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미투'의 상징, 이토 시오리는 울지 않는다
일본 최초 기자회견 연 성폭행 피해자
'한국 미투'와 만나 나눈 위안과 격려
[한겨레]
▶ 일본에서 성폭행 피해자 최초로 신분을 공개하고 기자회견에 나서 ‘일본 미투의 상징’이 된 이토 시오리가 한국에 왔다. 언론사 인턴으로 일하다 언론사 간부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3년 가까이 지나는 동안 그는 한시도 쉬지 않았다. 경찰과 검찰에 수사를 촉구하고 스스로 가해자를 쫓고 증거를 모았다. 그럼에도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검찰이 불기소 처분을 내리자 직접 기자회견에 나서고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책 <블랙박스>를 펴냈다. 한국을 방문해 ‘한국의 미투’와 깊게 교감한 그를 만났다.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거요. 계속 눈물이 나올 거요. 죽어야 잊히겠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가 말했다.
“당신이 그때 취한 행동은 최선이었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피해자 보호 시설인 ‘열림터’의 정정희 원장이 말했다.
‘일본 미투’ 이토 시오리(29)는 ‘한국 미투’가 전해준, 성폭행 사건 이후 처음 들어보는 공감과 격려의 말들을 붙잡고 울었다 했다. 혼자가 아니라는, 따뜻한 느낌이 차올라 나오는 눈물이었다.
이토는 지난해 5월29일, 일본에서 성폭행 피해자 최초로 얼굴을 드러내고 기자회견에 나서면서 ‘일본 미투의 상징’이 됐다. 고통에 눈을 떴을 때 강간당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던 날은 2015년 4월3일이었다. 저널리스트를 꿈꾸며 인턴으로 일하던 스물여섯살 이토는 프로듀서 자리를 알아봐주겠다고 해 만났던 야마구치 노리유키 <도쿄방송>(TBS) 워싱턴 지국장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공포와 불안에 떨다 5일 만에 찾은 경찰서에서 남성 수사관은 “자주 있는 일이라 사건으로 수사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담당 검사는 “블랙박스 같은 밀실에서 일어난 일”이라며 2016년 7월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검찰 불기소 처분이 확정되자 이토는 “현재의 사법 시스템이 이 사건을 심판할 수 없다면 사건 경위를 밝혀 사회에서라도 널리 의논할 수 있게 해야 한다”며 지난해 5월 기자회견을 열었고, 5개월 뒤에는 자신의 얼굴을 표지로 한 <블랙박스>를 펴냈다.(한국어판은 지난 5월 출간)
세미나 참석 등을 위해 한국을 찾은 이토를 지난 9일 오후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그는 인터뷰 직전 한국의 ‘미투’와 만나고 온 참이었다.
인턴 시절 언론사 간부가 성폭행
“블랙박스 안 사정 알 수 없다”며
여러 증거에도 검찰 불기소 처분
일본 최초 얼굴 드러내며 기자회견
<블랙박스> 책으로도 피해 알려
2차 가해에 한때 ‘죽음’까지 생각
한국 와 위안부 피해자, 활동가들 만나
“죽을 때까지 눈물이 나올 거요”
고통 안고 위안 나누며 미투 연대
얼마나 더 지나면 잊을 수 있을까
―인터뷰 직전에 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고 왔다고 들었다.
“사실 아직까지도 그분들을 만나고 나서의 감정 처리가 되질 않는다. 너무 절절한 말들을 듣고 왔다.”
―어떤 말들이 그리 절절했나.
