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나는 임시정부의 품 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유석재 기자 2018. 10. 18.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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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당시 비화 담은 회고록 펴낸 김자동 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이 화를 내시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늘 인자하고 온화하게 대하셨죠."

김자동(90) 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은 "50년 넘게 나이 차가 나는 백범 선생을 친구들은 '할아버지'라고 했으나 나만은 '아저씨'라고 불렀다"고 회고했다. 김 회장의 조부인 동농 김가진(1846~1922)을 존경한 백범이 김 회장의 아버지인 독립운동가 김의한(1900~1964)에게 '형제를 맺자'고 제의했기 때문이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이 사무실 안 옛 임정 요인들의 숙소를 재현한 미니어처 앞에 앉았다. 어머니가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김구 선생이 어린 김 회장을 품에 안은 모습이 보인다. /장련성 객원기자

김자동 회장은 최근 회고록 '영원한 임시정부 소년'(푸른역사)을 출간했다. 그는 "나는 임시정부의 품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고 말했다. 대한제국 대신이었던 조부는 나라가 망하자 모든 것을 버리고 상하이(上海) 임시정부로 망명했다. 일가족의 독립운동은 아버지 김의한과 어머니 정정화(1900~1991)로 이어졌고, 그 속에서 태어난 김 회장은 열여덟 살 광복을 맞을 때까지 임정과 풍찬노숙을 함께했다. 상하이에서 항저우, 난징,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으로 이어지는 임시정부의 고단한 행로 속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지냈다.

회고록은 가족처럼 지내던 임정 요인들의 일상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어머니 정정화가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어린 김 회장을 품에 안고 있던 백범 김구, '할아버지'라고 불렀던 석오 이동녕(임정 주석)과 성재 이시영(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임정의 살림을 맡았지만 늘 꾀죄죄한 옷만 입었던 차리석과 조완구…. 광복군 5지대장 암살 사건에 치정 관계가 얽혀 있었다는 등 비화도 자신이 아는 대로 털어놨다.

광복이 되자 천신만고 끝에 고국에 돌아왔으나 험난한 길은 끝나지 않았다. 서울대 법대 재학 중 6·25 전쟁이 일어나 북한 의용군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간신히 풀려났으나 부친은 납북됐다. 조선일보와 민족일보에서 기자로 일했고,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이 사형당한 뒤 언론계를 떠났다. 민주공화당의 요직 제안을 거부하고 민주화와 평화통일 운동의 길을 걸었다. 2004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창립해 회장으로 취임했다. "내년 임정 수립 100주년을 목전에 두고 국립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 건립 결정을 이끌어낸 성과가 큰 보람입니다." 기념관은 옛 서대문구의회 자리에 내년 착공돼 2021년 완공될 예정이다.

김 회장은 "젊은 세대가 임정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1945년 여름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했을 정도로 줄곧 실질적인 독립운동을 이어 온 주체가 바로 임정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임정의 독립운동이 없었더라면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연합국이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제 책은 대한민국의 새로운 전환기에 바치는 작은 헌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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