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끝뉴스] 엉터리 '공무원 연수'.. 적폐에 크고 작음이 있을까

정준호 입력 2018. 10. 6.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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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기준이면 해외연수 다녀온 우리나라 공무원들 전부 물러나야 될걸요.”

공무원 해외연수를 취재하면서 만난 한 북유럽의 가이드가 전한 말입니다. 1995년 스웨덴 부총리이자 총리 후보였던 모나 살린은 업무용 카드로 ‘토블론(TOBLERONE)’ 초콜릿을 샀던 사실이 보도되면서 결국 사퇴했습니다. 초콜릿을 포함 총 4회에 걸쳐 국민의 세금으로 구입한 34만원어치 개인용품이 창창한 정치인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지요. 유럽에서 수년간 활동하며 선진국의 도덕적 잣대를 체화한 이 가이드는 “공무원 해외연수를 진행하는 동안 감사원에 고발을 해야 할지 고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더 이상 못참아”… 여행사도 보이콧

한국일보가 지난 8월~9월 지적한 공무원(광역의원ㆍ광역단체장ㆍ지자체ㆍ정부부처 등) 해외연수의 문제점 기사와 관련해선 유독 제보 메일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제보자들은 이 같은 연수를 10년 이상 진행해온 여행사 대표와 가이드, 그리고 현직 공무원들이었습니다. 공무원 해외연수가 밥벌이기도 하고, 수혜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들조차도 “더 이상 봐줄 수가 없는 지경”이라며 적폐 청산을 위해 경험한 사례를 모아 호소했던 겁니다. 해외연수(해외여행이 더 어울리지만)란 명분 아래 관광하며, 허술한 증빙을 틈탄 ‘비행기깡’ 등 뿌리깊은 적폐는 해외연수 생태계에 공생하던 이들마저도 “내 세금이 정말 이렇게 쓰여야 하나”라며 혀를 차게 할 만큼 곪을 대로 곪아 있던 것이지요. 본보 기사에 달린 한 댓글은 “세금을 꼬박 내는 국민만 개돼지 취급을 받고 있다”라며 허탈해했습니다.

공무원들은 몰랐겠지만 연수를 진행해온 현장의 일부 여행사들은 이미 적폐에 동참하지 않는 움직임을 보여왔습니다. 보도 이후 이메일을 보내온 한 유명 여행사 관계자는 “특히 광역의원들이 요구하는 해외연수가 워낙 엉망인 데다 갑질이 심해 오래전부터 연수 진행을 맡지 않고 있다”라며 “밤문화를 체험하게 해달라거나 갑자기 관광일정을 넣어달라는 등 무리한 요구는 딱 잘라 거절하면서 최대한 제대로 된 연수를 진행하려 노력한다”라고 전했습니다. 이어 그는 “업계에서 악명 높은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을 포함 일부 기관은 여행사나 가이드들도 진행을 기피하는 등 적폐 중의 적폐는 피해오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한 여행사 대표는 보도 이후 본보와의 통화에서 “앞으로는 항공권 금액을 부풀리지 않고 필요한 비용은 공무원 측이 자비 부담할 수 있도록 진행하려 한다”라며 “더 이상 적폐에 가담하지 않겠다”라고 말했습니다. 본보 보도 직후 공무원 해외연수를 개선해 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수십 개가 올라 올 만큼 국민 역시 좌시하지 않겠다는 반응입니다.

◇미지근한 개선책… 내부 적폐청산이 우선

반면, 수십 년째 엉터리 해외연수에 취해있던 공무원 사회는 아직 미지근한 태도입니다. 본보가 기사에 언급한 공무원 중 일부는 “운 나쁘게 우리만 부패 공무원으로 낙인 찍혔다”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비행기깡으로 5,500만원을 부풀린 행정안전부 산하 지방자치인재개발원의 관계자는 보도 후 1주일이 넘은 시점에서 “여러가지 개선 방안을 찾는 중”이라는 흐릿한 답변을 내놨습니다. 해당 연수생들과 여행사의 소명이 있었냐는 질문에도 “답변하기 곤란하다“라고 답했습니다. 교통편 바꿔치기를 했던 경북 공무원교육원 관계자 역시 “증빙 서류가 현재 남아 있지 않다”라며 사실상 손을 놓은 상태입니다. 압도적인 여론에 정부가 직접 해외연수를 바로잡겠다고 나서긴 했지만 실효성은 미지수입니다. 행정안전부 지방인사제도과 관계자는 “지자체에 증빙 강화 관련 공문을 보냈으며, 내년 1월부터 적용되는 ‘지방자치단체 세출예산 집행기준’에 전자티켓(E-티켓) 증빙을 의무화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어 그는 “지자체가 알아서 준수해야 할 집행기준으로 따로 처벌 규정은 없다”라며 “시행 이후 적발은 감사의 몫“이라고 말했습니다. 감사원은 “연간 감사 계획에 따라 감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현재 공무원 해외연수 관련 감사에 대해선 답변이 어렵다”라며 “내년도 감사 계획은 여론 등 감사 필요성을 종합해 결정하기 때문에 (해외연수) 감사를 할 계획이라고 이야기할 순 없다”라고 답변했습니다. 원칙은 정비하겠지만 실천과 감사는 자율에 맡기겠다는 뜻인데요. 수십 년째 유사한 보도와 비판이 쏟아져도 아랑곳하지 않던 공무원들이 과연 공문서 몇 장에 관행을 깨부술지 모르겠습니다.

국정과제 1호인 ‘적폐청산’은 문재인 대통령 집권 2기 3대 과제 중 첫 번째로 꼽힐 만큼 정부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국정농단, 문화계 블랙리스트 등 모두를 분노하게 하는 굵직한 이슈가 다뤄지고 있지요. 하지만 국민은 피부에 와 닿는 ‘작은(?) 적폐’에도 분개합니다. 일자리 창출, 보편적 복지에 필요한 재원(세금)이 쟁점으로 떠오르는 상황에 내가 낸 세금이 제대로 쓰이는지는 정부 신뢰도와 직결되는 문제니까요. 사실 작은 적폐도 아닙니다. 지난 5년간 지자체가 쓴 국외연수 여비가 3,480억원에 정부 부처, 광역의원들 여비를 합치면 천문학적인 비용이 됩니다. 현 정부는 임기 내 공공부문 일자리 81만개를 만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필요한 일자리를 만드는 건 좋지만 뿌리 깊은 내부의 부조리 해결이 선행돼야 더욱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공무원 해외연수=세금으로 가는 공짜 해외여행’. 이 부조리한 인식을 깨기 위해 정부가 더 힘을 쏟아야 할 때입니다.

정준호 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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