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충주 고구려비-희미한 빗돌에도 명징한 고구려의 흔적 [도재기의 천년향기]

도재기 문화에디터 2018. 9. 28.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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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심한 마모로 비문 400여자 중 200여자 판독…건립 주체·시기·목적 모두 ‘수수께끼’
ㆍ비문 속 ‘고려태왕’ ‘사자’ 등 고구려비 근거 명확…동북아 호령한 고구려 기상 재확인

추사 김정희의 서예작품 중에 ‘殘書頑石樓’(잔서완석루)가 전한다. 그 뜻풀이는 전문가마다 다양한데, 고문헌 연구가이자 추사 전문가인 박철상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비바람에 깎인 볼품없이 깨진 빗돌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몇 개의 글자’라고 해석한다. 금속이나 돌에 새겨진 문자를 연구하는 금석학자에게 썩 잘 어울리는 글귀다. 청나라 학자들과의 교류 속에 조선 금석학·고증학의 체계를 세운 추사다운 문구다.

충주 고구려비 옛 중원 고구려비, 국보 205호높이 203㎝, 너비 55㎝ (광개토대왕릉비 높이의 3분의 1)화강암 자연석 네면 모두 글자 새긴 ‘사면비’건립 시기 : 5세기 전반~6세기 중후반 추정발견 장소 :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 입석마을. ‘충주 고구려비’의 탁본.

금석학으로도 일가를 이룬 추사는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재발견’했다. 북한산 비봉 꼭대기에 비석 하나가 1000년 넘게 서 있었으나 누구도 그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도선국사, 무학대사의 비라는 이야기까지 전해졌다. 그런데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이 지역을 둘러보고 이를 기념해 568년 세운 진흥왕의 순수비라고 추사가 1871년 고증했다. 지금 국보 제3호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돼 있는 ‘신라 진흥왕순수비’가 그것이다. 추사의 진흥왕순수비 ‘재발견’은 금석학이나 고증학, 무엇보다 빗돌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몇 글자인 금석문의 중요성을 잘 말해준다.

‘충주 고구려비’의 전체 모습.

금석문은 후대에 기록한 문헌보다 더 귀중하다고도 할 수 있다. 당대 사람이 직접 새긴 것이어서 혹시 모를 왜곡이나 오류가 상대적으로 적을 수 있어서다. 화려하게 빛나는 유물에 비해 대중적 관심은 적지만 금석문은 역사적·학술적으로 소중하지 않을 수 없는 1차 사료다. 특히 문헌기록이 부족한 고대 역사와 문화 연구에는 더할 나위 없이 귀한 문화유산이다. 북한산 비봉의 빗돌, 그 비석의 몇 글자가 우리 역사를 다시 쓴 것이다.

여기 또 하나의 귀중한 비석이 있다. ‘충주 고구려비’(옛 중원고구려비·국보 205호)다. 남북한을 통틀어 한반도에 공식적으로 단 하나밖에 없는 고구려시대의 비석이다. 비석 앞면이 ‘五月中高麗太王祖王令’(오월중고려태왕조왕령)으로 시작하는 ‘충주 고구려비’는 1500여년 전 이 땅의 상황, 특히 동북아시아를 호령한 고구려 이야기를 말없이 들려준다. ‘진흥왕순수비’로 신라의 역사와 문화가 새로 쓰인 것처럼 ‘충주 고구려비’로 고구려 역사와 문화, 한국사가 다시 쓰였다.

■ 한반도의 유일한 고구려비

한국사 서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화재인 ‘충주 고구려비’는 높이 203㎝, 너비 55㎝ 정도로 기둥 모양이다. 화강암 자연석에 글자를 새긴 부분만을 갈아내 다듬고 예서풍의 한자를 새겼다. 중국 지린성 지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보다 높이는 3분의 1, 너비는 절반 정도로 작다. 하지만 자연석을 활용하고 네면 모두에 글을 새긴 사면비이자 서체, 공통된 글자 등에서 두 비는 비슷한 측면이 있다.