“제가 여쭸다. ‘전 성폭행 피해를 당한 지 3년쯤 지났는데 얼마나 더 지나면 잊을 수 있을까요? 어느 정도 지나면 울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될까요?’ 그랬더니 연세가 93살인 김복동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고 눈물이 나올 거요. 죽어야 잊히겠지.’ 김복동 할머니는 8년간 위안부 생활을 하셨다고 했다. 난 딱 하루였지만, 그래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일이 될 것 같다. 그건 바로 성폭력이 인간의 존엄성에 상처를 입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또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들에게까지 아주 장기간 영향을 미친다. 바로 그 때문에 분쟁지역에서 ‘성’을 무기로 사용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서는 종종 ‘이건 단순히 남녀 사이의 문제일 뿐’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발언이다. 올해 노벨평화상이 전쟁 성폭력 피해자를 돕는 이들에게 돌아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미투 운동’(나도 고발한다 운동)은 결국 국경도 세대도 뛰어넘은 전세계 여성들의 ‘고통의 연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5~7일에 열린 국제탐사저널리즘 아시아총회에 ‘아시아의 미투 보도’ 발표자로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그 자리에서 내가 일본에서 성폭행 피해 폭로를 하며 언론 보도와 관련해 어떤 경험을 했는지 이야기했다. 그 자리에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기자들이 있었는데 국경을 초월해 강한 연대감이 느껴졌다. 한 중국 기자는 중국 국영방송에서 일어난 성폭행 사건을 취재하고도 보도할 수 없어 페이스북에 올렸다가 다시는 기사를 못 쓰는 처지가 됐다고 했다. 파키스탄에서 온 여성 기자는 손을 들고 일어나 ‘나도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 미투다. 이 사실은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발표는 어떤 내용이었나?
“아시아 국가, 특히 일본 같은 나라에서 ‘미투’를 외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준비한 발표였다. 내 경험을 바탕으로 성폭력 피해자들을 인터뷰할 때는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에 관해 이야기했다. 우선 기자들이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라는 마음을 갖고 질문을 던져주면 좋겠다. 믿음을 보여주면서 인터뷰를 해달라. 이런 일에 대해서 인터뷰하는 것, 사건을 다시 얘기하는 그 자체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달라. 지금도 이렇게 인터뷰를 하고 집에 돌아가면 몸이 아프다. 질문을 던지기 전에 이런 질문을 왜 하는지, 미안한 질문이면 하다못해 ‘부장이 이런 질문을 해달라고 해서 묻는데 죄송합니다만 질문해도 될까요?’ 이런 얘기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이 사람이 나를 의심하고 있구나 이런 느낌이 들지 않게 배려했으면 한다.”
―책에 성폭행 당했을 당시의 고통을 ‘죽임을 당했다’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여전한가.
“한국에 와서 묵은 호텔방이 내가 성폭행을 당했던 호텔의 구조와 너무 비슷해서 사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지금도 갑자기 막 눈물이 쏟아지고 내가 왜 이런 피해를 당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금까지 위험한 취재도 했고 그 과정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적도 있지만 그게 이렇게 공포스럽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런데 강간을 당한 기억은 계속 나를 괴롭힌다. 사람들이 내게 ‘3년이나 지났으니 꽤 많이 지났네. 잘 극복하고 있어’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나는 여전히 살아남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매일매일이 서바이벌(생존)이다.”
―사건이 영국 <비비시>(BBC) 다큐멘터리, 미국 <뉴욕 타임스> 보도 등으로 외국에 알려지면서 “일본 망신 시킨다”는 공격이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에 와서 위안부 피해자를 만나는 일은 힘든 결정이 아니었나?
