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각저총에 새긴 '씨름' 유네스코 유산의 향기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 선임기자 2018. 11. 1.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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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고구려 고분인 각저총에 그려진 씨름장면, 고구려인과 서역인이 심판인듯한 노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열한 한판승부를 벌이고 있다. 씨름은 이미 1600~1700년전부터 글로벌 스포츠였다.

“(조선 씨름은) 힘이 세야 이긴다하되 꾀가 있으면 더욱 용하다.”

17~18세기 한·일 교류의 상징인물인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1668~1755)의 조선어 학습지인 <교린수지>(交隣須知)가 설명한 조선씨름의 특징이다. 일본의 스모(相撲)과 달리 힘보다는 기술을 강조하는 한국씨름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지고보면 한국의 씨름과 비슷한 무예이자 놀이는 세계 어느 곳이나 다 존재한다. 각 대륙과 지역에 160여종의 씨름이 분포하고 있다니 말이다.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신체활동이니, 씨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놀이이자 스포츠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전세계

각 나라와 종족은 주어진 자연환경과 역사적인 조건 속에서 저마다 개성있는 씨름을 발전시켜왔다.

예컨대 일본의 스모는 물론이고, 몽골의 부흐와 우즈베키스탄의 크라쉬, 터키의 그레스, 스페인의 루차 카나리아, 스위스의 쉬빙겐, 아일랜드의 팽은 물론이고 세네갈의 람브 등이 ‘유사 씨름’의 형태이다.

■고구려 대 서역의 씨름대결

한국 씨름의 첫번째 기록은 1600~17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만주 고구려 고분인 각저총 벽화(4~5세기 추정)에 등장하는 씨름 장면이 그것이다.

벽화에 나타난 씨름의 방식은 짧은 바지를 입고 오른쪽 어깨를 맞대고 상대의 허리띠를 잡는 왼씨름이다.

역시 고구려고분인 장천 1호분에서 보이는 싸름장면. 씨름이 삼국시대부터 사랑받아온 놀이이자 스포츠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한국씨름을 보는 듯 하다. 앞편의 장사는 고구려인이고, 큰 눈과 메부리코가 특징인 뒤편의 장사는 서역인인 듯 하다. 씨름 경기는 4마리 새가 앉은 나무 아래에서 한 노인이 보고있는 가운데 열리고 있다. 이 노인은 심판인 듯 하다. 나무 옆에는 곰과 호랑이가 앉아있다. 곰과 호랑이라면 단군신화의 ‘필’이 확 풍기는 것 같기도 하다. 어딘가 신성한 곳에서 펼쳐지는 씨름경기라는 얘기인가.

역사는 벽화중 씨름 장면이 유독 돋보이는 이 고분에 특별히 씨름고분이라는 뜻인 각저총(角抵塚)의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씨름경기에 임하는 두 장사의 그림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앞쪽의 장사는 고구려인인 듯 싶은데, 뒤편의 장사는 서역인인 듯 싶다. 큰 눈과 메부리코가 매우 인상적이다. 이를 두고 갖가지 해석이 있지만 고구려인과 서역인의 씨름대결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씨름 벽화가 각저총에서만 그려진 게 아니다. 역시 고구려 고분인 장천 1호분의 벽화에도 흐릿한 씨름 그림이 그려져 있다.

■외교사절 관람용 스포츠

씨름은 권법의 일종인 수박(手搏)과 함께 호신무예로서 중시되거나 외국사신이나 손님에게 그 나라, 혹은 그 가문의 힘을 과시하는 의전용 유희로 유행되기도 했다. 136년 부여왕이 한나라를 방문했을 때 씨름을 관람했고, 642년(백제 의자왕 2년) 백제 사신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연회 자리에서 씨름을 관람한 예가 있다.

1343년(충혜왕 후 4년) 2월 왕이 궁궐에 나가 용사들을 거느리고 씨름을 관람했다. 원나라 사신이 왔을 때도 사신의 요구로 개경 시가의 누각에 나가 격구와 씨름을 구경하고 상도 주었다. 조선시대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들(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들어앉은 태종은 1419년(세종 1년) 아들인 세종과 함께 한강변에서 씨름을 구경했다. 이후 씨름을 ‘잡기(雜技)’로 여겨 국왕이 관람하는 씨름 경기는 점차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외국 사신의 관람 요청은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1426년(세종 8년) 명나라 사신이 목멱산에 올라 활을 쏘고 씨름경기를 관람했다.

김홍도의 풍속화 중 씨름도. 씨름이 저잣거리 백성들의 사랑을 받은 대중 스포츠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내가 왕년엔…” 이항복의 씨름 무용담

16세기 들어 씨름을 둘러싼 무용담이 속출했다.

