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차 못가는 골목에 설치한 소화기.. 주민들 "보기 흉하다"며 떼냈다

이벌찬 기자 2018. 11. 1.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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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쓸 수 있는 공용소화기, 지금까지 화재예방 규모 38억
3년간 52대 사라지고 78대 파손
지난달 11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의 한 골목에 비치된 공용소화기의 플라스틱 덮개가 깨져 비닐로 가려져 있다. /이태경 기자


"담장에 시뻘건 소화기가 붙어 있으면 흉하잖아요."

서울 도봉구의 한 구립어린이집은 최근 담장에 달렸던 공용 소화기 2대를 뗐다. 어린이집 관계자는 "소화기가 미관을 해친다는 지적이 있었다"고 했다. 어린이집은 큰길에서 100m 떨어진 좁은 골목에 있다. 폭 2.5m의 중형 펌프 소방차가 들어오기 어려워 긴급 상황 시 소화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도봉119안전센터 관계자는 "화재에 대비해 어린이집 동의를 받고 설치한 소화기인데 떼어내라고 하니 당황스럽다"고 했다.

주민 안전을 위해 쪽방촌이나 골목길 담장에 설치한 공용 소화기가 주민 반대로 철거·이전되고 있다. 대부분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다. 서울시는 2015년부터 소방차 진입이 어려운 2만184곳(6월 현재)에 '보이는 소화기'란 이름의 공용 소화기를 설치했다. 담장에 소화기 1~2대를 걸어놓고 누구든 필요할 때 쓰게 한다. 설치 비용은 총 6억6400만원이 들었다. 공용 소화기로 진압한 화재는 64건, 예방한 피해 규모는 38억원(6월 현재)에 달한다.

공용 소화기는 소방서에서 집주인의 허락을 받고 설치한다. 별도로 담장 사용료를 지급하거나 계약서를 쓰지 않기 때문에 집주인 마음이 바뀌면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 은평구 불광동 주민 박모(57)씨는 "소화기를 고정하려면 담장에 금속 고리 4개를 박아야 한다기에 설치하러 온 소방관을 돌려보냈다"고 했다. 도봉구 도봉동의 한 주택은 지난달 4일 공용 소화기 설치 반년 만에 "우스꽝스럽다"는 이유로 소화기를 떼어냈다. 강북구 번동의 한 주택 주인은 올해 초 "집을 팔아야 하는데 소화기 때문에 제값을 못 받는 것 같다"며 소화기 제거를 요구했다. 시 관계자는 "전화로 설치 동의를 받고 찾아갔는데 '내 집 말고 이웃집에 설치하라'며 생떼를 쓴 주민도 있었다"고 했다.

공용 소화기 도난·훼손도 종종 일어난다. 2015~2017년 3년간 공용 소화기 52대가 도난당했고, 78대가 훼손됐다. 지난 9일 본지가 서울 마포구 동교동 골목 공용 소화기 20여대를 확인한 결과 2대의 플라스틱 덮개가 망가져 비닐로 덮여 있었다. 소방서 관계자는 "차가 후진하다 들이받거나 취객이 분풀이로 망가뜨리고 간다"며 "화재 때 사용한 소화기가 바닥에 굴러다니거나 없어진 경우도 많다"고 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회가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게 되면서 공공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만으로 개인의 희생을 바라기 어렵게 됐다"며 "공용 소화기 설치에 동의하는 집주인에게는 지방세 감면 등 혜택을 주거나 주민들이 추첨을 통해서 설치할 집을 정하는 등 스마트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내년부터 공용 소화기 1만대를 추가로 설치한다. 노점상 밀집지역·고시원·학원가 등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시 관계자는 "내부에서도 시민의식에만 기댈 것이 아니라 포상제 등 대책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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