“그분들이 고령이시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빨리 만나뵙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기자회견을 하고 <블랙박스>라는 책을 낸 뒤로 저를 ‘꽃뱀’, ‘창녀’, ‘위안부’라고 욕하는 소리를 들었다. 일본인이라면 부끄러워서 이런 성폭력 피해를 얼굴 드러내고 얘기 못할 텐데 저렇게 나서는 걸 보니 중국인이나 한국인 아니겠냐, 위안부 아니겠냐 이런 식이었다. 나를 비난하는 단어로 왜 ‘위안부’가 나왔는지 이해가 안 된다. 성폭력 피해는 어떤 인종이라도 당하면 안 되는 것인데 왜 그런 얘기가 나오는 것인지 모르겠다. 자신의 피해 사실을 당당히 말한 위안부 할머니들은 내게 영웅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본인이 어떤 시대, 어느 장소에서 태어날지 선택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피해를 당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어느 누구라도 당할 수 있는 일이기에 우리들이 나서서 이 고통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미투’의 시작점은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야 할 것이다. 1991년 8월14일 김학순 할머니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을 최초로 밝히고 나섰다.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이 ‘집안의 수치’가 될까 말 못하고 살던 피해자들이 ‘미투’를 선언하기 시작했다. 김복동 할머니도 1992년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임을 고백했다. 열다섯살 되던 해 위안부로 끌려간 그는 8년을 지옥 속에 살아야 했다. 수많은 군인들이 그를 짓밟았지만 지금껏 가해자를 향한 ‘유죄’ 판결도, 제대로 된 사과도 없다. 연로한 몸으로 그는 지금껏 일본대사관 앞 길 위에서 ‘일본군 성노예제 범죄’에 항의하는 수요집회에 참여한다. 지난 10일이 1356번째 시위였다.
처음 들어본 말 “당신의 행동이 최선이었다”
―한국에 와서 성폭력 피해자 지원센터인 해바라기센터도 방문하고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들도 만난 것으로 안다.
“한국에는 지자체마다 성폭력 피해 지원을 위한 기관과 상담소가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고 배울 점이 많다고 느꼈다. 그리고 성폭력상담소에서 처음으로 이런 말을 들었다. ‘당신이 그때 취한 행동은 최선이었다’는 말이었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그때 왜 그렇게밖에 못했을까 하며 자기 스스로를 원망하게 된다. 나 역시 사건 뒤로 많은 말을 들었지만 ‘네가 취한 행동이 최선이었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사건 당시 일본에서 지원센터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못했나.
“사건 직후 넋이 나가 혈액검사나 디엔에이(DNA) 채취를 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점점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도 못했다. 인터넷을 검색해 나온 성폭력 피해자 지원 단체에 전화를 걸자 ‘일단 센터로 나와달라’고 했다. 어느 병원에 가서 무슨 검사를 받으면 되는지 가르쳐달라고 했지만 ‘직접 면접을 하지 않고서는 정보를 제공할 수 없다’고 했다. 내게 일어난 일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 옷을 전부 빨고 멍과 피로 얼룩진 몸을 씻었다. 임신 걱정에 생각이 미쳐 가까스로 산부인과를 찾았는데 의사는 ‘언제 실수했냐’고 물으며 사후 피임약 처방만을 했다. 어딘가에서든 어떻게 대처하면 되는지 가르쳐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일본 검찰은 이토 사건이 ‘밀실’에서 일어났기에 성폭행을 입증할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며 기소를 하지 않았지만 다른 성폭행 사건과 비교해 그의 사건은 증거가 적은 편이 아니었다. 택시 기사와 호텔 청소부의 증언, 이토의 속옷에서 나온 야마구치의 디엔에이, 호텔의 폐회로텔레비전(CCTV) 화면에 찍힌 둘의 모습 등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러한 증거가 수사기록에 어떻게 반영됐는지, 검찰이 어떤 증거를 채택했는지 이토는 알 수 없었다.
사건 당일 이토는 <도쿄방송> 워싱턴 지국에 프로듀서 자리를 알아봐준다는 야마구치의 말에 그가 정한 식당을 찾았다. 술을 그리 많이 마시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다. 약물 투입이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이토가 깨어났을 때는 호텔에서 성폭행을 당하는 중이었다. 탁자 위 노트북은 침대를 향해 놓여 있었고 녹화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당시 이들이 함께 탔던 택시의 기사는 “처음 탔을 때는 여성이 ‘근처 역에 내려달라’고 여러번 말했는데 어느 순간 조용해지더니 역 근처에 다다르자 남성이 호텔로 가자고 했고 내릴 때는 여성이 자력으로 내릴 수 없는 상태였다”며 “호텔에 두 사람을 내려주는데 호텔 보이가 걱정스러운 듯 보았고 차 안에는 토사물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호텔 입구 시시티브이에는 걷지도 못하고 짐짝처럼 안겨 가는 이토의 모습, 그걸 지켜보는 호텔 벨보이의 모습이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야마구치는 “방에 침대가 두 개여서 각자 잤는데 화장실에 다녀온 이토가 내 침대로 들어와 유혹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건 당일 호텔 청소부는 “침대는 둘 중 한쪽만 사용됐고 피가 묻어 있었다”고 증언했다.(<블랙박스>)
―당시 수사를 지켜보던 심정은 어땠나.
