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을 위한 인증샷은 감동이 없다 [김창길의 사진공책]
[경향신문]

탐험의 시대였다.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기 위한 국가 대항전이 펼쳐졌다. 북극이 미국의 손에 들어갔다. 1909년 로버트 피어리가 이끄는 탐험대가 북극점에 성조기를 꽂았다. 대영제국이 노리던 남극은 바이킹 차지가 됐다. 북극 탐험을 떠난다던 로알 아문센의 탐험대가 뱃머리를 돌려 남극으로 향했다. 1912년 1월18일 남극점에 도착한 영국 탐험대를 맞이한 것은 노르웨이 국기였다. 대영제국은 분통이 터졌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지구에서 제일 높은 산봉우리에 제국의 깃발을 꽂는 것. 그것은 북극, 남극에 이은 지구의 제3극이었다.

세계 최고봉을 발견한 것은 영국이었다. ‘만년설의 보금자리’라는 뜻의 히말라야산맥에서 찾았다. 1852년 인도 측량국장이었던 영국인 앤드루 워가 발견했다. 해발 8848m의 제3극은 ‘피크(peak)15’로 표기됐다. ‘에베레스트’라는 지금의 이름을 달게 된 것은 나중 일이다. 산에 사람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전례가 없었다. 하지만 영국 왕립지리학회는 전임 인도 측량국장의 공을 기리며 1865년 피크15를 측량국장의 이름인 에베레스트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 ‘세계의 어머니’라고 티베트 사람들이 부르던 ‘초모랑마(Chomolungma)’, ‘하늘의 여신’을 말하는 네팔어 ‘사가르마타(Sagarmatha)’라는 세계 최고봉의 아름다운 이름은 그렇게 잊혀졌다.

하늘의 여신은 자신의 존재를 찾아낸 영국인들의 등정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숨 쉬기조차 힘든 희박한 공기와 변화무쌍한 날씨, 원주민들이 생각하듯이 그곳은 사람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은 신의 영역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간계가 있었다. 산소통을 짊어진 등반가들이 신들의 거처에 문을 두드렸다. 1953년 5월29일 영국의 아홉 번째 원정대원 에드먼드 힐러리와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가 제3극에 올랐다. 에베레스트가 발견된 지 101년, 영국이 원정대를 파견한 지 22년 만의 성과였다. 힐러리는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유니언잭을 묶은 피켈을 들고 있는 텐징을 사진 찍었다.
세계 최고봉을 정복했다는 기쁨은 잠시, 영국의 에베레스트 타이틀에 흠집이 발견됐다. 인증 사진이 문제였다. 정상에 오른 힐러리의 사진은 없었다. 사람들은 힐러리를 공격했다. 왜 셰르파 사진만 찍은 것인가? 셰르파가 먼저 정상에 오른 것은 아닌가? 힐러리는 대답했다. 에베레스트 정상은 기계 문명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네팔 현지인 셰르파에게 사진 찍는 방법을 가르쳐줄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고. 다만 힐러리도 셰르파의 등반 실력만은 인정했다. 정상을 목전에 둔 텐징이 정상에 함께 오르기 위해 뒤쳐졌던 힐러리를 기다렸던 것이다.
인증 사진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정복한 것은 영국의 원정대였지만 힐러리는 영국인이 아닌 뉴질랜드 등반가였다. 게다가 그는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기로 계획된 정상공격조원도 아니었다. 두 명의 영국인 정상공격조가 임무에 실패하자 그들을 뒤따르던 힐러리와 텐징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셰르파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도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힐러리에게 기사 작위를 주었지만 텐징에게는 2등급 훈장을 수여했다.

