자 이장손의 존재를 다시 재조명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는 정재숙 문화재청장의 말마따나 이번 발굴은 ‘과학자 이장손’을 재평가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사실 이장손의 존재는 <선조수정실록> 1592년(선조 25년) 9월 1일에 경주성 전투를 설명하는 말미에, 그것도 실록을 쓴 사관의 부연설명에 겨우 등장한다.

즉 비격진천뢰 덕분에 경주성이 수복됐다는 구체적인 전과를 설명하고 박진이 가선대부(종 2품)로 승진했다는 내용을 모두 기록한 다음 ‘()’ 형식으로 이장손의 존재를 살짝 첨언한다.

“(비격진천뢰는 그 제도가 옛날에는 없었는데, 화포장 이장손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진천뢰를 대완포구(大碗砲口·대포)로 발사하면 500~600보 날아가 떨어진다. 얼마 있다가 화약이 안에서 폭발하므로 진을 함락시키는 데는 가장 좋은 무기였다.)”

달랑 이 내용 뿐이다. 당대 전세계의 그 어느 포탄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자기술로 만든 최첨단 무기를 개발한 이장손의 생몰연도도, 가문도, 이력도 ‘?’로 남았을 뿐이다. 실록이 신경 써주지 않고, 또한 사대부의 문집에서 언급해주지 않는 한 기록이 남아있을 리 없다. 비격진천뢰를 개발한 희대의 과학자가 받아야 할 대우는 아니었는데…. 돌이켜보면 안타까운 일이다.

<참고자료>

박재광, <화염 조선-전통 비밀병기의 과학적 재발견>, 글항아리, 2009

‘비격진천뢰’, <정보과학과 기술> 제40권 3호,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2007

곽홍인 외, ‘창녕 화왕산성 출토 비격진천뢰의 보존처리’, <박물관 보존과학> 제7집, 국립중앙박물관, 2006

이기환 선임기자 http://leekihwan.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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