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 당한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든 건 경찰·검찰·법원"

허진무 기자 2018. 10. 29. 22:0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ㆍ신고 해마다 늘어 지난해 27만여건…검거 13%, 구속은 1%
ㆍ가해자 함께 조사, 대부분 집행유예, 재발 방지 등 관리 미흡
ㆍ광화문서 여성단체 집회 “상담조건부 기소유예 폐지하라”

“가정폭력, 국가는 뭐합니까”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서 여성단체들이 주최한 ‘국가의 가정폭력 대응 강력규탄 시민사회 기자회견’이 열렸다. 참가자들은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이혼한 아내가 전남편에 의해 살해당한 강서구 살인사건이 국가의 방관 때문에 발생했다면서 강력한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가정폭력 피해자 ㄱ씨는 2001년부터 2016년까지 결혼생활 16년 동안 남편에게 폭행을 당했다. 폭행은 ㄱ씨가 임신했을 때도 멈추지 않았다. 늑골이 부러지고 목이 졸려 기절하기도 했다. 딸이 울면 남편의 분노가 더 심해져 ㄱ씨는 딸이 7개월이 됐을 때 친정에 맡겼다. 이혼을 하고도 폭력과 협박은 이어졌다. 남편은 ㄱ씨의 집을 찾아와 “죽이겠다”며 현관 도어록을 부수기도 했다. ㄱ씨의 목에는 남편이 흉기로 위협한 흉터가 남았다. ㄱ씨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극심한 폭행과 협박으로 정신이 무너져 아무 저항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남편에 대한 극심한 공포로 수면제와 항우울제를 처방받고 있다. 상해·협박 등 혐의로 기소된 남편은 지난 1월 1심, 5월 2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ㄱ씨가 말했다. “가정폭력 피해자인 저를 더 처참하게 밟은 이들은 경찰, 검찰, 법원입니다. 이 나라는 사람이 죽어야만 관심을 가져주나요.”

ㄴ씨는 미성년자 시절 아버지에게 수차례 폭행을 당했다. 아버지는 ㄴ씨에게 흉기를 들이대고 “찔러 죽이겠다”거나 라이터를 들고 “집을 불태우겠다”고 협박했다. 참다 못한 ㄴ씨는 ‘나 자신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경찰에 신고했다. 출동한 경찰은 ㄴ씨와 아버지를 같은 장소에서 조사했다. 경찰은 “그래도 아빤데 신고를 하냐”,“아빠 집에 있기 싫다는 게 말이 되냐”며 ㄴ씨를 타일렀다. 수차례 아버지와 자신을 떨어뜨려놔 달라고 애원했지만 경찰은 도와주지 않았다. ㄴ씨는 “난 그저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 몸도 마음도 멍든 아이를 국가는 지켜주지 않았다. 아무 데도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다”고 말했다.

가정폭력 신고 건수는 해마다 늘어난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강창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찰청에서 받아 29일 공개한 자료를 보면, 지난해 신고 건수는 27만9082건으로 2013년 16만272건과 비교해 5년간 약 74% 증가했다. 검거 건수도 2013년 1만6785건에서 지난해 3만8583건으로 5년간 2배 이상 늘었다. 하지만 신고 건수 대비 검거율은 평균 13%에 불과했다.

검거된 가정폭력사범 중 구속 비율은 1%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찰청에서 받아 지난 3일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15년부터 올해 6월까지 가정폭력사범 16만4020명 가운데 구속된 이들은 1632명으로 0.995%에 그쳤다. 검거된 이들 중 99%에 달하는 16만2388명이 풀려났다. 피해자의 75%는 여성이었다.

가해자 처벌도 약해지는 추세다. 경찰청이 펴낸 ‘2017 경찰백서’를 보면 2011년 18%였던 가정폭력사범 기소율은 2016년 8.5%로 떨어졌다. 가정폭력사범이 상담소에서 성실하게 상담받는 것을 조건으로 검사가 기소유예 처분을 할 수 있는 ‘상담조건부 기소유예 제도’가 처벌을 무력화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제도가 시행된 이유는 가정폭력처벌법의 제정 목적이 ‘처벌’보다는 ‘가정 유지’에 있기 때문이다. 가정폭력처벌법 제1조는 “가정폭력범죄로 파괴된 가정의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가꾸며 피해자와 가족구성원의 인권을 보호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한다. 지난 3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이 제도를 폐지하라고 한국 정부에 권고한 바 있다.

가해자가 다시 가정폭력을 일으키지 않도록 감시해야 하지만 사후관리는 미흡하다. 지난 22일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서 한 여성이 전남편에게 살해당한 사건도 피해자 가정이 ‘재발우려가정’으로 지정됐던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처음 가정폭력 신고가 있었던 2015년 2월 피의자 김모씨(49)를 현행범으로 체포하고 재범 위험성 조사표를 작성했다. 당시 김씨는 13점 만점에 8점이어서 A(위험)등급으로 분류됐다. 지난해 12월 기준 재발우려가정총 1만1992곳 중 A등급은 4449곳인 것으로 나타났다.

숨진 여성의 친구 ㄷ씨는 이날 한국여성의전화 등 690개 여성단체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친구에게 ‘숨어 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며 울었다. ㄷ씨는 “친구가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사는 것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봤지만 도울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가해자가 약한 처벌을 받고 시간이 흘러 출소하면 죽은 친구의 가족은 무서운 고통 속으로 돌아갈 것”이라며 강력한 처벌을 호소했다. ㄱ·ㄴ씨도 강서구 살인사건 엄중 처벌을 촉구하는 이날 기자회견에 나와 증언했다.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