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죽음, 맞이하시겠습니까? 맞으시겠습니까?

노도현 기자 2018. 9. 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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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100세 시대의 존엄한 마무리…새로운 임종 문화 ‘웰다잉’

지난 11일 경기 용인시 이동읍사무소에서 열린 ‘죽음교육’ 현장에서 노인대학 어르신들이 삶을 되돌아보는 교육을 받고 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넌 안 죽을 거야? 허허 당연히 죽어야지, 안 죽는 사람 어딨어” 김수환 추기경·LG 구본무 회장은 죽기 전 ‘연명의료’ 거부 뜻 사전의료계획서 쓰고 호스피스 완화의료로 나와 가족 부담 줄여 ‘좋은 죽음’ 맞으려면, 사랑하고 용서해 후회 없는 ‘웰리빙’부터

“난 안 죽을 거야, 이런 분 계세요?”

지난 11일 경기 용인시 이동읍사무소 대회의실에서 열린 이동읍 노인대학 강의현장. 노인 30여명 앞에서 김경남 강사(75)가 물었다.

여기저기서 “허허 당연히 죽어야지. 안 죽는 사람이 어딨어”라는 소리가 들렸다. 김 강사는 “이 가을 날씨에 점심 맛있게 먹고 반가운 사람 만나러 왔는데 기껏 죽는 이야기 한다며 불쾌해하실지 모르겠다”면서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이날 강의 주제는 ‘100세 시대의 존엄한 마무리’였다. 일주일에 두번 노인대학을 찾는 참가자들은 노래교실이 열릴 때가 가장 좋다고 했지만 ‘죽음 교육’에도 귀를 기울였다.

김 강사는 “삶의 마지막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는 숙제 중의 숙제”라며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맞장구를 쳤다. “아프고 돈 달리는 걸 해결하기도 힘든데 죽음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계시죠? 이제는 해야 할 때입니다. 정부는 2년 전 ‘웰다잉법’을 통과시키고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임종문화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 죽음을 ‘맞는’ 사람들

삶의 질만큼 ‘죽음의 질’도 중요해지고 있다. 살아온 날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웰다잉’(well dying)이 고개를 든 이유다. 지난 2월부터 시행된 웰다잉법의 명칭은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다.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어 ‘존엄한 죽음’이 가능해졌다.

연명의료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등 4가지 의료행위를 말한다. 이를 중단하기 위해선 환자 본인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연명의료계획서를 직접 작성하면 된다.

스크린에는 고(故) 김수환 추기경과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사진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모두 연명의료를 거부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김 강사는 이들의 죽음을 두고 ‘당하는 죽음’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이라고 했다. 연명의료결정제도에 대한 논의를 불러온 ‘보라매병원 사건’과 ‘김할머니 사건’을 소개하기도 했다.

특히 2008년 김할머니 사건은 존엄사 논쟁의 새 국면을 맞게 한 일이다. 김할머니는 2008년 2월 폐암 조직검사를 받다 과다출혈로 식물인간이 됐다. 자녀들은 “평소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 하셨다”며 인공호흡기와 같은 연명치료의 중단을 요구했고, 재판 끝에 2009년 5월 대법원에서 승소했다. 김할머니는 인공호흡기를 떼고도 6개월 넘게 자발적 호흡을 이어가다 2010년 1월 사망했다. 강의를 듣던 한 노인이 “나도 애들한테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해뒀어”라고 크게 말했다. 김 강사는 “그걸 문서로 남겨두는 것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라고 했다.

45분짜리 강의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됐다. 절반가량이 강당 뒤편에 있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을 돕는 상담사에게로 향했다. 너도나도 신분증을 내밀며 의향서를 작성하고 싶다고 했다. 이날 의향서를 작성한 이순자씨(77)는 “우리 남편이 간경화로 한 5년 고생하다 떠났다. 그 꼴을 다 봤으니 (내가) 편하게 가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표로는 연명의료결정제도가 자리를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19일 기준 5만6204명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 하지만 극복해야 할 과제는 많다. 우선 연명의료 중단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조건인 의료기관윤리위원회를 설치·등록한 의료기관이 적다. 또한 미리 의향서를 작성하지 않은 환자가 의사표현을 할 수 없을 때 연명의료를 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절차가 복잡하다.

