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스포츠 뿌리를 찾아서⑦-조선체육회 출범의 기운이 샘솟다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2019년 역사적인 제100회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 서울)를 앞두고 익산시를 비롯한 전라북도 일원에서 열린 제99회 전국체전이 지난 18일 막을 내렸다. 1920년 7월 창립한 조선체육회(오늘날 대한체육회)는 그해 가을 전국체전의 기산점이 되는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개최해 100여년 뒤 후손들이 프로 야구와 축구 월드컵에 열광하고 조기 축구와 직장 야구, 3-3 농구, 주말 골프를 즐기는 스포츠 환경의 든든한 발판을 마련했다. 한국 스포츠 ‘선사 시대’에 선각자들은 이 땅에 스포츠를 도입하기 위해 어떻게 설계하고 어떤 활동을 했을까. <편집자 주>
우리나라 체육 발전에 결정적인 구실을 한 서울YMCA 운동부가 태어난 것은 1906년 4월이다. 같은 해 6월 신흥사에서 서울YMCA 운동회를 갖고 1등상으로 은장 상패를 수여했다. 이 은장 상패가 우리나라 운동회에서 수여된 메달의 시초로 전해지고 있다.
서울YMCA는 야구, 농구, 배구 등 근대 스포츠를 도입해 보급했을 뿐 아니라 1908년 12월 회관을 준공하고 1916년 5월 우리나라 최초의 체육관을 건립한 뒤 시설과 지도자를 함께 갖춘 이 땅 내 으뜸의 체육 단체로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대한국민체육회는 우리나라 병식체조(兵式體操)의 개척자이자 근대 체육의 선구자로 꼽히는 노백린의 주동으로 1907년 10월 탄생했다. 이 단체는 취지문에서 지육, 덕육에 견줘 우리나라의 체육이 뒤떨어져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올바른 국민 교육을 위해서는 체육의 중요성을 깨우쳐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말았다.
1909년 1월 도쿄의 대한유학생감독부에 모인 유학생들은 대한흥학회를 결성하고 그 안에 운동부를 뒀다. 여기에는 윤기현, 변희준 등이 몸담았다. 이 운동부는 조국의 체육계를 계몽하고 새로운 스포츠를 보급 발전하기 위해 윤기현을 운동부장으로 뽑아 그해 여름방학을 이용해 25명의 회원들이 7월 21일부터 서울의 각 학교를 돌며 시범 경기를 하고 경기 지도를 했다. 이들은 평양, 개성, 선천, 안악 등을 순회하며 지방 체육 계몽에도 힘썼다.
1909년 7월 이상필 등이 동대문 밖 창신동에서 조직한 사궁회는 우리 민족 고유의 무예 스포츠인 활쏘기의 보급을 위한 단체로 당시 거센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 고유의 체육 문화를 보존 유지하기 위한 조직이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체조연구회는 서울 시내 학교의 체조 교사인 조원희, 김성집, 이기동 등이 주동이 돼 1909년 10월 24일 조직된 단체로 체조의 이론과 실제에 관한 여러 문제들을 연구하면서 체조 지도자의 자질을 향상하는 데 이바지했다.
청강구락부는 중동학교 재학생인 최성희, 신완식 등이 1910년 2월 만든 단체로 매주 수요일과 일요일에 축구 경기를 치렀으니 우리나라 최초의 학교 축구부로 볼 수 있다. 성계구락부는 상공부의 유지들이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만든 조직으로 정구, 활쏘기, 바둑, 장기 등의 설비와 기구를 갖춰 각자의 기호에 맞는 취미 활동을 장려했으나 자세한 활동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경성체육구락부는 1914년 12월 미국인 언더우드, 영국인 데이비슨 등이 주동이 돼 조직한 외국인 체육 구락부로 서울 정동의 민가를 빌려 놀이와 스포츠를 즐기도록 프로그램을 짰다. 이 구락부는 기본 자산을 1주당 500원인 주식 61주를 팔아 마련했다. 1주 이상을 사야만 회원이 될 수 있었고 운영비는 기본 자산의 이자로 충당했다. 그러나 외국인이라도 지나인(중국인)은 회원이 될 수 없다는 조항이 회칙에 있었다. 민족 차별 회칙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부르짖은 민족자결주의에 자극 받아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난 1919년 3·1독립 만세 운동에 큰 충격을 받은 일제가 우리 겨레를 달래기 위해 무단 통치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이른바 문화 정치를 내세운 1920년 전국 곳곳에서 여러 학교의 맹휴가 일어났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학업을 충실히 해야 한다며 맹휴에 돌입한 학생들은 여러 가지 조건을 학교 측에 제시했으며 그 가운데에는 체육의 충실화도 들어 있었다.
1920년 6월 휘문고등보통학교의 맹휴 조건은 *고명한 선생님을 더 초빙할 것. *완전한 도서관을 설립할 것. *지방에서 유학하려 상경한 유학생 300명을 수용할 만한 기숙사를 설립할 것. *400명 이상의 학생을 수용할 만한 완전한 강당을 설비할 것. *화학 실험실 기구를 완비할 것. *교실을 증축할 것. *박물 표본을 완전히 설비할 것. *학생의 운동을 장려하기 위해 야구, 축구, 정구, 스케이트, 보트와 그 외 운동에 필요한 기구를 설비할 것 등이다.
또 휘문고등보통학교의 맹휴가 일어난 지 한 달 뒤인 7월 일어난 배재고등보통학교의 맹휴 조건도 *병식체조를 가르칠 것. *조선어(우리말)를 가르칠 것. *조선 역사를 가르칠 것. *이화학 기계를 수리할 것. *교원을 많이 초빙할 것 등으로 두 학교 모두 스포츠와 체육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 젊은이들의 강건한 체력과 정신력이 국권 회복의 밑받침이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894년 갑오경장을 전후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한 근대 체육은 당시 열강들의 침략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국가 주의 체육으로 받아들여졌다. 정부와 각급 학교 그리고 민간 단체들은 국민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몸과 마음을 강건히 해 나라 지키기에 나서도록 했다. 1910년 일제가 한일병탄으로 우리나라를 집어삼킨 뒤 특히 학교 체육을 동화정책의 수단으로 삼아도 이에 맞설 우리의 민족주의를 바탕 삼은 한반도의 통합 체육 조직은 아직 탄생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일제의 문화 정치 이행에 따라 우리말 신문들의 창간이 허용되고 그렇게 창간된 신문들의 한결같은 주장과 후원에 힘입어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 창립 기운이 높아진다. 체육을 통한 민족 자주성 확립과 항일 투쟁을 기둥으로 삼는 민족 체육 운동이 어둠 속에서 밝은 새아침을 맞이하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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