“일본에서는 지난해까지 성폭행 사건이 피해자가 직접 고소를 해야 하는 친고죄였다. 강간죄 관련 형법은 메이지 시대에 제정된 이후 110년이나 커다란 개정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지난해 형법 개정으로 친고죄 조항은 폐지됐다. 그럼에도 개정 이후 성폭행 신고를 했던 한 여성이 경찰 수사관으로부터 나와 똑같은 이야기, ‘너무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 사건으로 수사하기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성범죄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수사기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유엔 마약범죄 사무소의 2013년 데이터를 보면 인구 10만명당 강간 사건 수는 스웨덴이 58.5건, 영국이 36.4건, 미국이 35.9건, 일본이 1.1건이다. 그만큼 일본에서는 신고가 안 되고 있다. 일본 남성 수사관들은 성폭행 장면 재현을 여러번 시키기도 한다. 나 역시 남성 수사관 3명 앞에서 매트에 누워 인형으로 성폭행 장면을 재현해야 했다.”
“언론계에서 일 못할 거”라던 경찰
꿈 포기 않고 해외 미디어 문 두드려
“진실 추구하는 삶, 포기하지 않을 것”
같은 고통 여성에게 하고 싶은 말
“당신의 행동은 최선이었습니다
…살아있어 줘서 감사합니다”
일본에서 좀처럼 불붙지 않는 ‘미투’
검찰의 불기소 처분 뒤 이토는 검찰심사회에 심사를 요청했다. 일본에서는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해 시민들로 구성된 검찰심사회가 기소를 하도록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검찰심사회 역시 검찰의 불기소 결정에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냈다. 성폭행 가해자로 지목된 야마구치는 사건 이후에도 아베 신조 총리에 대한 책 <총리>를 내고 정치 해설자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일본 사회에서는 좀처럼 미투 운동에 불이 붙지 않았다.
―검찰의 불기소, 이후 검찰심사회의 결론을 듣고 났을 때 어떤 생각을 했나?
“불기소를 알리는 종이에는 ‘준강간 혐의 불충분’과 ‘증거 부족’이라는 단어만 쓰여 있었다. 검찰심사회에 심사를 요청할 때 내가 증거를 전부 다시 모아 제출해야 했다. 어떤 자료가 어떻게 검토됐는지 알 수도 없어 정보공개 청구를 했더니 거의 모든 내용에 검은색 사인펜으로 색칠이 된 문서가 내게로 왔다. 알 수 있던 사실이라고는 내 사건을 심사했던 검찰심사회 11명의 남녀 비율이 7 대 4였고 평균연령이 50대 이상이었다는 것뿐이었다.”
―그 뒤 지난해 기자회견을 했을 때 여론과 언론 보도는 어땠나.
“일본 사회는 성폭력 피해에 대해 공공연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그 분위기를 바꾸겠다는 생각을 하고 기자회견을 나갔는데 많은 이들이 ‘피해자다움’의 정해진 상이 있다며 검정 정장에 흰색 셔츠를 단추를 모두 채워 입어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피해자는 자기 몸을 감춰야 한다는 공식이 싫어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셔츠를 평소 입던 방식대로 입었다. 회견 이후 어떤 기사에 ‘단추를 열어 가슴을 보여준 이토 시오리’라는 식으로 보도가 나갔고 비난이 쏟아졌다.