예컨대 이항복(1556~1618)은 14~15세에 씨름과 공차기를 잘해서 길거리에 맞설 자가 없었다고 한다.(<백사집>)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덕령(1567~1596)도 유생 시절 씨름으로 지역 장사를 쓰러뜨렸다.(<용호한록>)

1557년(명종 12년) 대사헌 오겸 등은 “진사 김홍도(1524~1557)가 부친의 장례를 마친지 얼마후에 동료들과 함께 장기와 바둑을 두고 혹은 씨름을 겨룬 사실을 알고도 제대로 문책하지 못했다”면서 사임을 청했다. 같은 시기인 1565년(명종 20년) 명종은 강섬(1516~1594)을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판윤으로 임명했는데, 이때의 <명종실록> 기자는 “강섬은 한성판윤 같은 중책을 맡을 자격이 없었다”고 꼬집었다. 그 이유는 “강섬이 (13살에 죽은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1551~1562)의 묘를 지킬 때 재실에서 씨름판을 벌였다”는 것이었다. 이 무렵 씨름은 사대부마저 물불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사랑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씨름은 명종 시기, 즉 16세기 중엽 민중의 세시풍속으로 깊숙히 뿌리박는다. 당대의 문신인 소세양(1486~1562)의 문집인 <양곡선생집>을 보면 단옷날 서울 거리에서 씨름과 그네뛰기 하는 풍경이 등장한다.

북한의 씨름 장면. 상의를 입고 경기를 펼치는 모습이 남측과는 다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조선에 불어닥친 씨름 광풍

이 뿐이 아니다. 단옷날에 요즘의 민속장사씨름대회가 열려 각지의 장사들이 속속 모여들었다는 기사도 나온다.

“호남의 풍속에 단옷날이면 관아 마당에 모여 씨름판을 벌여 우승한 자에게 후한 상을 주었다. 그러자 먼 곳에서 식량을 싸가지고 오는 자도 있었다.”(<송자대전> ‘부록 최신록’)

특히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계 지역인 여산 작지골이나 충청도와 경상도 사이의 금산 직지사는 씨름경기자 자주 열리던 곳이었다.

<동국세시기>는 “해마다 단오가 되면 금산 직지사에서 씨름을 했는데, 수천 수만명이 구경했다”고 기록했다.

이런 단옷날 씨름 풍속이 종종 과열현상까지 빚었던 모양이다.

1560년(명종 15년) 동궁(세자궁)의 별감 박천환이 시강원(세자의 교육기관)에 와서 “저잣거리에서 양반의 무리에게 집단구타당했다”고 호소하는 실록(<명종실록>) 기사가 흥미롭다.

“제(박천환)가 단옷날 세자의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양반의 무리를 만났는데, 억지로 각저(씨름) 놀이를 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제가 거부하자 그들은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의복과 갓을 찢고 회사문(回謝文)까지 찢었습니다.”

세자궁 소속 관리가 모욕을 당한 이 일 때문에 단옷날 씨름(각저)대회는 금지됐다.

“사대부의 종이라도 이렇게 모욕을 당하면 안되는데 하물며 궁중의 별감이랴. 별감을 집단 구타한 자들을 끝까지 잡아들이라. 그리고 지금 이후 각저(씨름)과 도박, 답교놀이 등은 엄금하라.”(<명종실록>)

20세기초 씨름하고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 씨름은 장소 불문, 나이 불문으로 펼쳐진 놀이였다.

■씨름으로 청나라 장수 죽인 무용담

씨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와중에는 적군과의 백병전 개념으로 훈련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보면 임진왜란 중에 휘하 장수와 수군들에게 4차례 씨름을 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순신 장군은 씨름을 선상 군사 훈련의 하나로 여겼을 뿐 아니라 오랜 전쟁에 지친 군사들을 위로하고 사기를 높이기 위한 진작책으로 활용한 것이 틀림없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심양으로 볼모로 끌려간 김여준은 청나라 장수 우거와 씨름판을 벌여 승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9세기에 편찬된 <해동속악부>는 “김여준과 우거의 씨름은 단순한 씨름이 아니라 주먹까지 쓰는 격투 씨름이었으며, 결국 청나라 장수인 우거가 쓰러져 죽는 것으로 끝났다”고 했다. 그러나 김여준은 ‘단순 살인이 아니라 군대에서 무용을 겨루다 일어난 일’이라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조선 씨름은 청나라에까지 알려졌다고 한다.

그 때문일까. 조선씨름은 이후 청나라 사신의 접대용으로 크게 발전하게 된다.

청나라 사신들은 조선에 올 때마다 씨름 구경을 원했다. 씨름판은 조·청 국경에서 서울로 이동하는 의주·평양·황주·개성의 주요 지역마다 열렸다. 씨름꾼은 1667년(현종 8년) 60명에서, 1676년(숙종 2년) 200명으로 늘어났다. 경기는 연승제로 진행되었는데, 한사람이 5연승을 거두면 상급을 받았다. 씨름은 이렇게 온 백성이 즐기는 놀이로 변모한 역사를 갖고 있다.

■각저총 씨름의 관전포인트

씨름의 장구한 역사를 굳이 돌이켜 볼 필요도 없다.

