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에메랄드그린과 비비추

기자 2018. 10. 5.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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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 소설가, 서강대 명예교수

작년 늦가을 옥상에 화단 조성

에메랄드그린과 비비추 심었다

에메랄드그린은 겨울 못 이기고

가지 내린 자세로 말라죽었지만

에메랄드그린이 한파 막아준 덕

비비추는 올가을 마침내 꽃 피워

사실은 올봄부터 이맘때 가을을 기다려왔다. 요새는 날씨 좋은 봄·가을은 짧아지고, 덥고 추운 여름·겨울은 길어져서 가을이 재빨리 지나가 버릴 것이 걱정됐다. 솔직히 말하면 오색 단풍으로 화려한 가을보다는 그 직전, 아직 온화한 기운이 살짝 남아 있는 지금 같은 때를 선호한다. 지나치게 푸른 기운이 쇠하고 나무의 잎들이 아직 가을옷을 입기 직전의 겸손한 가을이 좋다.

지난해 늦가을, 어쩌다 자그마한 옥상에 화단을 만들려는 마음을 먹게 됐다. 큰 위로가 필요했던 즈음이었다. 늦은 가을이었지만 무리를 하면서도 화단 조성을 끝냈다. 화단을 인조 흙으로라도 채우니 마음의 황량함이 벌써 줄어들었다. 내 주변에는 어떤 식물을 맡겨도 잘 키워내 파랑 손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여럿 있지만 나는 그들과는 정반대되는 사람이기에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다. 그늘 많은 옥상 화단에서도 잘 자란다는 꽃나무 이름을 전해 받고 나의 무지에 깜짝 놀랐다. 에메랄드그린(서양측백나무), 노랑조팝, 홍매자, 수수꽃다리, 좀작살나무, 비비추….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비비추 단 하나였다. 그것도 유행가 가사 덕분에 이름으로만.

요즈음은 원산지가 외국인 식물들이 많이 수입돼 그러려니 하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산행을 좋아하던 한 친지는, 일행이 난생처음 본 꽃나무라도 속명은 물론 학명까지 대어 주변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런데 세상보다는 나무와 꽃을 더 좋아해서 그랬는지 그는 일찍 세상을 떠나 버렸다. 오랜만에 그를 떠올리며, 나무와의 좀 더 구체적인 친교를 다짐해 봤다. 먼저 인터넷도 검색해보고 식물도감도 펼쳐봤다.

화단 모퉁이에 바람막이로 나란히 자리 잡은 세 그루의 사철나무에 속하는 에메랄드그린을 제외하면, 갓 심긴 꽃나무들은 보잘것없거나 씨가 땅 밑에 심겨 육안으로는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가을에는 아무 데나 씨앗을 흘려도 뿌리를 내린다는 얘기를 들은 터라 비록 뒤늦게 준비한 화단이지만 낙관적인 마음이 돼 정성 들여 물을 줬다. 날씨가 추워지자 이들이 추위에 밀려 자라기를 그칠까 걱정이 됐다. 기온이 따뜻해지는 시간대를 골라 물을 주면서 “너희들 잘 자라야 해. 이번 겨울은 꼭 잘 견뎌내자” 같은, 마치 나 자신에게 하듯이 용기를 북돋는 말로 대화도 시도했다. 이들 몇 포기의 꽃, 서너 그루의 나무가 나로 하여금 일기예보에 각별한 마음으로 귀 기울이게 했고, 거대한 우주의 기상 변화가 나의 작은 화단의 식물에 미칠 영향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쏟아붓게 했다. 강풍이 몰아친다는 일기예보가 있을 때는 잠을 설치기도 했다.

난간을 둘러싼 에메랄드그린의 품 안에 노랑조팝과 홍매자, 비비추 같은 작은 꽃나무나 씨앗이 안긴 모양 그대로 곧 시들어 버릴 것처럼 아슬한 면모를 유지하며 겨울이 느리게 지나갔다. 당장은 보잘것없고 쓸쓸한 이 화단의 식물들이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고 과연 봄에 싹을 틔울지 내심 의심이 들었다. 씨앗들은 그저 흙 속에서 영영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강추위가 닥쳤다. 나는 이들의 생사에 내 겨울의 성패가 달린 것처럼 조금만 기온이 내려가도 식구의 안색을 살피듯 밖으로 나가 상태를 살폈다. 특히, 흙 속에 대강 심긴 자리만 어림짐작할 수 있는 비비추에 마음이 쏠렸다. 한 계절을 못 참아, 봄까지 기다리지 않고 고집을 부려 화단을 조성한 나의 이기심과 조바심이 후회도 됐다. 그러나 의미가 없는 후회였다. 나는 이 몇 그루 나무의 생존에 마음을 빼앗기며 한편으로는 적잖은 위로도 받고 있었다.

지난겨울은, 귀를 막아도 매일 들려오는 세상의 소식 못지않게 호된 강풍과 한파가 그칠 줄 모르고 몰려왔던 예외적인 계절이었다. 바람받이에 심긴 에메랄드그린의 가지들이 누렇게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따뜻한 입김도 쐬어주고, 화단 바깥쪽에 바람막이 왕골을 둘러쳐 주어도 소용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한파를 넘기면서 누렇게 변한 가지가 초록색을 간직한 가지보다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추위가 위세를 떨친 1월이 지나 2월이 되니 사철나무의 기질을 포기하고 에메랄드그린이 완연히 기개를 잃었다. 그래도 나는 이미 죽은 듯 축 처진 누런 가지를 들어 올려 안쪽에 여전히 미미하게 남아 있는 푸른 부분에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독한 겨울이라도 계절의 끝이 있다는 것은 이 죽어가는 나무에만 소망일 것인가. 결국, 에메랄드그린은 세 그루 모두 가지가 바닥을 향하고 지친 채로 봄을 맞았다. 이 나무들이 온몸으로 강풍과 추위를 막아낸 덕에, 3월이 되니 노랑조팝에도 새순이 돋았고 머지않아 기적처럼, 아무것도 없던 흙바닥에서 비비추 싹이 뾰족이 올라왔다. 마침내, 꽃들도 나도 겨울을 잘 이겨내고 완연한 봄을 맞았다. 다만, 에메랄드그린은 가지를 축 내린 차렷 자세로 셋 모두 모습이 변해버렸다. 소임을 다한 나무답게 바싹 말라 누렇게 변한 잎을 손으로 만지니 산산이 부스러졌다. 비비추가 꽃을 피우는 계절은 가을이란다. 나는 비비추가 가을에 꽃을 피울 때까지 이 대견한 나무를 그대로 두기로 했다.

마침내 삼 주 전 비비추가 봉오리를 맺었다. 비죽 솟은 줄기에서 보잘것없는 보라색 꽃들이 미안한 듯 달렸다. 그러나 에메랄드그린이 겨우내 막아주고 보호한 귀한 꽃이다. 가을이 됐으니 나는 다시 전문가를 불러 죽은 에메랄드그린을 뽑아내고 그 자리에 화살나무를 심었다.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지도, 사라지는 것을 불평하지도 않고 에메랄드그린은 조용히 화단에서 사라졌다. 누군가의 아궁이에서 온몸을 태워 방을 덥히는 데 쓰이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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