‘죽어야 하나’ 생각도 했다. 하지만 내가 죽으면 ‘봐라, 성폭행 당했다고 나서서 얘기하니까 결국 저렇게 된다’는 말이 나올까 봐 버텼다. 그런 나쁜 선례로 남고 싶지 않았다. 내가 더 떳떳하게 살면서 밖에서 웃으면서 행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와 관련한 기사는 대부분 가십거리로 다뤄졌다. 이 사건과 사건을 처리하는 일본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싶었던 부분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어떤 여성 기자들은 자신들이 내 사건을 기사화하려고 했는데 간부들이 막아 기사화를 못 했다고도 했다.”
―기자회견 이후 최근까지의 삶은 어떤가?
“성폭행 피해 사실을 이야기한 뒤 여러 비난과 협박을 받으며 나와 내 가족이 위험하다고 느꼈다. 그러던 중 한 인권단체의 도움으로 영국에 건너가게 됐고 그곳에서 책을 썼다. 일본에 있었더라면 <블랙박스>는 절대 쓸 수 없었을 것 같다. 사실 그동안 일본에서 외출할 때면 너무 무서워서 변장을 하고 다녔다. 그런데 책을 낼 무렵에는 세계적으로 미투 운동이 확산되는 시기여서 용기를 얻었다. 아, 나 혼자가 아니구나 싶어서 용기를 얻었다. 신분을 드러내며 피해 사실을 폭로한 나를 그동안 가족들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미투 운동이 확산된 뒤 가족들도 나를 이해해주게 됐다. 그래서 이번 여름부터는 일본에서 변장을 하지 않고 다닌다. 사실 내가 나고 자란 나라에서 나답지 못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 슬펐다. 이제 나 스스로 떳떳하게 살자 생각했다. 막상 변장하지 않았더니 ‘응원한다’고 말을 걸어주는 사람도 있고 ‘나도 그런 일을 당했다’며 막 우는 분들도 있었다. 온라인상에서는 협박도 있고 스토커도 있는 것 같았지만 오프라인에서 날 위협하는 사람은 없었다.”
―일본의 미투 운동 분위기는 어떤가?
“아주 조금씩 바뀌고 있긴 하지만 한국처럼 문화계, 법조계 이런 식으로 굵직하게 확산되는 분위기는 아니다. 그래도 지난 4월에는 재무차관에게 추행을 당한 한 여기자가 나를 보고 용기를 얻었다며 미투에 동참했다. 안타깝게 그분도 이후에 엄청난 2차 가해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일본 사회 안에서 익명으로라도 성폭력 피해를 폭로한 것은 몇건 되지 않는다. 일본 사회 분위기상 자기 피해를 나서서 얘기하는 방식의 미투 운동을 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 대신 모두가 다 같이 외치자는 ‘위투’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다.”
“김지은씨 정말 감사합니다”
―한국이 그나마 지원센터 현황이나 미투 운동 확산 분위기 등에서 낫다고 했지만 한국에서도 미투는 쉽지 않다. 김지은씨 사건도 무죄 판결이 났다.
“무죄 판결이 나고 나서 이에 대해서 항의하는 의미로 2만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시위를 했다고 들었다. 2만명이라는 숫자를 듣고 너무 깜짝 놀랐다. 이게 한국과 일본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에는 이렇게까지 목소리를 내서 뭔가에 항의를 하는 일이 좀처럼 없다. 거리에 나온 사람이 2만명이라면 마음속으로 응원하는 사람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나 역시 김지은씨를 매우 만나고 싶다.”
지난 8월14일 한국의 법원(서울서부지법 형사11부)은 김지은씨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성폭행 의혹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안 전 지사의 정무비서였던 김지은씨가 뉴스 생방송 스튜디오에 나와 지난해 7월부터 여러차례 성추행과 성폭행 피해를 당했다고 털어놓은 지 5개월 만이었다.