앞서 훑어본 4~5세기 무렵의 각저총 벽화는 왜 인류가 공동으로 지켜가야 할 무형유산인지 알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씨름은 지금도 전세계 160여종이 분포되어 있다. 그런데 이미 1600~1700년전 고구려와 서역이 친선경기를 벌일만큼 ‘글로벌 스포츠’였음을 일러준다. 즉 씨름이 단순히 특정지역의 놀이가 아니라 인류가 함께 보존해야 할 소중한 무형유산이자 인류 다양성의 원천임을 ‘각저총’ 벽화가 상징해주고 있다.

또하나 놓쳐서는 안될 관전포인트가 있다. 각저총 벽화의 주인공이 다름아닌 고구려인이며, 무엇보다 그 경기 모습이 지금의 한국씨름과 흡사하다는 점이다. 특히 씨름의 형태가 전세계 160여종에 달한다지만 한국 씨름만의 특징이 도드라진다.

그것은 다른 나라의 ‘씨름’에는 찾아볼 수 없는 ‘샅바’라 할 수 있다. 씨름꾼을 샅바꾼이라 할만큼 샅바는 한국씨름을 대표한다.

시장 상인들과 손님간 펼쳐진 씨름 대결. 씨름은 별다른 기술없이도 즐길 수 있는 놀이이다.|문화재청 제공

■남녀노소와 외국인까지 즐길 수 있는 샅바씨름

샅바를 잡으니 맨몸이나 허리띠 만으로 잡고 하는 씨름보다 승부를 내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게다가 다리와 허리에 매는 한국 특유의 샅바 덕분에 다리씨름의 다양한 기술이 생겼다.

상대의 다리를 지레대로 삼아 공격하고, 상대의 다리를 잡아 다양한 기술로 승부를 내는 것이 한국 씨름의 특징이다. 힘이 약한 사람도 샅바를 이용한 기술로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면 승리할 수도 있다. 그랬으니 아메노모리 호슈가 ‘힘보다 꾀가 있어야 좋다’고 평한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씨름의 가장 도드라진 특징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다.

부상의 염려가 거의 없는 모래판이나 매트에서 샅바라는 끈 하나만으로도 상대와 겨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맨처음 샅바를 잡아보는 이 누구나, 심지어는 외국인까지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씨름을 즐길 수 있다. 선수 뿐이 아니라 모이는 사람, 누구나 참여해서 즐기는 놀이가 바로 씨름인 것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한국의 샅바씨름을 ‘고려기(高麗技)’라 따로 불렀다. 중국의 씨름인 ‘솔각’과 일본의 스모(相撲)가 손동작 위주인 것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이런 특징들은 각저총 벽화 등에 등장하는 고구려 씨름이 고려-조선을 거쳐 세시풍속의 다양한 놀이 형태로 퍼졌지만 씨름의 원형은 지금까지 변치않고 이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곧 지금 비록 땅은 남북으로 갈라졌지만 씨름은 1600~1700년 이상 공동체의 얼을 담아 지켜온 무형유산이라는 뜻이다.

2013년에 벌어진 외국인 씨름대회. 샅바를 잡으면 강한 상대의 힘을 역이용해서 무너뜨릴 수 있다.|문화재청 제공

■남북한 공동등재의 길 열린 씨름

지난 29일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 산하의 전문가 기구가 의미심장한 평가결과를 발표했다. ‘남북한이 각자 등재를 신청한 씨름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서 등재를 권고한다’는 것이었다. 남북한 씨름이 유네스코 유산으로 ‘적격판정’을 받은 것이다.

전문가 위원회는 원래 심사 결과를 등재(Inscribe), 정보 보완(Refer), 등재 불가(Not to inscribe) 세 등급으로 나눠 무형유산위원회에 권고한다. 이 결과는 이변이 없는 한 그대로 수용된다. 따라서 11월 26~12월 1일 모리셔스 포트 루이스에서 열리는 제13차 무형유산보호 정부간위원회의 최종 결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살펴보았듯 씨름의 남북한 각자등재에 만족할 수 없다. 이번 등재권고 판정에 따라 남북한 공동등재의 길이 활짝 열린 셈이기 때문이다.

남북한은 이미 아리랑(한국 2012년, 북한 2014년)과 김치(한국 2013년, 북한 2015년) 등을 각자 등록한 바 있다. 씨름 역시 남북한 각자(북한 2015년, 한국 2016년)가 등재신청서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낸 바 있다. 하지만 공동체의 얼을 담아 전승해온 무형유산에 무슨 군사분계선이 있으며, 무슨 분단이 있겠는가. “한반도 평화구축을 위해 씨름의 남북 공동등재를 추진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제안한 오드레 아줄레 유네스코 사무총장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씨름의 공동등재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소중한 디딤돌로 여겨야 할 것 같다.

(이 기사는 지난 10월 12일 한국문화재단이 개최한 국제 심포지엄 ‘민족의 공동유산 씨름’에서 발표된 심승구의 ‘한국씨름의 정체성’ 등을 참고했습니다. 또 2017년 5월 30일 문화재청이 개최한 ‘씨름’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된 허건식의 ‘문화적 자산으로서 씨름의 전승 활성화 방안’ 등 논문도 참고했습니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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