마모가 심해 지금 판독할 수 있는 비문은 적지만 ‘충주 고구려비’는 고구려시대 비석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다. 고구려는 지금의 중국 동북부와 한반도 중북부를 장악한 강국이었다. 하지만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확인된 고구려 비석은 단 3기다. 고구려 장수왕이 414년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의 업적 등을 기리며 광개토대왕릉에 세운 ‘광개토대왕릉비’가 그 하나다. 고구려 건국과 당시 대외관계, 광개토대왕의 업적 등 풍부한 내용의 1700여자가 새겨진 ‘광개토대왕릉비’는 당시 중국과 백제, 신라, 가야, 왜 등 동북아시아 역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다.

2012년 7월에는 역시 중국 지린성 지안에서 ‘지안 고구려비’가 발견됐다. 고구려 연구의 또 다른 사료로 학계를 흥분시켰지만 ‘지안 고구려비’는 중국 측의 ‘보이지 않는’ 통제로 한국 학자들은 접하기가 쉽지 않다. 그 연구도 극히 제한적이다. 200여자의 명문이 있는 ‘지안 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릉비보다 앞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고구려비뿐 아니라 삼국시대의 1차 사료인 금석문, 특히 현존하는 비는 소수다. 신라의 경우엔 지증왕 때인 501년 전후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포항 중성리 신라비’(국보 318호), 역시 지증왕 때인 503년 세워진 ‘포항 냉수리 신라비’(국보 264호), 법흥왕 때인 524년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울진 봉평리 신라비’(국보 242호) 등이 있다. 또 진흥왕(재위 540~576) 대에 세워진 비는 ‘서울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비롯해 모두 5기가 전해진다. 남한 지역에 3기, 북한 지역에 2기가 있다. 백제의 경우엔 의자왕 때 고위관료이던 사택지적이란 인물이 남긴 ‘부여 사택지적비’(보물 1845호)가 대표적이다.

현존하는 3기 중 하나인 충주 고구려비는 발견 과정도 화제를 모았다. 많은 문화재가 그러하듯 눈밝은 사람들에 의해 우연히, 극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충주 고구려비가 원래 발견된 곳은 충북 중원군 가금리 용전리 입석마을(현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이다. 입석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보듯 먼 옛날부터 이 자연부락 입구에 충주 고구려비가 서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고구려비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글자 확인이 쉽지 않을 정도로 닳았기 때문이다. 그저 큰 돌기둥이었다. 주민들에겐 민속신앙인 선돌로 여겨질 정도였다.

그 비석이 고구려비로 확인된 것은 1979년 4월이다. 충주 지역 문화예술 애호가들의 모임인 예성문화연구회 회원들이 유적·유물 답사 중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글자들을 확인한 것이다. 이후 단국대 학술조사단이 정식 조사를 벌여 학계에 보고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현재 충주 고구려비는 보존 등을 위해 다른 고구려 역사와 문화 관련 콘텐츠들과 함께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충주시 감노로)에서 공개되고 있다.

■ 고구려를 가깝게 만들다

‘충주 고구려비’는 그 정체가 아직까지 명확하지 않다. 학자들에 따라 많게는 400여자의 글자가 새겨진 것으로 추정하지만 판독이 되는 비문은 200여자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학자마다 다르게 해석된다. 많이 닳아 한 글자를 놓고도 여러가지 의견이 나오는 것이다. 같은 글자를 ‘大’(대)나 ‘太’(태)로 읽거나, ‘公’(공)이나 ‘令’(령)으로 읽기도 한다. 이 비를 누가, 언제, 왜 세웠는지를 정확히 보여주는 비문도 없다. 아마 건립 주체·시기와 관련된 명문도 있을 텐데 지금은 알아볼 수 없는 형편이다. 비문 속에서 단편적이지만 관련 단서들을 찾아 추정할 수밖에 없다.