―김지은씨를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김지은씨를 굉장히 응원하고 있다. 그분이 그렇게까지 목소리를 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내가 충분히 잘 알고 있다. 그분을 만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이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다. 비록 무죄 판결이 났지만 그분이 목소리를 냈기 때문에 사회가 그 목소리에 귀 기울여줄 수 있는 방향으로 변화가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분 덕분에 변화의 물결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수고했고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법원의 무죄 판결이나 검찰의 불기소 처분이 있고 나면 여론은 급격히 악화되기도 한다. 그 때문에 힘들진 않았나.
“불기소 처분이 나고 내가 얼굴을 공개하며 기자회견에 나섰을 때 ‘도대체 왜 저런 이야기를 하지?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자기한테 돌아오는 이득이 없는데 왜 저러지? 혹시 정치인에게 부탁을 받았나?’ ‘나중에 정치권으로 가려나?’ ‘유명세를 얻으려고 저러나?’ 하는 식의 비난과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인터뷰 과정에서 그런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 하지만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나면 대부분 내 생각을 이해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이토나 김지은씨처럼 용감하게 나선 여성들이 사법부에서 이러한 판단을 받았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이들도 많을 것 같다.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던 이들이 노벨평화상을 탔다는 소식에 희망을 느끼다가도 미국에서 성폭력 의혹에도 불구하고 브렛 캐버노가 연방대법관으로 취임했다는 사실에 절망을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계속 소리를 내면서 이런 피해자가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결과가 따라주지 않았고, 법률이 변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우리를 이해해주지 않았더라도 이 과정을 보고 시민들의 의식 자체는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2만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거리로 나왔고 다른 피해자들도 ‘나를 도와달라’며 목소리를 내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해온 활동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진실을 믿는다
―현재 여러 나라를 다니며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 사건 뒤 일본에서 저널리스트가 되는 길은 막힌 건가.
“어릴 때부터 저널리스트를 꿈꾸며 밤낮없이 아르바이트를 해 학비를 벌어가며 유학을 마쳤다.(이토는 미국 대학을 졸업했다) 처음 피해 신고를 할 때 수사관으로부터 ‘상대는 유명인에 지위도 있고 당신과 같은 업계에서 일하고 있지 않나. 앞으로 언론계에서 일을 못 하게 될지 모른다. 지금까지 노력한 당신의 인생이 물거품이 될 거다’라는 말을 들었다. 일본에서 일하는 것 자체를 포기할 각오가 필요했다. 처음에는 일본 국적인 내가 해외 취업 허가를 받을 수 있을지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해외 미디어의 문을 두드렸고 단발 취재나 다큐멘터리 제작 일이 조금씩 들어오게 됐다.”
―진실을 밝히기까지 너무도 힘든 길을 걷고 있다.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었다고 했는데 아직도 그런 생각인가?
“나는 아직도 나의 진실, 당신의 진실을 믿는다. 숨기지 않고 단순해지는 것,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이 내겐 더 쉽다.”
―성폭력 피해를 당하고 고통받고 있을 여성들을 위해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성폭력 피해를 당하고 나서 그 사건에 대처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다. 내가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은 그럼에도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남아줘서 감사하다는 말이다. 무리하지 않아도 되고 그 일 때문에 너무 초조해하지 않아도 된다.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낄 때, 안심할 수 있을 때 이야기를 해도 충분하다. 한국의 성폭력상담소에서 들은 말을 돌려주고 싶다. ‘당신이 그때 취한 행동은 최선이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겁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줘서 감사합니다’라고 말이다.”
이토는 인터뷰 내내 몇번이나 울먹였지만 그보다 더 자주 환하게 웃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을 지나고 있었지만 천성이 밝은 사람이었다. 야외에서 사진을 찍는데 맑은 가을 날씨와 그의 미소가 잘 어울렸다. 앞으로도 이토는 계속 전세계를 다니며 저널리스트로,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살아갈 계획이다. 그 과정에서 늘 시간을 쪼개 수많은 ‘미투’ 피해자들과 손을 잡을 것이다. 결코 존엄을 잃지 않으려는 여성들의 세대와 국경을 초월한 연대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편하게 단추를 풀고 함께 웃으면서.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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