지난 11일 경기 용인시 이동읍사무소에서 노인대학 어르신들이 연명의료의향서 작성과 관련된 상담을 받고 있다. 정지윤 기자

■ ‘웰다잉’은 곧 ‘웰리빙’

노인대학 두번째 시간에는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다뤘다. 임종을 앞둔 환자와 가족이 가능한 한 편안하고 충만한 삶을 살도록 하는 종합적인 돌봄으로 신체적, 심리·사회적, 영적 영역을 아우른다. 참가자들은 말기암 환자가 호스피스 병동에서 가족과 생활하는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편집영상을 봤다. 환자가 부인에게 ‘못난 남편 때문에 고생만 했다. 미안하고 사랑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읽어내려가자 몇몇이 훌쩍였다. 가족들끼리 편지를 주고받는 것도 호스피스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보건복지부는 이달부터 호스피스 완화의료 사업 시범기관에 병원 14곳을 추가해 총 58곳으로 말기환자 돌봄 서비스를 확대했다.

박행자씨(69)는 신분증을 가져오지 않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당장 쓸 수 없다며 아쉬워했다. 박씨는 “예전에는 병원 중환자실에서 죽는 게 당연한 걸로 여겨져 저렇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는지 몰랐다. 자식들한테도 부담이 덜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가요 ‘내 나이가 어때서’를 부르며 강의를 마무리했다.

‘한 부모는 열 자식을 거느려도 열 자식은 한 부모를 못 모신다’는 옛말이 있다. 가족구조가 변하면서 이런 믿음은 더 커졌다. 이날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을 도운 이학재 상담사는 “대부분 자식들에게 짐이 되기 싫다는 이유로 의향서를 쓴다”고 말했다.

최영숙 대한웰다잉협회 대표는 “예전에는 3대가 같이 살면서 자식들을 잘 키우면 아이들이 날 돌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산업사회로 들어서고 가족규모가 작아지면서 자식농사를 잘 지어놔도 내가 자식 덕볼 일은 없다는 인식을 하게 됐다”며 “그래서 국가가 노인을 돌보는 장기요양보험제도가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최 대표는 “노인분들이 요양원, 중환자실, 영안실로 이어지는 죽음의 코스를 주변에서 많이 봐왔기 때문에 노후는 물론 죽음도 자신이 준비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다”고 했다.

최 대표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의미 있는 죽음도 맞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죽음을 앞두고 후회를 적게 하는 것이 ‘좋은 죽음’입니다.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고, 베풀고, 용서하는 것이 후회를 줄이는 길이죠. 그래야 나중에 잘 살았다며, 웃으면서 떠날 수 있습니다. ‘웰다잉’은 곧 ‘웰리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심폐소생술·인공호흡기·혈액투석·항암제 투여…내가 결정합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쓰는 법

‘또 하나의 유언장’인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19세 이상이라면 건강한 사람도 써놓을 수 있다. 작성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어렵지도 않다. 신분증 외에는 따로 준비할 것이 없고 비용도 들지 않는다. 의향서를 작성하려면 반드시 보건복지부 지정을 받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기관을 찾아 상담사로부터 충분한 설명을 들어야 한다. 대기 시간 없이 상담을 받으려면 등록기관에 미리 전화해 상담시간을 예약하면 된다. 등록기관을 통해 작성한 의향서는 연명의료 정보처리시스템의 데이터베이스에 보관돼 법적 효력을 인정받는다.

의향서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등 네가지 연명의료에 대한 본인 의사를 묻는다. 4가지 중 원하는 항목만 중단 선택을 할 수 있다. 연명의료 중단 이후 호스피스를 이용할지, 사망 전 가족들이 의향서를 열람할 수 있도록 할지도 묻는다.

말기환자 또는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는 연명의료 유보나 중단에 관한 의사를 연명의료계획서로 남겨놓을 수 있다. 유보는 연명의료를 처음부터 시행하지 않는 것, 중단은 시행하던 연명의료를 그만두는 것이다. 의료기관윤리위원회가 설치된 의료기관에서만 계획서를 작성할 수 있다. 담당의사와 전문의 1명이 환자의 시기를 판단한다.

작성된 의향서와 계획서는 연명의료정보포털(www.lst.go.kr)에서 조회할 수 있다. 당사자는 언제든지 내용을 변경하거나 철회할 수 있다.

환자가 의사표현을 하지 못하고 미리 작성한 의향서나 계획서도 없는 경우 가족의 진술이나 의사로 결정한다. 가족 2명 이상이 연명의료에 대한 환자의 평소 의향을 일치하게 진술하고 담당의사와 전문의가 함께 확인하면 연명치료를 유보하거나 중단할 수 있다. 환자의 평소 의향조차 확인하기 어렵다면 가족 전원합의로 결정한다. 미성년 환자의 경우 친권자가 결정하고 의사 2명이 확인해야 한다.

노도현 기자 hyu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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