에베레스트 정복의 원년을 다시 쓰는 시도도 있었다. 1999년 영국의 BBC는 에베레스트에서 실종된 영국의 전설적인 등반가 조지 말로리를 찾는 수색원정팀을 꾸렸다. 말로리는 영국이 에베레스트 원정의 첫발을 내디뎠던 1921년부터 정상을 공격했던 등반가였다. 미국 기자가 말로리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려 합니까?’
조지 말로리가 대답했다.
‘산이 거기 있으니까(Because it is there).’
그는 아직도 산에 있다. 1924년 말로리는 영국의 제3차 에베레스트 공격에 출정했다. 원정대원 오델은 망원경을 통해 말로리의 움직임을 추적했다. 오델은 정상 바로 아래 ‘세컨드 스텝’이라는 절벽 부근에 도달한 말로리를 발견했다. 하지만 곧 몰아닥친 안개에 휩싸여 말로리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안개는 사라졌으나 말로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오델은 살아생전 말로리가 에베레스트에 올랐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말로리의 에베레스트 정복에 대한 논란은 베스트 포켓 코닥 카메라에 달려 있었다. 베스트 포켓 코닥은 1912년 이스트만 코닥사가 만든 폴딩 카메라다. 말 그대로 조끼 주머니(Vest Pocket)에 들어갈 만한 작은 크기로 전장의 군인들이 애용했다고 ‘병사들의 카메라’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3차 공격에 나섰던 말로리도 이 카메라를 주머니에 넣었다. 코닥 전문가들은 에베레스트의 춥고 건조한 날씨 때문에 말로리의 카메라를 찾을 수 있다면 그의 에베레스트 원정 사진을 현상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말로리 수색원정대는 세컨드 스텝 아래쪽에 엎드리고 있는 말로리의 시신을 발견했다. 하얗게 말라붙은 미라의 모습이었다. 징이 박힌 부츠, 고도계, 포켓 나이프, 손목시계 등이 발견됐고, 아직 풀리지 않은 밧줄이 미라의 가슴에 묶여 있었다. 부인에게서 받은 편지와 머리글자가 새겨진 손수건은 미라가 말로리라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러나 주머니 속의 카메라는 발견되지 않았다. 말로리의 에베레스트 등정 성공 여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게 됐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한 수수께끼 같은 사진이 있다. 프랑스 사진가 비송 형제가 찍은 몽블랑 등정 사진 ‘크레바스(La crevasse, 1862)’다. 무심코 본다면 심심한 흑백 사진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현미경처럼 자세히 들여다본다. 얼음 빙벽 틈(크레바스)을 개미처럼 오르는 등반가들의 모습. 사다리를 등에 지고 장대처럼 기다란 등산지팡이와 곡괭이 모양의 피켈로 빙벽을 두드리며 정상을 공격하는 등반가들의 차림새는 평상복과 비슷하다. 알프스산맥의 최고봉인 몽블랑을 저런 모양새로 등정했다니….

‘알프스의 황금기’라고 불리던 시기였다. 스위스,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에 걸쳐 뻗은 알프스산맥의 고봉들을 접수하기 위한 시합이 펼쳐졌다. 스위스의 자연과학자 소쉬르가 포문을 열었다. 몽블랑을 정복하는 자에게 포상금을 주겠다는 것이다. ‘미친 산’이라는 뜻의 ‘몽타뉴 모디트’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몽블랑은 해발 4800m가 넘는 유럽의 최고봉으로 알려져 있었다. 현상금은 1786년 시골 마을 의사였던 파카르와 수정 채취꾼 자크 발마가 가져갔다. 산 아래 사람들은 물었다.
‘악마를 보았는가? 봉우리에 똬리를 틀고 있던 용은 어디로 날아가 버렸는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던 알프스의 산들은 파카르와 발마의 몽블랑 초등 이후로 정복의 대상이 됐다. 과학자, 문인, 돈 많은 여행객들이 알프스에 몰려들었다. 유럽인들의 놀이터라고 불리던 알프스에서 근대 등반의 역사가 시작됐다. 높고 험한 산을 오르는 ‘알피니즘(alpinism)’은 여기서 유래됐다. 새로운 문화를 기록하려는 사람들도 알프스에 모였다. 1865년 알프스 마테호른 초등에 성공한 에드워드 윔퍼는 원래 알피니즘을 시각적으로 알리기 위해 알프스를 찾은 목판 화가였다. 사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목판화로 인쇄한 삽화가 정보를 전달하는 주요한 시각 매체였다.