비문이 희미하게 보이는 ‘충주 고구려비’의 세부 모습.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종합하면, 비의 건립 시기는 이르면 5세기 전반, 늦으면 6세기 중후반까지다. 두 시기가 특히 유력한데, 장수왕(재위 412~491)과 문자명왕(재위 492~519) 때다. 장수왕 시대로 보는 근거는 비문 속의 간지와 날짜, 당시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따른 영역의 확장,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 등을 고려해서다. 장수왕 시기라 하더라도 구체적 연대는 견해가 엇갈린다.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한 423년을 비롯해 449년, 450년, 481년 등이다. 문자명왕 시대로 보는 근거는 비석 앞면 첫째 줄의 ‘高麗太王祖王令’(고려태왕조왕령)이라는 문구와 당시 역사적 상황 등을 따져서다. 문자명왕은 장수왕의 손자다. 아버지가 요절하는 바람에 할아버지 장수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고구려를 운영했다.

비의 건립 목적, 성격도 학설이 다양하다. 고구려가 이 지역을 장악한 후 신라와 국경을 확정하기 위해 세운 척경비 또는 정계비, 기념비라는 주장이 있다. 여기에 개인의 공적비, 특히 장수왕의 공적비로 보기도 한다. 이외에 왕의 순행을 기록한 순수비, 고구려와 신라가 특별한 사건으로 만난 것을 기록한 비라는 등의 견해도 있다.

그렇다면 누가 언제 왜 세웠는지도 명확하지 않은데, 고구려의 비라고 확정할 수는 있을까. 고구려비라는 근거는 비교적 명확하다. 비문에 고구려의 왕이라는 의미의 ‘高麗太王’이나 ‘使者’(사자) 같은 고구려 관직명 여러 개가 보인다. 또 광개토대왕릉비에서도 보이는 ‘古牟婁城’(고모루성) 등 고구려 영역의 지명 등도 있다. 여기에 ‘新羅土內’(신라토내) 같은 고구려 입장에서 신라를 부르던 글자들도 드러나고 있어서다.

1979년 4월 당시 주민들과 고구려비

판독의 한계에도 불구, 충주 고구려비는 이 땅의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중요성과 더불어 당시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여러 정보를 제공해줘 가치를 드높인다. 발견 이후 나오고 있는 국내외 학자들의 많은 논문이 이를 잘 말해준다. 충주 고구려비는 무엇보다 고구려의 대외관계, 특히 신라와의 관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비문 중 큰 관심을 끈 것은 ‘新羅土內幢主’(신라토내당주)라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이는 신라 영토 안에 고구려 군대가 어떤 형식으로든 주둔하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고구려가 당시 신라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여기에 신라를 ‘동쪽의 오랑캐’라는 뜻인 ‘東夷’(동이)로 표현하기도 한다. 고구려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고구려 사람들의 세계관, 신라를 보는 고구려인들의 시각이 은연중 나타난다. 또 고구려의 관등조직이나 인명 표기 등도 확인할 수 있어 의미가 크다. 여기에 충주 고구려비를 세울 당시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비가 증명한다는 것이다. 백제, 신라 모두 장악하려고 탐을 낸 지정학적 요충지에 고구려가 진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당시 동북아의 강자 고구려의 진면목이다.

한국사에서 고구려는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고구려의 유적, 유물은 극소수다. 북한 지역에는 많이 남아 있지만 남북 분단으로 벽화고분이나 평양성 자취, 각종 금제·철제 유물 등을 만나기 어렵다. 중국 땅의 고구려 문화유산보다도 접하기 힘든 안타까운 실정이다. 그런 점에서 ‘충주 고구려비’는 고구려를 우리 앞에 성큼 다가서게 만든다. 또한 북한 내 고구려 유적과 유물을 떠올리게 한다. 정치적, 군사적 차원을 훌쩍 뛰어넘어 남북 문화유산 교류의 중요성을 새삼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사진 충주시청·국립중앙박물관·문화재청 제공>

도재기 문화에디터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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