알프스 황금시대의 사진술은 현상력은 물론 휴대성도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최초의 사진술이 완성(1839년)된 지 고작 20여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비송 형제가 찍은 몽블랑 등정 사진은 1862년에 찍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그들 사후에 태어난 근대 풍경사진의 거장이라 칭송받는 앤설 애덤스(1902~1984)의 하프돔(Moon and Half Dome, 1960) 사진과 견줄 만하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몽블랑을 먼저 올랐던 발마가 형제를 안내했다. 중장비를 방불케 하는 카메라 장비를 공수하는 데만 25명의 짐꾼이 동원됐다. 한 번에 성공한 것도 아니다. 첫 공격은 1859년, 세 번째 도전이었던 1861년 비송 형제는 몽블랑 정상에 올랐다.
“텐트가 세워졌고, 카메라를 지지대 위에 고정시키고 원판에 감광제를 입히고 노광했다. 풍경이 찍혔다. 그 대단한 풍경, 그 대단한 파노라마! 그러나 현상을 하려 하니, 헹굴 물이 없었다. 누군가 램프로 눈을 녹이려 했는데, 희박한 공기 때문에 불꽃은 아주 작게 타올랐다. … 램프 불이 계속 타도록 임무를 맡은 사람이 잠에 빠졌고, 다른 사람에게 그 일을 대신 시켰는데, 그 사람 역시 곯아떨어졌다. 결국 그 귀중한 물을 얻기까지, 자신이 고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급히 텐트로 돌아갔다. 발마 한 사람만이 깨어 있었다. 현상작업을 계속했다.”(한스 미하엘 쾨츨레, <포토아이콘>, 아트앤북스)
최초의 사진술인 은판사진술보다 진보됐지만 콜로디온 습판법은 여전히 까다로운 사진술이었다. 알코올과 에테르, 요오드화칼륨, 질산은 용액 등을 유리 원판에 바른 다음 사진을 찍어 티오황산나트륨이나 시안화칼륨 용액으로 정착시켜 네거티브 유리 원판을 얻어내야 하는데, 솔직히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정확히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사진술이다. 간단히 말해본다면, 사진 1장을 얻기 위해서는 총 18단계 이상의 공정이 필요하다. 셔터 버튼을 누른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암막 텐트로 들어가 현상을 해야 한다. 여간 까다로운 작업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콜로디온 ‘습’판법은 말 그대로 유리 원판이 젖은 상태에서만 사진을 만들어낼 수 있다. 혹한의 날씨는 이미지를 포착하기보다는 유리 원판을 얼려버리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비송 형제의 사진은 사진가의 첫 몽블랑 등정을 인증하지 않았다. 그들이 인증하고자 했던 것은 자연의 신비로운 자태였다. 형제의 사진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포토아이콘>에서 한 관람객은 비송 형제의 사진을 이렇게 말했다.
“눈의 사막이 놓칠 수 없는 미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첫 사람이었고, 알프스의 장엄함을 사진에 담은 첫 사람이었다.”

탐험의 시대는 지나갔다. 인간이 정복하지 못한 곳은 이제 지구상에 남아 있지 않다. 지구의 제3극이라던 에베레스트 정상에 발을 올려놓은 지 16년 만인 1969년 인간은 달에도 발자국을 남겼다. 깃발 꽂기가 취미인 지구인들은 달에도 국기를 꽂았다. 물론 인증 사진도 찍었다. 하지만 사진은 인간의 달 착륙을 증명하기보다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대기가 없는 달 표면에서 어떻게 성조기가 펄럭일 수 있냐는 달 착륙 조작 음모설이다. 우주인 첫 사진사였던 닐 암스트롱에 대한 아쉬운 마음이 남는다. 성조기 인증 사진 말고 아름다운 달의 풍경이나 많이 담아 오시지….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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